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점대 고득점자도 '영어 못하는' 사람 수두룩, '영어시험의 지존' 퇴색

[토익무용론…왜?] '토익성적=영어능력' 계량화서 탈피
900점대 고득점자도 '영어 못하는' 사람 수두룩, '영어시험의 지존' 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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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만 4,485명. 작년 한해 대표적인 영어 능력 시험인 토익(TOEIC)을 직접 치른 국내 응시자들의 숫자다. 토익은 취업 등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건이 된 지 오래다. 세계적으로는 60개국에서 연간 300여만 명이 응시한다. 접수만 하고 응시는 하지 않는 결시율이 통상 20%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선 한해 200만 명 이상이 토익 시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셈이다. 전세계 토익 인구의 절반 이상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만큼 국내의 토익 열기가 뜨겁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토익 점수가 실제 영어 능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토익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특히 기업 관계자들 사이에 ‘토익 점수 높다고 영어 잘하는 거 아니고, 일 잘하는 거 아니더라’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토익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커가는 상황이다.

응시자 감소 추세로 반전
“토익 900점대(990점 만점)의 고득점자들이 수두룩한데, 국제전화 한 통 제대로 받아내는 (신입)사원이 없어요. 900점 정도면 기본적인 영어는 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 건설회사 해외 영업팀장의 한숨 섞인 말이다. 토익 위원회가 제시하고 있는 ‘토익 레벨별 회화능력(표 참고)’을 보면 그 한숨은 한탄에 가깝다. 영어능력의 척도로, 영어 시험의 지존으로 통하던 토익의 명성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이에 따라 입사전형 방식에도 점차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중소 기업들이 일치감치 계량화된 영어 점수 의존에서 탈피했고, 최근에는 대기업들의 신입사원 채용에서도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토익 무용론’까지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높은 토익 성적이 업무현장에서 실질적인 영어실력으로 연결되지 않음으로써 그 실효성에 의문을 품는 인사 담당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응시자들도 이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일까. 국내에서는 1982년 시작된 토익 시험 응시자 수가 최근까지 꾸준히 증가하다가 2004년 들어 주춤했다. 1999년 36만 명이었던 응시자 수는 2001년 98만 명, 2002년 113만 명, 2003년 168만7,512명으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다 2004년 들어 168만 4,485명으로 소폭 감소했다.

자체 영어 시험 보기도
토익의 신뢰성이 낮아지면서 전형 단계에서 이의 비중을 줄이고 있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이 가운데 금융권의 변화가 가장 눈에 띈다. 금융계는 그 동안 일반 기업(작년 국내 40대 대기업 신입사원 평균 778점)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평균 850점)의 토익 점수를 요구해 왔었다.

변화의 선두는 기업은행. 기업은행은 올 신입사원 채용에서 일정 嶽?점수 이상으로 입사지원 자격을 제한하던 것을 다양한 능력을 보유한 인재들에게 폭넓은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외국어 점수는 따지지 않는 개방형 채용 방식을 택했다. 국민은행은 일괄적으로 800점 이상으로 제한하던 토익 하한선을 700점(영업직)으로 하향 조정했다. 세부직종과 상관 없이 일률적으로 들이대던 토익 점수 잣대를 각각의 업무특성에 맞춰 잡은 것이다.

삼성, LG, 대우조선해양, 팬택계열 등 주요 기업들의 신입사원 전형에서도 토익 점수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찾아 볼 수 있다. 삼성은 지원자의 영어 실력을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토익 시험의 결점을 보충하기 위해 자체 시험(SST:Samsung Speaking Test)을 만들어 입사 지원자들을 상대로 시험을 치르고 있다.

LG도 그룹 차원에서 자체적인 영어 시험을 따로 실시하고 있다. 삼성의 홍경선 과장은 “해외영업, 해외구매 일을 하는 직종에 한해서 영어와 제 2외국어 능력을 집중적으로 살펴본다”고 말하고 “토익 점수를 바탕으로 지원자의 영어 능력을 가늠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홍 과장은 이어 “토익 성적은 그 사람의 성실성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활용 한다”고 밝혔다.

그룹차원에서 인턴사원을 채용할 때 삼성이 제시하고 있는 토익 점수는 730이다. LG의 조청현 대리도 “분야를 막론하고 글로벌 시대에 기본적인 (영어)능력은 갖춰야 하는 게 사실이지만, (영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퍼포먼스로 현실화하는 몇몇 직군을 제외하고는 영어 실력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이들 기업은 토익 점수를 서류 전형단계에서 하나의 가이드 라인으로 삼을 뿐 실제적인 영어능력의 잣대로는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 영어 면접을 따로 치르고 영어 프리젠테이션 면접을 추가로 실시하는 현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종합취업정보 회사 스카우트의 신길자 팀장은 “900점 이상의 고득점자가 많아지는 등 토익 점수에 의한 지원자 변별력이 상실됨에 따라 영어 회화나, 영어 프리젠테이션 등 실제 어학 능력을 검증하는 면접이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토익 반영 점수 하향화 추세
‘950이하는 명함도 못 내미는 곳’으로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 알려진 공기업의 전형 관행도 바뀌고 있다. 대전도시철도공사가 영어실력을 요구하지 않는 채용 방식을 택한 것이다. 토익 점수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필기시험 자격을 부여한 후 능력과 열정, 직무의 적합성을 기준으로 평가하기 위함이라는 게 공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토익 점수가 영어 능력을 적확하게 담아낼지도 의문이지만, 모든 직종의 입사 전형에서 관행처럼 주요 변수로 따라다니던 토익 점수가 공사의 직무적합성을 결정짓는 요인은 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공무원과 대기업, 이 둘의 장점만을 모아놓은 공사의 경우 그 동안 토익 점수가 입사전형의 주요 지표가 돼왔었다.

통상 750점을 지원기준으로 하고 있는 공사라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최종 합격자들의 평균점수가 900점을 웃돌고 있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공사의 조치는 혁신에 가깝다. 한국토지공사의 경우도 지난 3월에 시행된 공채에서 토익 점수를 700점 이상으로 잡았고, KT도 현행 750점인 하한선을 700점으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취업전문 사이트 코리아잡의 정유민 이사는 “토익 점수는 지원자 모두를 면접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수의 지원자를 걸러내는 서류전형의 실제적인 가이드 라인으로 쓰였다”면서 “그러다 보니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토익 점수 때문에 면접장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하는 지원자들이 속출하는 등의 문제점들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서류 전형에서의 토익 성적 반영 비율을 낮추고, 직무별로 토익 점수의 비중을 차별화하는 움직임이 최근 관찰되고 있다”며 토익 성적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들의 전형 가이드 라인이 변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기업체에서 실제적으로 필요로 하는 영어 능력은 쓰기, 듣기와 말하기 인데 반해 토익은 이 중에서 듣기 능력밖에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 이사의 부연이다. 그는 또 이공계의 경우 전공 지식이 개인 업무능력의 지표가 돼야 하지만, 영어 사용 빈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이공계에까지 획일적인 토익의 잣대를 적용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는 전형방법이라고 말했다.

요령만 익히면 고득점도 가능
인재의 리트머스 시험지로까지 통용되던 토익이 이젠 그 효용성을 잃어가고 있음은 서울 종로 학원가의 외국어학원 커리큘럼을 보면 확연해진다. 토익 중심 강좌들 사이사이에 회화 강좌 몇몇이 강의 시간표를 채우던 어학원들이 기업의 영어면접, 영어 프리젠테이션에 대비한 강좌를 개설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종로 2가의 외대어학원에 개설된 IEC(Interactive English Conversation : 집중영어회화)반이 이 같은 경우로, 시간당 5만원에 이르는 수강료임에도 불구하고 취업시즌이나, 방학 때면 접수하기 위해 줄을 서야 할 정도다. 수강생이 지원하고자 하는 기업을 미리 얘기하면 그 기업전형 방법에 맞춰 1대1로 집중적인 수업이 진행되는 방식이다.

어떤 시험이든 응시자의 영어실력을 전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토익도 예외가 아니어서 높은 토익 점수가 뛰어난 영어 실력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누구라도 두어달 문제 푸는 훈련을 해서 요령만 익히면 보통은 200점, 많은 경우는 300~400점의 점수를 끌어 올릴 수 있는 게 토익 시험입니다. 380에서 두어달 만에 870으로 오른 경우도 있습니다.” 12년째 토익 강의를 해온 종로 시사영어학원 김형용 선생의 말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토익은 수많은 사람들의 영어능력을 계량화해야 하는 현실에서 최소한의 평가 방법으로 활용해야지 이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 700점으로 취업한 박정민 씨
"140여명의 전체 직원 가운데
외국 바이어들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열손에 꼽힐 거에요."

네크워크 관련 장비 국내총판 중견 회사인 ㈜인성정보에서 세일즈 업무를 맡고 있는 입사 2년차의 박정민(29) 씨. 결과적으로 10여명만 일정 수준이상 잘 하면 될 영어공부를 전부에게 강요하는 사회와 조직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하는 얘기다.

"영어 성적으로 채용했다면 제 점수로는 어림도 없죠. 하지만 우리 회사는 전공 지식과 성격, 성품에 더 비중을 두고 뽑은 것으로 판단돼요." 염두에 둔 진로가 영어를 필요로 하는 분야였다면 진작 영어 공부에 매달렸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대신 다른 책을 읽어 풍부한 상식과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다고 했다.

"사람들을 만나서 세일즈를 해야하는 입장이라면 이런 공부가 더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회사 업무와 상관 없이 언제 어디서 부딪힐지 모르는 외국인에게 길안내 정도나 하기 위해 하루 2~3시간씩 영어 공부에 매달리는 건 넌센스죠." 영어 공부는 하더라도 지금은 지식 습득 통로의 다양화 차원에서 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구체화, 서열화 된 점수로 사원을 선발하면 그 과정에서 시간적 경제적 효율성은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격체로서의 한 인간을 가늠해 적합한 인재를 채용하고자 한다면, 우리 회사의 채용 방식이 맞을 겁니다."

그는 다루는 제품의 매뉴얼이 영어로 돼 있지만, 지금의 전공 지식과 영어 실력으로도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정민승 기자


입력시간 : 2005-05-26 15:28


정민승 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