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사회 속에서도 풍류와 문화의 한 축을 형성했던 여인들

사유의 삶을 산 藝人 한 평생, 기생
봉건사회 속에서도 풍류와 문화의 한 축을 형성했던 여인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조선시대 3대 가집(歌集)의 하나인 ‘가곡원류’에 전하는 선조 때의 기생 이매창의 시조 ‘이화우(梨花雨)’다. ‘비처럼 휘날리는 배꽃’과 ‘추풍 낙엽’의 이미지가 어우러져 임을 그리워 하는 마음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채색하고 있는 이 시조는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이별가의 절창이다.

기생들의 삶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시였다. 봉건 사회 속에서 자기 표현의 수단도 가지지 못한 여인들 가운데 당대 상층부의 남성 문화와 교류하며 섬처럼 떠 있었던 여성 계층이 바로 기생이다. 시인 문정희는 2000년 황진이를 비롯한 기생들의 시들을 모아 ‘기생 시집’을 출간하면서 후기를 통해 예인으로서 기생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남성은 풍류라는 이름으로 장난 삼아 기생과 희롱하였지만 기생은 삶 그 자체로 슬퍼했고, 시를 지어 만남과 이별의 절창을 남긴 것이다.”

옛 사람들이 ‘말을 알아 듣는 꽃’, 그래서 해어화(解語花)라고도 칭했던 그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性的) 존재와 천한 신분이란 제약에 갇혀 예인으로서의 가치가 평가 절하됐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 저급한 게이샤 문화의 유입으로 풍미와 절도는 사라지면서, 기생은 왜곡된 성과 관련된 이미지로 폄하되기에 이른다.

최근 남성 풍류의 상징인 동시에 성적 대상이었던 그들 기생의 삶을 다각적으로 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02년 김탁환의 소설 ‘나, 황진이’로 불붙기 시작한 황진이 붐은 지난해 말까지 이어져, 작가 전경린의 소설 ‘황진이’가 15만부나 팔려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기생과 기생 문학 등을 다룬 책도 20여 권이 나왔다. 오랜 시간 잊혀져 있던 기생의 삶이 새롭게 관심을 끄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예술적 차원에서 기생을 다시 보다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센터에서 1월 13일부터 열리고 있는 ‘기생전’은 이렇듯 굴절된 기생의 역할과 실상을 시각 예술적 차원에서 짚어 보는 이색 기획전이다. 원판 사진 엽서 및 고미술품, 현대 미술품, 규방 용품, 여성 장신구, 고증 한복 등을 통해 의, 예 그리고 미를 갖춘 기생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그들의 삶의 편린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로 선택된 전시품은 엽서와 원판 사진 400여 점.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엽서와 사진들로, 한국과 일본의 20여 개 제작소에서 찍고 만들었다. 기생들이 무희 학교(기생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모습이나 담배를 피며 바둑을 두는 모습 등 당대의 풍경들이 풍속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한반도 지도에 승무를 추는 기생을 그려 넣은 일제 때의 엽서. 일제 식민지의 당위성과 홍보용 목적으로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처녀지’를 점령했다는 침략자의 오만한 시선이 기생의 가녀린 춤 사위로 형상화돼 아련한 상흔을 일깨운다.

난이 그려진 기생의 치마폭도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다. 난은 본시 고아하고 청아한 기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번에 공개된 작품은 조선 후기 선비가 어느 아름다운 기녀를 위해 헌사한 것으로 보인다. 저명한 남자들을 매료시키는 법을 익히 터특하고 있었던 기생들은 어머니와 아내라는 일반적인 여성들이 누릴 수 있는 아무런 권리도 없었으나, 남자들의 머리 속에서만은 여느 여인네도 누리지 못 한 대우을 향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또 김정희의 ‘완당집’ 등 여러 문집에 수록됐고 국립박물관에도 그림이 소장돼 있을 만큼 글과 그림에 빼어났던 19세기 전반 평양 명기 죽향의 ‘묵란도’ 등은 기생의 당대 특출난 예인으로서의 면모를 “?없이 보여준다. 이 밖에 성행위를 묘사한 기생들의 동경(銅鏡)과 향갑 노리개 등 장신구, 사대부의 아녀자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화려한 기녀 의상까지 준비돼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서울옥션 김효선 팀장은 “기생은 일제 시대 이후 성매매 여성이란 부정적 시각으로만 격하됐던 게 사실”이라며 “지적 능력, 예술적 능력을 갖고 진선미의 덕목을 추구, 수백 년 간 존재해 왔던 아름다운 이미지로서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 받지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지적대로 현재는 남성의 성적 노리개로서만 기생을 보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일제시대 이전 기생은 여성과 천민이라는 신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관대작과 상류 인사를 상대하였던 또 다른 특권계층으로서, 통속적인 몸과 술을 파는 화류계의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기생의 유래에 대한 정설은 없으나, 고대 부족 사회의 무녀로부터 그 시원을 찾아볼 수 있다. 대략 삼국시대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기원설이 지배적이다. 조선시대 과학사 및 여성사 연구학자 정성희는 저서 ‘조선의 성풍속’에서 기생이 무녀에서 파생됐다는 설에 또 한 가지를 추가시킨다. 즉 삼국시대 정복 전쟁 당시 포로나 후삼국 통일 당시 고려에 항거하고 떠돌았던 후백제인들인 양수척(楊水尺) 출신의 여자들을 관에 예속시켜 비(婢)로 삼았으니, 이들이 기녀의 공급원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이다.

기생의 역사적 접근
조선 말기에 오면 기생은 그 격에 따라 일패(一牌), 이패, 삼패로 분화된다.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1927)는 갈보의 종류를 기생, 은근짜, 탑앙모리, 유녀화랑, 여사당패, 색주가 등으로 구분했다. ‘몸은 천민이나 눈은 양반’인 기생은 일패로서 관기의 총칭이었으며 신분상으로도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한국 전통 가무의 보존 전승자들로서 뛰어난 예술인들이었다고 하였다.

일제시대에 이르면 기생의 예능활동은 위축되지만, 사회참여적 성격은 더욱 강화된다. 이번 전시회에 기생 사진 엽서를 제공한 미술사학자 이돈수(코리아니티닷컴 대표) 씨는 “사진 엽서 수집을 통해 신문물을 수용한 근대화된 기생이나, 피지배국의 여성으로서 타자적 시각에서 바라본 기생, 관광 상품으로서의 기생 등 일반적인 양반의 풍류와 성적 욕망의 대상과는 사뭇 다른 사회의 다양한 컨텍스트 속에 머무르는 기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성이라는 인간의 본능에 솔직했던 기생의 특성 역시 예술의 더 할 수 없이 절실한 본질적 모티프를 제공하는 데 일조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유교적 질서와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는 현실에서 남녀의 문제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남성 문인이나 여염집 여성들과 달리, 기생들은 위선 없이 그들의 외로움과 사랑을 토로했고, 삶으로 실천했다.

조선시대 여류 시인으로서 가장 빼어나다는 찬사를 받는 황진이는 당시 명창 이사종과 6년간 계약을 맺고 결혼 생활에 들어 가기도 했다. 문 시인이 “20세기 프랑스 최고의 여성 철학자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계약 결혼의 지성적 신선미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고 한, 바로 그 사건이 좋은 예다.

▲ 미술사학자 이돈수
"기생은 천민의 몸에 양반의 머리 가져"

지난 20년간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12,000~13,000여 점의 엽서와 사진을 수집해 온 미술사학자 이돈수(39) 씨는 일제의 저급한 게이샤 문화가 유입되어 사회적 경시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기생을 보다 다각적이며 객관적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일제 시대 이후에는 기생의 예능 활동이 위축되고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정적 이미지만을 안타까워하기 전에, 기생의 위상을 거시적 역사적 틀 속에서 먼저 고찰했을 때 기생은 제대로 평가됩니다.”

이 씨는 “격이 높은 기생을 가리켜 ‘천민의 몸, 양반의 머리’라 일컬었다“며 “비록 탄隙?천민이었지만 상대하는 이의 격에 맞게 가무(歌舞), 시(詩), 서(書), 화(畵)의 재능과 지조(志操), 지략(智略), 의협(義俠)의 덕목을 두루 갖춘 교양인이었다”고 규정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부정적 인식 속에서도 대한제국 시대에 국채 보상 운동, 3ㆍ1운동에 뛰어 든 ‘사상 기생’, 일제 때 기생 조합 사건과 같은 ‘항일 기생’ 등 독립 운동가로서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돋보이는 근대 기생의 존재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창출된 허구의 표상을 유념하여 부정적 요소를 신중하게 제거한다면, 우리 문화의 일부로서 기생의 정체성 파악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씨가 이번 ‘기생전’을 통해 거는 소망이 있다. 여성 해방의 리더로서 신문물의 도입과 소비를 이끌어갔던 기생의 주체적 역할, 전통 문화의 계승자로서의 예인의 면모를 엽서와 사진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고 저간의 오해를 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5-01-27 13:36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