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같은 여백으로 영혼을 사로잡다강한 자의식으로 똘똘뭉친 싱어송 라이터20대 청춘의 방황을 노래한 '자유인'

[감성 25시] 싱어송 라이터 손지연
쉼표같은 여백으로 영혼을 사로잡다
강한 자의식으로 똘똘뭉친 싱어송 라이터
20대 청춘의 방황을 노래한 '자유인'


“난 나그네야, 나그네. 왜 있잖아.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는 정처 없이 떠도는 구름 같은 나그네야.” 마치 라디오 헤드의 ‘Creep’을 듣는 기분이다. 다소 자조 섞힌 목소리로 포기한 듯 읊조리는 “나는 양아치야!” 같은 말이었을까. 그녀는 그렇게 노래하듯이 이야기 했다. “실은 난 양아치야. 20대땐 분명 그랬는데 이젠 나도 나이가 있잖아. 나그네라 불러줘.”

초면에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에고이스트거나 천진난만한 영혼의 소유자일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해당되는 싱어송 라이터(singer-songwriter) 손지연(33)은 어눌한 말 솜씨로,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정감있게, 그렇게 서슴없이 다가왔다. 2집 앨범 ‘The Egoist’를 들고서.

대뷔앨범 '실화'에 이어 2집 발매
이 예사롭지 않은 가수는 2003년에 데뷔 앨범 실화(實話ㆍMy Life′s Story)로 속도를 내서 달리는 세상에 쉼표를 찍었다. 기다림, 마음, 친구, 꿈, 세월, 사랑, 여행, 절망 같은 요즘 시대에 걸맞지 않은 제목으로 나열된 노래는 20대 청춘의 방황을 그린 자화상으로 마음속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며 작은 화두를 던진다. 강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그녀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듣노라면 눈을 감고 잠시 쉬고 싶어진다.

수면제처럼 느슨해지는 기분은 들을수록 각성제를 먹은 듯 의식이 또렷해진다. 1집 앨범 프롤로그에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이것만 들어주세요” 라는 말이 암시하듯 그녀의 자작곡들은 듣는 사람에게 말 그대로 잠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졌다. 가사 하나 하나가 누군가의 비밀 일기장을 몰래 훔쳐 읽는 듯한 은밀한 고백들이니 말이다. 어느새 개인적인 경험을 반추하게 되는 가사들은 결국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 어느 때의 상처를 들추어 내거나 혹은 짝사랑했던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

결국 감추었던 마음들이 들통 나 버려 “모두 내 이야기”라는 공감을 얻어 내고야 마는 것. “돌아 온단 약속을 잊고 간 너를 기다린지 벌써 몇 년째 … 대답해 줘 겨울 가고 눈 녹기 전에”의 ‘기다림’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기약 없는 약속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 없이 목마르게 하는 곡이고, ‘실화’에서 “너의 집 앞을 맴돌다 사랑에 만취돼 우는 난 주정뱅이”라고 읊조리는 한 여자를 상상하면 가슴을 칼로 베는 듯 시리기만 하다.

“어차피 영원하진 않을 텐데 내가 널 미워하는 것도” 라고 여운을 남기고 마무리짓는 노래는 실화여서 슬프게 다가온다. “너와 함께 지냈던 그 날 밤 겨울은 찬바람이 옷보다 더 따뜻했었지” 과거 회상조로 노래하는 ‘여행’이란 곡은 “노 저을 수 없는 얼음 배를 타고 너의 마음까지는 언제쯤 도착할지”라는 가사가 시적으로 다가오는데, 소통되지 않는 연인의 마음 속을 여행하려 애쓰는 한 여자의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의 사랑 굶주린 사자처럼 내게 구애해 줘”의 노래 제목이 ‘절망’만 아니었어도 이 동물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가사가 그토록 절망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담담하게 부르는 노래들은 이미 지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과거지향적인 그녀의 노래는 삶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사랑에 상처 입은 영혼에게 유독 인기가 많다. 누구나 상처와 방황으로 얼룩진 청춘이 있기에 이런 감성은 보편적인 공감을 얻어 낸다.

“내 청춘이 심하게 우울했어. 굴곡 있는 20대를 살아서인지…. 내 청춘을 이야기 하려면 밤새 술 마시며 이야기해도 모자란데…”라며 얼버무린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그녀는 대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 둔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 해서 성악을 전공한 것이지 달리 큰 뜻은 없었다고 한다. 피아노, 신디瑛缺? 기타 등 노래를 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조금씩 할 줄 안다는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고 신촌 일대의 통기타 가수들과 어울리며 나그네처럼 살았다. “난 자유로운 영혼이라니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라면 한번씩 다 갔지. 바람처럼 떠돌면서 기타들고 노래하고, 노래를 하기 위해서 악기도 배운거야. 내 인생에서 노래를 빼면 뭐가 남을까….”

이 나그네는 영감이 떠오를 땐 단숨에 가사를 써 내기도 한다. 늘 끼고 다니는 낡은 수첩엔 온갖 상념과 넋두리가 낙서로 남아 있다. 2집 앨범의 ‘오늘’ 이나 ‘이야기’3 같은 곡들이 그렇다. “너에게 화난 소릴 들은 날은 하루를 잃고 너에게 사랑 고백 받은 날은 하루를 얻고”(오늘), “너의 박자에 맞춰 하루 종일 춤을 추다가 너의 모습 보이면 잠시 안심하다가 그러다 너무 열린 것 같으면 그냥 고개를 푹 숙여 버리고”(이야기)는 흥겨움에 따라 부르다 보면 내용이 결코 즐겁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즐겁고 권태로와”(권태)를 부르짖는 곡은 그 자체가 아이러니해서 매력적이다.

끝내 ‘날’에서는 “나는 미친년”이라 외친다. 스스로 “미친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소름끼치도록 날 멀리 높이 안아 올려줘 부탁해 나를 위로해”를 외치다가 “너를 달래려다 사랑에 빠져버려 정처 없이 흘러 공허한 구멍을 드나 들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이 극에 달한 외침은 그녀가 2집 앨범을 ‘에고이스트(Egoist)’라고 지은 이유를 알게 해준다. “내 삶에 대한 변명이고 핑계”라고 말하는 2집은 20대 청춘에 대한 방황의 보고서며 지난 삶을 정리하는 결정체다.

"2집은 내 삶에 대한 변명"
“에고이스트를 발표하고 부산에 다녀 왔어. 지난 사람들도 만날 겸 해서. 근데 여행할 때마다 우연히 만나는 떠돌이 화가를 거기서 또 만난거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언젠가 어디서든 만나게 되어 있더라고. 정처없이 바람 따라 떠도는 영혼들은 그렇게 만나게 되어 있나봐.”

여행은 그녀에게 깨달음을 던져주었다. 지난날의 방황에 대한 답을 알아 냈다는 그녀는 결국 자신이 찾는 것은 “사람”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다. 조금 더 성숙해진 그녀의 방황은 앞으로 자아의 탐색에서 벗어나 타자 안에서 발견하고 타자와 함께 어우려져 성숙해질 것이다.

타고난 끼와 천재적인 음악적 감수성을 두루 갖춘 그녀를 발굴한 것은 1970년대 김민기, 한대수와 더불어 저항 가수로 알려진 “포크계의 돈키호테” 양병집 선생이다. 1집 앨범 제작을 맡은 그는 손지연을 세상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손지연의 노래를 처음 접했을 때 “모차르트를 시기하는 살리에르의 마음에서 점차 포크 선배의 애정으로”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하는데, 로댕이 처음 까미유 끌로델을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 자신에게 왔다고 말한다.

손지연은 자신의 2집 앨범 ‘The Egoist’를 자가 제작했음은 물론 프로듀싱까지 맡았다. 자신이 앨범이 발표되고 난 후, 양병집 선생의 7집 앨범 제작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해 1집 앨범을 제작해 준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수줍게 말한다. 양병집 선생과 듀엣으로 부르는 ‘춤추는 달’은 정감 있는 이웃집 아저씨와 밝고 명랑한 소녀의 재잘거림이 잘 어울려 들으면 사는 게 마냥 즐거워지는 노래다. “너에게 가는 배는 노 저을 필요 없지 / 뭐든 다 끌려가니까” 라는 가사는 같은 길을 가는 인생의 동료로서 이들의 관계를 정리해 주는 듯 하다.

‘빵장수 야곱’을 늘 끼고 다니는 그녀는 야곱처럼 종이 쪽지에 행복의 언어를 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평생 노래하며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 거라는 그녀야말로 영혼이 맑은 사람이다. 투명해서 안이 쉽게 들여다 보이고, 해서 쉽게 상처 입을 사람. 세상이 망해가도 사랑을 할 거냐는 뜬금 없는 질문에 그녀는 숙연해지더니 이렇게 말한다. “그거 알아요? 감정은 눈으로 흐른다는 거.” 그리고 앨범 자켓에 이렇게 적는다.

“늘 사랑에 빠지시길. 온갖 것들에게!” 2005년 방랑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즐겁고 권태로와서 한없이 슬프고 또한 황홀하다. 온갖 것들을 사랑하기엔 내가 너무도 많은 우린 모두 에고이스트다.

**손지연 2집 에고이스트 앨범 기념 콘서트 : 3월 8 ~ 3월 19일, 매주 화 수 금토, 오후 8시 압구정 라이브 클럽 텍사스 문 02-516-5291

유혜성 객원기자


입력시간 : 2005-03-17 14:37


유혜성 객원기자 cometyo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