대박 빚던 미아스의 손 혹심한 홀로서기 수업강제규 필름 전성기 이끈 영화 프로듀서

[감성 25시] 이성훈 프로듀서
대박 빚던 미아스의 손 혹심한 홀로서기 수업
강제규 필름 전성기 이끈 영화 프로듀서


제목만으로 흥행 여부에서 감독의 이름, 영화 제작사까지 광고 문안처럼 스치는 영화가 있다. 바로 이 영화들. 쉬리(99), 단적비연수(00), 오버 더 레인보우(01), 몽정기(02), 블루(03), 태극기 휘날리며(04). 극장을 뜸하게 찾는 사람조차 이 영화가 강제규 필름의 것이란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흥행뿐만 아니라, 몇몇 영화는 자국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되었다.

강제규 필름의 영화에 이성훈 프로듀서를 거친 영화들이다. 우리는 감독이자 제작자인 ‘강제규’ 란 이름은 쉽게 기억할지언정, 영화가 탄생하기까지 연출을 제외한 모든 과정을 꾸려나간 프로듀서의 이름은 기억해 내진 못한다.

강제규 필름에선 한때 이성훈 프로듀서를 가리켜 ‘운 좋은 놈’ 이라고 불렀다. 스탭 보조(말이 보조 요원일 뿐, 사실 심부름꾼이다 마찬가지였다)로 활동하다 ‘은행나무 침대’를 거쳐 27살에 덜컥 ‘쉬리’의 제작부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고속출세였다.

그가 맡은 영화들이 줄곧 흥행의 상승곡선을 달리자, ‘이성훈 프로듀서를 거쳐야 흥행에 성공한다’는 말도 안팎으로 떠돌았다. 그는 강제규 감독이 유독 편애하고 믿음직스러워 하는 ‘이쁜 자식’이기도 했다. 경력도 많지 않은 그를 ‘쉬리’의 제작부장으로 공식 임명하던 날, 질시와 의혹의 시선은 안 봐도 뻔하다. “선배들이 위에 계신데 ‘성훈이가 쉬리의 제작부장이다’라고 공식 선언 한 날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그 한마디로 제 인생이 바뀌었으니까요.”

선배들에게 미안한 맘이 컸다. 부담이 돼서 덜컥 들어온 행운을 거절까지 했다. 하지만 강제규 감독의 고집이 더 셌다. ‘성훈이 아니면 안 된다’고 모든 제작진에게 못박아 놓았기 때문이다. “울면서 웃는다는 기분이 어떤건지 아세요? 감동을 받아서 가슴이 뭉클하고 눈에서 눈물이 나는데, 입은 양 옆으로 길게 벌어져 저도 모르게 웃고 있지 뭐예요.”

"성훈아, 너 그냥 스탭해라"
이성훈 프로듀서와 강제규 감독과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영화판 인생을 이야기 하는데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프로듀서이기 전에 배우 지망생이었고, 그 전엔 바텐더 아니면 카 센터의 정비공이었다.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던 그의 인생도 한편의 영화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 보자는 저와의 약속과 형의 조언이 강제규 감독님을 찾게 되었죠.” 그렇다면 강제규 감독이 배우 지망생이었던 그를 캐스팅이라도 한 것일까.

“아뇨, 영화 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한 번 배우가 되어 볼까 하는 철없는(?) 생각을 했죠. 당시 ‘은행나무 침대’를 만들고 있다는 영화발전소를 찾아갔어요. 한참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계신 감독님에게 ‘먹여만 주세요. 시키는 일은 모두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어요. 참 용감했죠?”

그 때 강감독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래라’ 한 마디였다. 무책임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조차 감사하게 여겼다. 그날부터 그는 십년 동안 강 감독과 함께 했다. 누구보다 아침 일찍 출근해 직원들의 책상을 닦고 스탭과 배우들의 일을 도와주고 현장 심부름까지 하며 일년 동안 견습생으로 지냈다. 강제규 감독은 묵묵히 그를 바라 보기만 했다. 따뜻한 시선 한번 건네지 않았고 이름 한 번 불러주지도 않았다. 서러웠다.

‘은행나무 침대’가 흥행에 성공하고 다음 영화 ‘지상만가’를 준비할 때 강감독이 그를 불렀다. 2년만이었다. “성훈아, 넌 배우는 아닌 것 같다. 너 그냥 스탭해라. 그게 너한테 맞는 거 같다.” 그날로 그는 공식적인 제작부 스탭이 되었다. “그땐 감독님이 하는 말은 모두 진리였어요. 전 아마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을거예요.”

‘쉬리’ 준비기간 3년 동안 그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 제작이 얼마나 중요譏?절감했다. 강감독이 옳았다. 영화제작이 자신의 천직이구나 싶었다.

1999년 2월 13일 ‘쉬리’ 개봉 날, 그는 결심했다. 이 분야의 최고가 되기로. 무엇보다 전문적인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낀 그는 서울 예전 영화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공부와 인연이 없었던 것일까. 그 보다 강 감독과 끈끈한 유대 관계 때문일까. 한 학기를 마칠 무렵 강 감독에게 전화를 받았다. “성훈아, ‘은행나무2’를 준비해야겠다. 영화사로 들어와라.” 그는 이 한마디에 학교를 휴학하고 영화 ‘단적비연수’의 제작부장을 맡았다.

줄줄이 흥행에 성공했다. 뿌듯했다.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다른 영화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감성적인 멜로 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 성공하자, 회사가 갑자기 커져 버렸다. ‘몽정기’ 또한 예상을 엎고 대박을 터트렸다. 스케일이 큰 영화 ‘블루’는 공동 프로듀서를 해야 할 정도였다. 학교와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전쟁 영화가 만들어 질 거라는 얘기가 나돌 즈음 명필름과의 합병은 제작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제작부는 명필름의 이은 대표 관리하에 들어갈 것이라고 강감독이 말했다. 강제규 필름 소속 제작부원들이 그때부터 하나둘 회사를 떠났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민감할 때였다. 그도 이제 그만 떠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 때 강감독이 그를 붙잡았다. “성훈아, 너마저 가면 어떡하니? 태극기 휘날리며 제작 부장은 너가 해야 한다. 이번 한 번만 도와다오.” 첨으로 강감독의 눈물을 보았다. 어찌됐건 그 순간은 진심이었다. 의리로 먹고 사는 직업 아닌가, 생각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대박을 터트리고 나가겠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 는 그의 바람대로 흥행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제 떠날 때가 왔다.’ 이 때다 싶었다. 언제까지 강감독의 보호아래, 그늘 밑에 있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곁을 떠나는 아들의 심정으로 강감독에게 이야기 했다. 출가를 하는 아들을 바라보듯 강 감독은 그에게 넓은 세상에 나가 부딪쳐보고 힘들면 돌아 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돌아 가도 꼭 성공해서 돌아 가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가 강제규 감독과 헤어진 사건에 대해 어떤 이들은 ‘강 감독이 이성훈 프로듀서를 내쳤다’, ‘10년 동안 충성을 다한 식구를 떠나보내다니’ 라며 강 감독을 무심한 사람이라 욕하는 이도 있다. 시각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는 성장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통과 의례로 받아 들인다. 부

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겠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성공하면 다시 돌아가겠다는 말을 지키기 위해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행운은 더 이상 그에게 손짓하지 않았다.

2004년 5월 1일 그가 독립한 날부터 6개월 동안 그는 한 사람이 평생 동안 느껴도 모자랄 배신을 당했다. 제작사를 만들기 위해 10년 동안 모은 돈을 절친한 후배 제작부원에게 빌려주고 사기를 당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충격이 커서 3개월은 폐인처럼 지냈다. 다시 재기를 하려던 때 친한 친구가 그의 뒷통수를 친 사건은 그를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몇 개월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살았다.

모진 풍파 견디며 새롭게 출발
영화판에서 의리 있기로 소문난 그는 순간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일 뿐이라고 자책했다. 헛 살았구나 싶었다. 평소 그의 주변에 그와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모두 그를 떠났다. 남은 사람은 제작부 스탭 3명 뿐. 모두 떠났지만 그들은 끝까지 자신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의리있는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 아니면 모두 포기하고 말았을 거예요. ‘선배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라고 말하는데 어찌 힘이 안 나겠어요.” 작년 겨울부터 그에게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는 현재 프리랜서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알게 모르게 그는 영화판에서 좋은 이미지로 소문나 있어, 도와 주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쇼이스트 대표는 “성훈이 너 하나만 믿고 사준다. 책임지고 잘해라.” 한 마디를 한 채 그가 제작중인 영화 ‘식객’을 샀다. 쇼이스트 자체 제작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또 세발 자전거에서는 ‘철없는 딸’을 제작중이다. ‘오버더 레인 보우’ 시절 함께 했던 안진우 감독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저만 바라보던 제 밑의 세 명이 지금 각각 영화 하나씩 맡아서 진행시키고 있어요. 일이 정말 잘 풀릴 것 같아요. 예감이 좋아요. 이것 보세요. 여기 이렇게 좋은 시나리오가 저에게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데 괜히 가슴이 찡해 온다. 그의 학생용 가방 안에서 ‘사월’, ‘머나먼 송바강’, ‘트라이 앵글’, ‘유리벽’ 등등의 시나리오가 줄줄이 나왔다.

언뜻 봐서는 그 시나리오가 어떤 영화로 탄생될지 잘 모르겠으나, 그가 하는 일이 모두 잘 되었음 싶다. “앞으로 10년 후 마흔 다섯까지의 계획은 제리 브록하이머처럼 정말 훌륭한 영화 한 편을 제작하고 싶다는 거예요. 관객들이 즐거워 하고 재밌어 하는 상업 영화를 만들거예요.”

아이같이 웃는데, 참 해바라기 같은 웃음이다. 겨울에 피어난 해바라기 같은 사람. 그래서 혼자서 힘들지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해바라기처럼 더불어 환해진다.

유혜성 객원기자


입력시간 : 2005-01-27 11:56


유혜성 객원기자 comety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