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보상' 새 불씨 만들었다새로울 것 없이 의혹만 부풀린 결과, 관련기록·문서 모두 공개해야국민의 재산·권리침해 논란, 재협상 요구 재론 가능성도

[특별기고] 한일협정 외교문서 공개의 의의
'개인보상' 새 불씨 만들었다
새로울 것 없이 의혹만 부풀린 결과, 관련기록·문서 모두 공개해야
국민의 재산·권리침해 논란, 재협상 요구 재론 가능성도


1월 17일 한일청구권협정 외교 문서 가운데 5건의 문서가 공개되었다. 이번의 문서 공개는 협정 체결 40년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외교 문서를 상대로 한 최초의 행정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통해 문서 공개를 이루어 냈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고 외교부 문서고에서 잠자고 있던 문서들이 햇빛을 보았지만, 피해자들의 문제를 다루어 왔던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고 그 동안의 의혹들을 푸는 데 실질적 도움을 줄 지 의문스럽다. 오히려 의혹만 늘어 난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는 마치 한국 정부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보도하고 있어 다소 어렵더라도 문제의 본질을 명확히 하려 한다.

한일양국, 개인청구권 권리소멸 주장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한 대일 과거 청산 소송에서 1990년대말까지 한일 협정에 대한 양국의 견해는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오면서 한일 양국의 견해가 180도 돌변하여 개인 청구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가 소멸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던 것이다. 즉, 피해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청구권이 과연 국가간의 조약으로 소멸될 수 있는 것인가, 소멸되었다면 어디까지 소멸되었는지의 문제에 대한 시원한 답을 듣고 싶었다.

청구권 협정의 해석에 대해 한일 양국 정부는 보조를 같이 하고 있다. 이동원 외무장관과 청구권 협정에 서명한 시이나 외상은 1965년 11월 국회 특별위원회에서 청구권 협정에 의해 ‘외교 보호권만을 포기한 것’이라고 명언했다. 1991년 8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야나이 외무성 조약국장 역시 ‘외교 보호권을 상호 포기한 것이지, 개인 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에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확인했다. 한국 정부도 1995년 9월 국회 통일외무위원회에서 공노명 외무장관이 “개인적인 청구권에 대해서는 정부가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일본측과 동일한 입장을 밝혔으며, 2000년 이정빈 외교통상부장관은 “청구권 협정이 개인의 청구권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등 재판을 요청할 권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확언했다.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 문서의 일부가 공개된 17일 태평양 전쟁 희생자 유족회 외원들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희생자들의 사진을 들고 오열하고 있다. / 최흥수 기자

양국 정부가 개인 청구권을 두고 신경을 곤두 세운 것은 한국 정부는 한국인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보상 문제가, 일본 정부는 강제로 몰수당한 일본인들의 사유 재산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 등에 대한 보상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개인 청구권이 소멸된다면 우리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권리만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청구권도 상호 소멸되기 때문에 그리 간단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가 2000년에 들어 와서 개인 청구권까지 당시 협정으로 소멸되었다는 입장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일 과거 청산문제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법정, 한국 법정 등 범국제적인 재판으로 번져갔고, UN인권위원회나 ILO전문가위원회에서도 주요한 쟁점으로 취급되면서부터다. 가장 손쉬운 해결이라면 협정으로 매듭 짓는 것이다. 하지만 법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과연 국가가 나서서 개인의 청구권을 일방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는가, 소멸시킬 수 있는 것과 소멸시킬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근거에서 소멸되었는가 등의 복잡한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포기할 수 있나
먼저 청구권 협정 제 2조 1항을 보면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에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해결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고 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로 개인의 권리란 국가간의 협정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포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청구권협정 제 2조 3항을 보면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 체약국의 관할 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 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의 핵심어는 ‘조치’라는 말이다. 즉 ‘재산, 권리 및 이익’에 대해서는 각각 국내적 조치로서 권리를 소멸시켜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로서 일본은 재산권 조치법이라는 법을 제정했고, 한국은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법을 만들어 각자 국내적 조치를 완료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논란은 청구권에 있다. 청구권이 ‘재산, 권리, 이익’에 해당하는 재산적 청구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 사할린 억류자 문제 등 반인륜 범죄에 따른 피해는 앞서의 청구권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들이다. 즉, 중대한 인권 침해 범죄는 국가가 어떤 협약으로도 자국민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게 국제법 학자들의 견해다. 이를 부정하는 어떤 협약도 국제법상 ‘공리법 위반(jus cogens violations)’에 해당돼 원천 무효가 된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이러한 청구권 소멸 문제가 협정 체결 최종 단계까지 심각한 논란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아마도 일본 정부는 협정으로 인하여 향후 더 이상 어떠한 청구도 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하려 했을 것이고, 한국 정부는 대일 민간 청구권 8개항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떠안더라도 추후 발생할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개별 소송을 통해 구제 받을 수 있는 길을 터 놓아야 한다는 쪽으로 협상에 나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쉽게도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서는 협정 체결 막바지에 밤을 세워가면서 양측의 대립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는 점만이 확인되었고, 무엇이 논의되었고 어떻게 타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의혹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외교통상부가 보유하고 있는 관련 기록의 일체와 국가정보원. 재무부, 경제기획원 등 유관 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관련 문서까지도 공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결국 국민들로부터 의혹과 불신을 덜고 국정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일 것이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 김은식


입력시간 : 2005-01-27 15:18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 김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