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날개를 편 도시의 자유인물음표와 호기심을 남기는 그림작업, 유년의 시절로 되돌리는 마력

[감성 25시] 우유각 소녀 홍학순
상상의 날개를 편 도시의 자유인
물음표와 호기심을 남기는 그림작업, 유년의 시절로 되돌리는 마력


‘우유각 소녀’는 호기심이 많다. 부끄러운 것이 많은지 얼굴도 금세 빨개졌다. 나무 뿌리 그리기를 좋아해 어느 날 하얀 캔버스 위에 전봇대를 그리고 뿌리를 달아주었더니 뿌리 속에서 토끼, 닭, 개, 말, 떠기(상상 속의 캐릭터), 즐거운 여자가 태어났다고 캐릭터 탄생 이야기를 즐겁게 이야기 해준다.

우유각 소녀가 좋아하는 색은 순진무구한 우유빛이다. 해서, 집안의 장롱이며 냉장고, 밥통, 책상이나 컴퓨터는 온통 덧칠한 흰색이다. 우유각 소녀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은 흰색 위에 연필이나 크레파스로 토끼, 닭, 개, 말, 떠기, 즐거운 여자가 저희들만의 세상을 창조하기도 했다.

언뜻 보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그려대는 낙서 수준의 그림이다. 우유를 마실 때는 꼭 빨대로 마셔야 하며 요구르트 아줌마가 파는 요구르트가 진정한 요구르트 맛을 낸다고 생각하는 우유각 소녀는 가끔 엉뚱해질 때가 있다. 노란색 병아리 그림 옆에 ‘봄 토끼’라고 적어놓고 병아리를 혼자서 봄 토끼라 우기니 말이다.(서울시립미술관의 ‘미술관 봄 나들이 전’, 야외 설치 미술전의 우유각 소녀의 집에 가보면 병아리처럼 생긴 봄 토끼가 나들이를 간다.)

우유각 소녀의 세계에선 모두가 소녀
소녀라고 해서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했다면 낭패다. 얼굴이 사각형이라 친구가 붙여준 별명 ‘우유각’에 예쁜 여자만 보면 얼굴이 소녀처럼 붉어져, 드로잉 아티스트 홍학순은 그때부터 ‘우유각 소녀’가 되었다. 그는, 남자다.

우유각 소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홍학순을 보면 ‘소녀’란 개념을 다시 정의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유각 소녀의 세계에선 소녀란 남자, 여자, 어른, 아이의 구분이 없다. ‘여섯 소녀의 친구들’이라는 그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여섯 소녀는 실제로 다섯명의 여자 소녀와 한명의 남자소녀로 구성되어 있다.

우유각 소녀의 온라인 홈페이지인 학페이지(http://www.hakpage.net) 에 접속하면 ‘심심해’란 그의 다이어리에 등산하고 내려오는 얼굴이 발그레해진 할아버지에게 ‘안녕? 소녀!’ 하며 인사하는 캐릭터가 분명 존재한다. 젊고 싱그러운 감성을 소유했다면 우유각 소녀의 세계에서는 모두 소녀가 될 자격이 주어진다.

“대체로 호기심 많고 설레는 게 있고, 우유각 소녀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소녀랍니다.” 그는 2001년 골방에서 작업하던 6개의 캐릭터에게 처음으로 햇볕을 쪼여주기로 결심했다. “캐릭터들이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했죠. 혼자만 있다 보니까 너무 답답해서 세상과 접속하기로 결심한 거죠.” 98년부터 시작되어 2001년에 완성된 우유각 소녀의 드로잉 책 학페이지 중 가장 예쁘고 귀여운 것들만 골라 신촌 일대의 전봇대나 나무벤치에 붙이고 “마음에 들면 가져가세요.” 라고 나지막하게 읊조리듯 써 내려간 엽서. 자신의 그림을 누가 가져갈까 두근두근 떨던 그는 숨어서 그림을 가져가는 사람이 나타날 때 까지 마냥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눈이 나쁘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용케 찾아서 동전을 줍는 기분처럼 좋아라 하며 가져가는데 그때 가슴이 막 떨리더라구요.” 그의 ‘몰래 그림 갖다 붙이기 작업’은 그 후로도 계속 되었다. 그 일로 세상과의 연대감이 생긴 그는 자신을 갖고 인사동에 앉아 처음으로 그림에 가격을 달아 팔기도 했다. 단돈 10원에 말이다.

“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자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남자들도 제 그림을 몰래 몰래 가져가거나, 10원을 주고 사갔지요.” 그는 일주일에 한명을 대상으로 그림 선물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는 그림선물 이벤트는 네티즌을 위한 감사의 선물인데, 그의 홈페이지에 자주 오는 사람들은 모두 소녀처럼 선물 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제도권 교육서 벗어난 소년 아티스트
홍학순은 중학교 의무 교육까지만 받고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았다. 교도소 같은 학교가 싫어서도,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서도, 공부가 하기 싫어서도 아니다. 학교를 가지 않아도 숨쉬고 살아진다고 생각한 그는 학교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열 일곱부터 스물 두 살까지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다. 노인처럼 공원에 나가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쪼이는가 하면 방바닥에 누워 숨을 쉬면서 식물처럼 살아갔다.

그 시간 그림을 그린 것도, 일탈을 꿈꾼 것도 아니다. 이따금 밤하늘의 별을 세면서 무위도식하며 살던 그는 어느덧 스물 세살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날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별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트를 해야겠다.” 다섯 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려 화가란 별명을 달고 살았던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고학년의 수채화를 가리키며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것이다”란 담임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이제 더 이상 창작을 하지 말아야지” 하며 그림에 대한 흥미를 잃은 이후로, 아니 그보다 글 쓰는 작가가 되려면 남의 생각으로 자신의 생각이 오염되면 안 될 것 같아 책을 읽지 말자고 다짐한 이후로,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세계 속에서 사람이란, 생각하는 사람, 정신이 멈춘 사람, 일이나 사랑을 하는 사람 등 세 가지 종류였는데, 그는 두 번째에 속했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을 펼쳤지요. 아트란 개념을 찾았어요. 아, 나도 아트를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생각을 전달하는 일을 하자. 그 후 입시 미술 학원에 들어갔지요.”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계원예술대학 매체미술을 전공한 그는 다시 학교라는 제도 속에 편입해 창작활동을 하게 된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던 5년 동안 사실 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었어요. 지금 이 순간 그림을 그리며 살기 위해 주어졌던 시간인 거죠.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똑같이 생활하고 있는걸요.”

각자의 자화상 반추해주는 그림
우유각 소녀의 그림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 “풋…”하며 웃음을 참지 못한다. 머릿속엔 온통 물음표가 떠오른다. 누가 이런 그림을 그림이라고 그려 전시를 했을까. 우유각 소녀의 정체를 궁금해 할 것이다. 왼손잡이가 아닐까 의심되는 삐뚤빼뚤한 글씨체에 다섯 살짜리 아이가 그렸을 법한 이미지의 낙서들이다.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토끼, 닭, 개, 말, 떠기, 즐거운 여자가 동그라미, 세모, 네모, 선으로 연결되어 나름의 독특한 캐릭터가 되고, 뚜렷한 스토리 라인이 없는 이야기들로 저희끼리 대화하는 캐릭터는 마치 외계인의 암호 같기도 하다. 하지만 편견 없이 우유각 소녀의 드로잉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작고 소소한 일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사소한 일로 고민하고 거기에 맞장구치는 소심한 캐릭터는 절로 사랑스럽다.

그것은 어느새 왜 사는지 고민 하는 친구가 되고 예쁜 여자를 보고 가슴 떨려 하는 그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해와 달, 별, 꽃, 개미와 같은 신비한 자연의 세계이기도 하며, 개미와 토끼가 서로 시합도 하는 동화 같기도 하고, 봄 소풍을 가는 병아리를 닮은 봄 토끼의 평화로운 풍경이 되기도 한다. 연쇄적으로 자라나 그 안에서 성장하는 드로잉을 보면 어눌하지만 세상과 소통하기를 원하는 말더듬이의 부끄러운 악수 청하기 같다. 엄마 치맛자락을 꼭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애정결핍의 한 아이가 생각나기도 한다.

“일부러 못 그리고 싶을 때 있잖아요. 일부러 글씨 엉망으로 쓰고 싶을 때 있잖아요. 제 그림을 보는 대중의 나이는 아직 두 살이예요. 두 살짜리에게 터무니없이 높은 수준의 그림은 맞지 않잖아요. 저는 두 살부터 서서히 성장해 나갈거구요.”

우유각 소녀의 드로잉이 사랑스러운 것은 너무 못 그려 절로 우월감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처럼 천진난만 했던 각자의 자화상을 반추하기 때문이다.

두 살짜리 대중에게 선사하는 우유각 소녀의 드로잉 선물은 서울 시립미술관 봄나들이전과(5/22까지), 갤러리 루프의 ‘NaNo in young artist’의 우유각 소녀 “family tree"전(5/16)에서 진행된다. 인사동 쌈지길 지하1층에선 루프에서 진행중인 작품 판매전이 동시에 열린다.

봄나들이 겸 핑크색 안테나가 달린 ‘우유각 소녀의 집’ 에 마실 간다면 아마도 새로 페인팅된 하얀 벽이나 새로 깐 장판에 몰래 낙서하다가 들킨 어릴적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날 것이다. “벽에 낙서해도 되는 공간을 따로 만들어주세요. 그건 창작의 시작이거든요.” 얼굴을 붉히며 진짜 소녀처럼 웃는 우유각 소녀의 그림을 보면 처음 크레파스를 손에 쥐고 그림을 그렸던 가장 순수했던 시절, 유년의 동화가 떠오른다.


유혜성 객원기자


입력시간 : 2005-05-19 14:03


유혜성 객원기자 cometyo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