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선택, 일에 올인한다"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서 탈피

여성들의 반란 콘트라 섹슈얼
"결혼은 선택, 일에 올인한다"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서 탈피


한국인 팝 아티스트 낸시 랭.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예술가다.

‘꿈을 현실로 불러들이는 잔다르크’. 4월 8일부터 서울 청담동 갤러리 ‘드맹’에서 개인전을 갖는 스물 일곱 살의 한국인 팝 아티스트 낸시 랭의 별칭이다.

낸시 랭은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 터부 요기니 시리즈’를 선보여 화제가 됐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가부키 변장에 란제리 차림으로 하이힐을 신고 바이올린을 켜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것. 그녀는 초대 받지도 못했으나, 초대 받은 작가들보다 더 많은 갈채를 받았다.

젊은 사람들이 따라 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하는 ‘워너비(wannabe)’의 대상인 낸시 랭. 그녀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저명한 인물이 되는 게 궁극적인 인생의 지향점”이라고 말한다. “가장 젊고 예쁠 때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 게 인생 최고의 선택일 수는 없다”는 것. 한 마디로 “결혼은 선택 사항이지만, 일은 필수”라는 게 그녀의 소신이다.

“돈을 많이 벌어, 투자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도 각별하다. “물감 하나, 옷감 하나 구입하려 해도 돈이 필요한 게 자본주의 사회”라는 현실 인식이다.

이런 그녀에겐 요즘 새로운 신조어가 따라붙는다. 콘트라 섹슈얼(Contra Sexual).

성공에 대한 강한 의지, 성의 한계를 넘다
‘반대’의 뜻을 가진 라틴어 ‘콘트라’와 ‘성’을 의미하는 ‘섹슈얼’을 조합하여 영국의 미래학연구소가 최근 고안해낸 이 말은, 한 마디로 전통적 여성상과는 다른 부류를 일컫는다. 낸시 랭은 여성채널 ‘온스타일’이 변화하는 여성상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한 ‘싱글즈 인 서울’의 시즌3 ‘콘트라 섹슈얼’ 프로그램(4월 22일 첫 방영)에 주요 출연자로 나와, 현대 여성의 새로운 삶과 가치에 관한 화두를 던진다. 이 프로그램의 최현주 PD는 “일에 올인하여 성공을 쟁취하려는 의지가 무척 강한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성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신드롬이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소위 ‘여성들의 반란’이다. 성 역할의 고정관념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오늘의 한국 젊은 여성들도 참고 인내하는 ‘현모양처’보다 낸시 랭같이 도발적인 여전사가 되기를 소망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최근 피부미용 네트워크인 ‘고운세상’이 조사한 결과, 20~30대 여성 2명 중 1명은 콘트라 섹슈얼을 지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콘트라 섹슈얼의 특징은 ▲ 사회에서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벌길 바라고 나머지 것들은 뒤에 놓고 있으며 ▲ 적어도 30대 중반까지는 결혼이나 아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 아무 조건 없는 섹스는 즐기지만, 섹스나 데이트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일상탈출을 통해 여성의 자유와 자아발견의 과정을 보여준 영화 <델마와 루이스>. 콘트라 섹슈얼과 함께 기억되는 영화다.

이런 인식의 변화 탓인지 결혼 적령기에 웨딩마치를 울려야 한다는 여성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미혼남녀 1,38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미혼녀의 경우 전체 응답자의 29.6%가 “결혼 계획이 없다”고 답했고, “잘 모르겠다”는 답도 21.4%나 됐다. 결혼 계획이 없는 주요한 이유는 ‘일’ 때문. 미혼 여성의 26.2%가 “일에 더 열중하기 위해서”라고 꼽은 것. 결혼으로 가정에 안주하기보다 열심히 일해 돈도 벌고 사회적 지위를 누릴 것을 원한다.

또한 성 역할의 변화는 여성들의 외모와 패션에 이르기까지 남녀 영역의 구분을 뒤흔든다. 제일기획은 지난해 ‘우리시대 남녀의 조용한 혁명’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여성스러우면서도 강인함이 느껴지는 외모를 가꾸기 위해 철저한 자기관리를 하는 여성상에 주목했다. 이른바 ‘Ms.strong.’

요즘 여성들은 마르고 탄력 있으면서, 적당한 근육질의 몸매를 한 섹시하고 강인한 외모를 추구한다. 여성 2명 중 1명은 “여자도 가급적 힘이 센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여성이 SUV와 같이 큰 차량을 운전하는 것이 멋져보인다”(63.3%), “나는 첨단 제품을 잘 활용할 수 있다”(49.3%) 등 여성들의 자기 이미지 추구에 상당한 변화가 생긴 것으로 조사됐다.

"성 역할 변화 지속할 것"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성 역할의 변화에 대한 만족감이다. 여성들에게 “당신은 남성성을 갖고 있는 여성이다”고 말했을 때의 주된 반응은 “자신도 모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사회적으로 요구되고 본인이 추구하는 모습의 완성에 대한 즐거움” 등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 보고서를 낸 제일기획의 AP1팀 박재항 팀장은 “남녀의 성 역할 변화는 잠깐 유행하는 트렌드가 아니고 앞으로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분석했다.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은 일인 다역의 디지털 사회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데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것. 따라서 강한 여성은 “디지털 시대에 잘 적응하기 위한 사회적 진화”라는 것.

그러나 사회적 성공으로 우뚝 서고자 하는 여성들의 이 같은 역성화는,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단지 희망에 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본연의 성을 거부한다”는 의미의 콘트라 섹슈얼이란 어휘 자체에, 이미 여성 본연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담겨 있다는 것.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교묘한 억압이 여전하다는 이야기다. 8년차 직장인 이모(32)씨는 “직장 초년생일 때는 콘트라 섹슈얼이 되고 싶어했지만, 막상 남성 중심 조직 사회에서 부딪히다 보니 점차 전업 주부인 친구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며 “편견일지라도 여자가 집안일에 소홀하다는 낙인이 찍히고, ‘드센’ 여성이라 손가락질 받을 때는 곤혹스럽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한국여성개발원 이수연 부장은 우선 “일하는 여성에 대해 사회적 동반자로서 남성들의 파트너십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여성의 직장 생활을 위한 보육 등 사회적 여건이 미비한 탓에 여성들의 출산 기피 현상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여성들이 일과 가정 사이에서 조화를 찾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고 평가한다. 그는 “아쉽지만 남성들이 더 변해야 ‘여성들의 반란’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한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5-04-07 16:29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