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작 유족에 전달 안되고 경상도 전전" 주장미술사 다시 쓰는 자세로 접근해야

위작논란 이중섭 작품, 출처·유통과정 먼저 밝혀져야
"유작 유족에 전달 안되고 경상도 전전" 주장
미술사 다시 쓰는 자세로 접근해야


1953년 여름 대구에서. 이중섭(맨 오른쪽)과 소설과 최태응(맨 왼쪽), 포대령 이기련(가운데).

최근 몇 달째 계속되온 이중섭ㆍ박수근 화백 작품의 진위논란이 막바지 고비를 맞고 있다. 일부 세력이 검찰의 최종 수사 발표에 앞서 ‘위작’결론을 기정사실화해 아직 감정 과정에 있는 국가 기관을 압박하는가 하면 진위 판정에 주요 역할을 할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

검찰은 최근 일부 언론이 위작 시비에 오른 이 화백 작품을 안목 감정위원들이 ‘위작’이라고 결론지었다고 보도한 것은 검찰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밝혔다. 서울중앙지검 형사 7부의 김철 검사는 “아직 수사(조사)가 진행중이며 언론 보도는 검찰 입장과 무관하다”고 말해 그 같은 사실을 뒷받침했다.

이 화백 작품의 ‘출처’와 관련, 주요 증언자인 한 인사는 최근 신변 위협과 함께 특정 방송사 기자를 사칭한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취재를 당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 화백 작품 위작 여부에 대한 검찰 조사는 지난 4월 이 화백 차남 태성(56) 씨가 한국미술품감정협회(이하 감정협회)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감정협회는 지난 3월 이 씨가 서울 옥션 경매에 내놓은 이 화백 작품과 이중섭 50주기 기념 미발표작 전시준비위원회 (위원장 김용수, 한국고서연구회 명예회장)가 소장한 작품들이 위작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검찰은 그동안 김 씨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에 대해 위작 및 이태성 씨와의 연계 여부에 초점을 맞춰 수사를 벌였으나 이 부분 모두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검찰은 감정보다 실체적 진실규명(위작, 진품 출처)이 중요하다고 판단, 3개월여의 수사에서 위작범 연계 징후를 포착하지 못한 점을 고려, 진품이라는 추정속에 역사적 고증을 한다는 차원에서 수사를 전개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진위논란이 되고 있는 이 화백 작품은 유족이 50년 간 소장해 왔다는 것과 김용수 씨가 70년대 초 서울 인사동에서 구입한 600여 점 두가지다.

전자는 검찰 수사에서 ?렝?작품과 김 씨의 작품이 연계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고, 이 화백의 장남 태현 씨가 갖고 있던 작품(이중섭의 조카 이영진 씨가 1979년 서울ㆍ대구ㆍ부산 전시회를 거친 뒤 판매, 현재 삼성 리움박물관에 소장)이 진품으로 판명난 것에 비춰 진품쪽에 무게가 주어지는 상황이다.

추연근 화백(왼쪽), 이해균 씨.

반면 김용수 씨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진품’의 정황이 상당함에도 ‘출처’가 불분명하고 수백점의 작품이 갑자기 출현했다는 이유 등으로 감정협회를 중심으로 위작시비가 제기돼왔다. 그러나 4개월여의 취재 결과 김씨의 작품 출처가 확인되고 이중섭 작품이 수백점에 이르는 것이 밝혀져 진위 논란이 머지않아 매듭지어질 전망이다.

경상도에 사는 전쟁미망인이 소장
김 씨는 70년대 초 작품을 구입할 당시 중개상에게서 “경상도에 사는 전쟁 미망인한테서 나온 것”이라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이중섭의 국내 미술적 자취는 6ㆍ25 발발 후인 1950년 12월 함남 원산에서 월남하면서 기록된다. 이중섭은 1950년 12월~56년 9월까지 부산, 제주, 대구, 통영, 거제, 진주, 서울을 몇 차례 전전하면서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특히 1953년 10월~54년 3월 통영, 1954년 7월~55년 1월 서울 누상동과 신촌, 1955년 2월~55년 7월 대구와 칠곡 등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중섭은 돈을 만들어 일본의 가족에게 돌아갈 생각으로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화랑 전시회를 앞두고 원산 선배 정치열의 집에서 하루 3~4시간 동안만 잠을 자며 맹렬하게 그림을 그렸다. 담배 은박지나 도화지에 에스키스나 드로잉, 미장 에너멜, 저질의 도료 페인트로 그리거나 유리골필 등으로 급속하게 제작, 넓은 방바닥에 몇 겹의 이불을 덮은 것처럼 많은 양이었다는 게 지인들의 증언이다.

경북도청 공보실에 근무하던 김찬호(희곡작가, 왼쪽 첫번째) 출판기념회. 서정희 시인(앞줄 왼쪽 첫번째)과 동료직원들.

서울 전시회 실패 후 고(故) 구상 시인의 권유에 따라 대구 전시회를 위해 내려간 이중섭은 소설가 최태응의 배려로 대구역 부근 경복여관에서 상당량의 그림을 그렸고, 술꾼인 포대령 이기련을 피해 칠곡의 최태응 과수원 등지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 해 5월 대구 미 문화원에서 열린 전시회가 기대에 못 미치면서 이중섭은 일본의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자학증세를 보이기 시작, 동료인 소설가 최태응이 성가병원에 입원시키는 상황에 이른다.

이 즈음 이중섭은 소품 한뭉치 두루마리를 원산 후배인 시인 김광림에게 태워달라고 건네주나 최태응이 그런 사실을 알고 반납받아 보관했다. 또 55년 8월 말 사촌형인 이광석과 김이석이 내려와 입원해 있는 이중섭을 서울로 데려갈 때 이중섭은 서울행 기차를 타기 직전 최태응에게 “왜관쯤 가서 다시 돌아 올 것”이라며 큰 그림봉투 2개 분량을 맡기고 기차를 탔으나 그만 돌아오지 못한다. 결국 최태응은 김광림 시인에게서 받은 것과 이중섭이 건넨 그림을 모두 보관하게 됐다.

최태응은 가난한 소설가로 칠곡 매천 초등학교 교사인 부인의 수입에 의존해 생활하던 중 부인이 병으로 죽자 당시 대구 소년원의 교도사로 있던 서정희 시인의 도움으로 소년원 뒤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두 문인을 잘 알고 있는 윤장근(74ㆍ대구) 죽순문학회 회장은 “당시 서정희 시인이 소년원 뒷편에 단칸방을 마련해 줘 최태응 씨는 2개월 가량 생활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윤 회장은 “서 시인은 대구로 피난을 와 육군병원 간호사, 소년원 교도사를 거치면서 문인들과 가깝게 지냈고 황해도 출신 피난민인 최태응과 동병상련 입장에서 가깝게 지냈다”고 덧붙였다.

최태응이 서울로 떠나면서 그가 보관하던 이중섭 그림은 자연스럽게 서정희 시인이 맡게 됐다. 서 시인은 소년원 교도사로 있다 경북도청으로 옮겨 당시 문단에 유일한 발표 지면을 제공했던 ‘도정월보’의 편집을 맡아 가난한 문인들을 도와줬다. 그러나 지병인 폐병이 악화돼 67년 마산 결핵요양소에 입원한 뒤 이듬해 여수 요양원에서 운명했다.

1950년대 초, 이중섭 화백이 머물렀던 대구역 앞 수복여관.

서 시인이 68년 작고하면서 그녀의 집에 남겨진 이중섭 그림은 어떻게 된 것일까. 최태응ㆍ서정희를 알고 있는 허만하 시인은 “서정희의 담요속에 보관돼 있던 그 많은 이중섭 그림은 어디에 갔나”하고 애석해했다. 허 시인은 5일 통화에서 “최태응 작가를 쫓아다니며 소설을 배우던 이규헌이 서정희 집에서 보고 얘기한 것을 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정희 시인 집에 있던 이중섭 그림은 서 시인이 작고한 직후 68~69년 사이 추연근(82) 전 경성대 예술대학장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추 화백은 부산 서양화단의 개척자이자 20여 년간 흑태양 시리즈를 그려온 인물로 대구 미술의 뿌리인 서동진ㆍ서진달 화백의 제자이기도 하다.

지난 4일 부산 해운대 화실에서 만난 추 화백은 “68~69년 무렵 부산일보 편집국장일 때 대구 계성중고 1년 후배인 이해균(82년 작고) 씨가 찾아와 이중섭 그림을 알려왔다”고 말했다. 추 화백은 평소에도 이해균 씨?가깝게 지냈는데 이 씨가 부산까지 방문해 “대구의 잘 아는 사람이 이중섭 유품(그림)을 보관하고 있다며 일본의 가족에게 전해 주려고 하기에 찾아왔다”고 말했다는 것.

추 화백은 당시 부산 일본 총영사로 있던 마찌다 씨에게 연락, 추 화백, 이해균 씨, 마찌다 세사람이 점심식사를 했다고 한다. 마찌다 총영사는 추 화백이 해방 전 일본 천리대(天理大) 유학 당시 조선어과에 다니던 대학 후배다.

마찌다 씨는 지난 6월 15일 전화통화에서 “그때 일본의 이중섭 화백 부인인 마사코 여사에게 유품 얘기를 하니까 한국에는 갈 수 없다고 해 대구에서 온 분(이해균 씨)한테 명함에 있는 곳으로 (마사코 여사의)주소를 腔좋羚駭蔑굅?말했다.

이중섭 유품 유족에게 전달 안 돼
그러나 이중섭 유품(그림)은 무슨 연유에선지 마사코 여사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지난 7월 중순 대구에서 만난 이해균 씨의 부인인 이재실(77) 씨는 “추연근 화백의 그림(흑태양)이 집에 걸려 있다”며 추 화백을 정확히 기억했지만 이중섭 유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이중섭 유품 전달자를 추적한 결과 이해균 씨를 통해 이중섭 작품을 가족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인물은 서정희 시인과 경북도청 공보실에 함께 근무했던 김찬호(2002년 작고) 씨인 것으로 확인됐다.

서 시인의 첫 시집 ‘배암’을 출간(1961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서 시인이 죽기 전까지 의지했던 전경화(79) 전 영남일보 이사ㆍ논설위원은 “김찬호 선생을 잘 안다”면서 “서 시인이 작고한 후 잊고 지냈는데 김 선생이 서 시인 얘기를 하면서 이중섭 유품을 일본 가족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온 것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전 씨는 “당시 여러 사람을 얘기해줬는데 대구의 ‘마당발’로 통하는 이해균 씨도 말했는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김 씨는 1950년 5월부터 70년 11월까지 경북도청에 근무하다 72년 대구 MBC로 옮겨 84년 라디오 편성부장으로 정년 퇴임했으며 서 시인 생존시 많이 도와준 것으로 알려졌다.

김찬호 작가와 서정희 시인이 편집에 관여한 '도정월보'

김 씨의 부인인 이계숙(69ㆍ대구) 씨는 지난 4일 자택에서 김 씨의 출판기념회 때 서 시인등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착한 사람인데 병을 앓고 가난하다며 (서 시인을)불쌍해했다”고 술회했다.

이 씨는 이해균 씨는 물론 이중섭 화백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기억했다. “남편보다 키가 워낙 커서 기억한다”며 “무슨 행사 때 같이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해균 씨는 계성중고 농구 선수 출신으로 키가 183㎝나 되는 장신으로 1961~63년까지 경북체육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이 씨는 이중섭에 대해 “같은 북한 출신이어서 그런지 자주 어울렸다”면서 “키가 크고 얼굴이 큰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전경화 씨도 이해균 씨에 대해 “도 체육회 사무국장으로 신문사(영남일보)에도 자주 왔다”면서 “키가 크고 잘 생겼다”고 말했다. 또 “체육회 일을 하다보면 도 공보실을 찾게 마련인데 김 선생과도 알고 지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찬호 씨와 이해균 씨의 ‘특별한 인연’도 이중섭 유품이 세상에 나오는데 한몫 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사람 모두 철도운수경찰(철도후송대) 출신으로 선후배 관계다.

이해균 씨가 1~2년 선배로 이 씨는 해방이 되면서 철도후송대에 있다가 이듬해 대구폭동사건(1946년 10월) 직 후 그만두었고, 김찬호 씨는 6ㆍ25 가 발발할 때까지 직책을 유지하다 도청으로 옮겨 갔다.

여러 상황을 종합할 때 이해균 씨가 추연근 화백에게 말한 ‘이중섭 유품을 전달하겠다고 한 대구의 잘 아는 사람’은 김찬호 씨에 근접한다.

김찬호 씨는 70년 11월 경북도청을 퇴사하고 72년 대구 MBC로 옮겨가기까지 1년 가량의 공백이 있다. 김찬호 씨의 부인 이계숙 씨는 “그때 6촌 친척과 사업을 한다고 서울로 올라가 6개월 가량 머물다 내려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용수 씨가 인사동에서 이중섭 그림을 한 묶음으로 구입한 때는 71년 전후다. 김찬호 씨가 서울로 올라온 시점과 거의 일치 한다. 김 씨가 이중섭→최태응→서정희를 거쳐 자신에게 남겨진 이중섭 그림을 갖고 서울로 올라왔을 개연성이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중섭 작품의 출처가 ‘경상도 전쟁 미망인’이라고 할 때 그 미망인이 서정희 시인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서 시인의 남편은 사상범으로 수감돼 있다 6ㆍ25 전쟁 중에 옥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김용수 씨가 소장하고 있는 이중섭 작품은 ‘이중섭→최태응→서정희→김찬호→(중개상, 또는 제3자)→김용수’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순환 고리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검찰의 몫이다.

한편 추연근 화백은 4일 “전날 모 방송국 기자라며 사람들이 찾아와 ‘김용수 그림은 엄성관(추 화백의 부산사범학교 제자)이 그린 가짜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불량스런 태도를 보였다”며 “그들의 정체를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추 화백에 따르면 정체불명의 자들은 “김용수씨와 엄성관이 80년대 인사동에서 화랑을 함께 운영하며 겸재 정선 그림을 갖고 다툰 적이 있다”며 김씨와 엄씨의 관련성을 강조했다는 것.

그러나 인사동【?40년 가까이 활동하고, ‘TV 진품 명품’ 감정인으로 잘 알려진 진동만씨를 비롯해 30년 이상 인사동 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은 김씨나 엄씨가 화랑을 운영했다는 것에 대해 “처음 듣는 얘기”라고 밝혔다. 김씨 소장의 작품을 이미 작고한 엄씨와 관련지어 ‘위작’으로 몰아갈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또한 이번 사건의 검증위원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H화랑의 P대표를 비롯해 또 다른 H화랑 등이 제2의 옥션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전언도 검증인단 구성에 공정성을 의심케 하는 상황이어서 검찰의 행보가 주목된다.

인터뷰 / 전경화 여성 언론인
"위작 시비, 놀라울 따름"

전경화(79) 전 영남일보 이사ㆍ논설위원은 여성 언론인으로서 국내 최초로 편집국장ㆍ이사를 지낸 대구 언론계의 어른이자 문화계의 산 증인이다.

최근 진위논란이 되고 있는 이중섭 작품의 중심에 서있는 서정희 시인과는 동반자이자 정신적 지주처럼 지냈다. 서 시인이 작고(68년)한 뒤에는 문규, 문자 남매를 각각 협성재단 인쇄소와 대구상공회의소 여 사무원으로 취직시키고 돌봐주는 등 서 시인과의 인연에 최선을 다했다.

전 여사는 50년대 초 영남일보 편집국장이던 고 구상 시인이 이중섭의 친구여서 그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중섭은 대구 역전 앞 수복여관에서 지냈는데 구상 시인의 심부름을 가면 “꼬맹이 왔나”하면서 그림을 작게 접어 입으로 ‘후-욱’ 불곤했다는 것. 종이나 담배은지에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춘화도 자주 그려 당시는 ‘징그럽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물욕이 없고 조용했으나 예술가적 광기 같은 느낌이 늘 번득였다는 것.

서정희 시인과는 속깊은 얘기까지 나눴는데 남자관계에 대한 소문을 경계하면 “폐병 환자를 누가?”하면서 소녀처럼 웃곤했다는 것. 서 시인은 이중섭 뿐만 아니라 많은 문인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특히 경북도청 김찬호 작가와는 같은 공보실에서 근무해 오누이처럼 지냈다고 한다. 당시는 도청과 신문사가 가까워 전 여사까지 세 사람이 식사를 같이하거나 회사 근처 ‘파리’ 다방을 자주 들렀다고.

전 여사는 서 시인이 작고한 뒤 김 작가가 이중섭 유품 처리를 물어왔을 때 ‘뜻밖’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인들 몇몇을 알려준 기억이 있지만 그후 유품이 어떻게 됐는지는 잊고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이중섭 유품이 진위 논란 중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전 여사는 서 시인을 기억하는 한 그녀의 자녀를 꼭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냈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5-08-11 14:44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