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찍한 유미리로 돌아온 웃음과 행복의 메신저뮤지컬 서 맑고 순수한스물 둘의 판타지로 관객 사로잡아

[감성 25시] 뮤지컬 배우 최보영
깜찍한 유미리로 돌아온 웃음과 행복의 메신저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서 맑고 순수한
스물 둘의 판타지로 관객 사로잡아


두 손을 모으고 노래할 땐 꼭 동요를 부르는 것만 같던 “소나기”의 소녀 최보영(26)이 초연 10주년 기념 순수 창작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이하 사비타)의 깜찍한 유미리가 되어 돌아왔다.

최보영을 처음 본 건 뮤지컬 ‘소나기’ 에서 였다. 귀밑 2㎝의 단발머리에 크림색 세일러 복을 받쳐 입은 그녀는 예의 분홍색 스웨터를 차려 입지 않아도, 수줍어서 말 못 하는 1970~80년대의 청순한 소녀 같았다. ‘이석준의 뮤지컬 이야기 쇼’에서 그녀를 보지 않았더라면 맑고 깨끗한 소녀 이미지를 간직한 채 이쁘고 얌전한 역할만 하다가 어느 날 쉽게 잊혀질 배우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최보영은 섣불리 판단하기엔 이른 배우였다.

말 없이 다소곳이 앉아 있을 땐 소년 역을 맡은 홍경인이나 최성원 같은 배우들 틈에서, 홍일점이었음에도 그리 튀어보이지 않았다. 소나기를 홍보하는 입장에서 소녀의 청순한 이미지를 유지하는가 싶었다. 뮤지컬 배우라기엔 얌전해보여 도대체 춤, 연기, 노래는 어떻게 할까 쓸데 없는 걱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녀에게 마이크가 돌아가자 그녀는 자신을 섣불리 판단한 사람에게, 보란 듯 돌변했다. 경험담을 누구보다 솔직하게 털어 놓아 수습되지 않을 지경에 이르자 함께 나온 소나기 팀은 당황했다.

최보영이 학창 시절 첫 키스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을 공개한 덕분에 함께 출연한 소나기 팀은 물론이고 진행자 이석준까지 키스에 대한 추억을 공개해야만 했다. 분위기를 한껏 띄운 최보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돌연 소녀의 이미지로 돌아가 맑고 청아한 노래를 선사해 듣는 이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 최보영은 그런 배우였다.

사람들의 오해를 단박에 깨고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에 도전하는 배우. 자신 안의 무수한 잠재력을 스스로 끄집어 내어 주변을 놀라게 하는 배우. 가끔 자신도 알 수 없는 인격이 스스럼없이 노출되어 다소 엽기적이라는 말까지 듣는다지만, 마음 속 무수한 자아를 인정해 자신을 ‘다중이’라고 불러 달라는, 푼수끼 가득한 엉뚱한 배우. 이런 최보영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미스 춘향 출신 배우라는 말이다. “미스 춘향 출신이라서 쉽게 뮤지컬 배우로 입문한 거 아니냐고 오해를 하더라구요. 뮤지컬 배우가 미스 춘향이 된 건데 말이예요.”

그녀는 서울예전 연극과를 졸업하고 동랑 연극 앙상블에서 단원으로 활동하다 오디션을 본 결과 ‘Everyone Says I Love You’(02)라는 뮤지컬로 당당하게 입문했다. 그 후 ‘처용’(02), 청소년 뮤지컬 ‘언제나 마음은 태양’(02), 악극 ‘봄날은 간다’(03) 등을 통해 꾸준히 배우로 활동해 왔다. 그녀의 단아하고 깔끔한 마스크,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고전적인 이미지를 높이 산 선배들이 기분 전환할 겸 한번 나가 보라고 권해서 덜컥 미스 춘향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계기가 된 것인지, 그 후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04)이 계기가 된 것인지 최보영은 독한 배우로 거듭나게 되었다.

롯데 언더 역할이 그녀에게 주어졌지만 노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단 한번도 무대에 서지 못한 채 공연이 끝나고 말았다. 배우에겐 충격적인 일인데도 최보영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연습실에 가장 먼저 와서 전 배역의 대역을 혼자 떠맡다시피 했다. 연습이었지만 그녀가 안 해 본 역할이 없었다. 베르테르부터 하녀역까지 혼자서 대역을 해주며 그녀는 깨달았다. “쉽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무대에 오르는 것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들자 매일 같이 음악 감독 분장실로 찾아가 노래 레슨을 받았어요.”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 그녀는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다. 그 결과 소나기의 오디션에 단독 여주인공 소녀 역을 당당히 따내게 되었다. ‘소나기’의 주연을 맡고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도 한데 이후 그녀는 ‘카르멘’(04)의 대사 한마디 없는 코러스를 하겠다고 고집해 음악 감독과 연출가를 또 한 번 놀라게 만들었다. “앞으로 배우 인생을 살 거면 카르멘 같은 뮤지컬은 성숙한 후에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대신 그녀는 무대 뒤에서 선배들의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춤과 노래를 연습했다. 당시 음악 감독이었던 구소영은 그녀를 회상하기를 “된 배우”라고 말한다. 겸손함이나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을 높이 사게 되어 결국 그녀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TV가 친구였던 무남독녀, 사춘기땐 춤바람
무남독녀 외동딸인 그녀는 일인 다역이라는 역할에 익숙하다. 맞벌이인 부모님 덕에 유일한 친구는 텔레비전이었다. 그 안에서 배우들의 연기와 가수의 노래를 따라 했다. 하도 많은 역할을 연기하느라 시간이 모자란 적도 있다. 텔레비전에서 뮤지컬 배우 남경주 씨를 보고 뮤지컬이 무언지 궁금해서 용돈을 모아 ‘쇼코메디’를 보러 갔다. 코미디극인데도 그녀는 오프닝때 부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뮤지컬이란 이런 것이구나! ’

무대에서 받은 느낌이 너무 강해 벅차서 숨을 쉴 수 조차 없었다고. 진로를 결정한 후 그녀의 이중 생활이 시작된다. 사춘기를 계기로 명랑해진 그녀는 그 때부터 춤바람이 났다. 일주일에 세 번은 나이트에 갔다. 새 가수의 노래와 춤이 나오면 밤새 외워서라도 춤을 선보였다. 놀면서도 연극 실기며 영어, 수학 과외까지 해가면서 학업에도 충실했다. 친구들은 그녀를 독종이라고 불렀다.

“저를 모르는 사람들은 소나기의 소녀 역이 제일 잘 어울린다고 그러는데, 친구들이 내숭떨지 말라고 웃더라구요. 사비타의 유미리를 보더니 연기할 필요 없어서 좋겠다, 그러더라구요.” 사비타의 유미리는 최보영과 닮았다. 말끔하게 잘 닦여진 유리창 같은 그녀는 맑고 순수하고 귀여운 최보영표 유미리를 새로 만들었다. 유미리는 7년 동안 소원했던 형제에게 잘못 보내진 핵폭탄 같은 존재다. 그녀 덕분에 객석은 웃음 바다가 된다. 엽기, 발랄, 푼수라는 복장을 입고 정신 산만, 대책 없이 사고나 치는 실수 투성이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순수하고 귀여운 여자다.

“유미리는 그냥 저라고 생각하고 연기했는데, 어느 날 제가 너무 이쁜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감정이입이 쉽게 되는 역할들은 그런 함정을 가지고 있어요.” 유미리가 없는 사비타는 상상하기 조차 싫을 정도다. 유미리는 재밌다. 무미건조한 형제의 갈등과 화해 속에 유미리라는 톡 쏘는 소스가 뮤지컬의 맛을 새콤 달콤하게 만든다. 소극장은 스물 두살 여자의 깜찍함에 홀딱 반하고 만다.

“스물 두 살이어서 그래요. 제가 스물 두 살 실업자였거든요. 배우를 해야 할지 공부를 해야 할지 아니면 취업을 해야 할지 막막했거든요. 어리지만 또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유미리란 역이 더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어요.” 스물 두 살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된 유미리는 직장을 잃었음에도 결코 우울해 하지 않는다. 내일의 태양이 뜰 거라는 순진한 믿음으로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금세 까먹고 마는 그녀는 펑, 하고 나타나서 웃음과 행복을 가득 안겨준 뒤 펑, 하고 사라지는 환타지같은 존재다.

무한한 잠재력, 정형화 거부
비를 좋아하는 최보영은 공연 내내 무대에 내리는 비가 맘에 든다. 비 냄새를 상상하며 부활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멋들어지게 부르는가 하면 텅 빈 무대에서 혼자 춤을 추며 기분 전환도 한다. “사비타가 끝나면 당분간 무대에 오르지 않고 노래 연습만 죽도록 할 거예요. 저에게 부족한 것을 하나씩 채워 가는 보영이가 되려구요.”

유미리로 거듭난 최보영은 안주할 줄 모르는 배우다.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는 그녀의 다음 변신이 궁금해진다. 이유없이 활짝 웃는데, 이 보다 더 귀여운 여자가 또 있을까 싶다. 얄밉게도 겸손하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평일 7시 30분, 토 4시ㆍ7시 30분, 일ㆍ공휴 3시ㆍ6시. 02-764-7858

유혜성 객원 기자


입력시간 : 2005-03-22 18:58


유혜성 객원 기자 comety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