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걸린 '지척의 땅' 밟기

개성, 굳게 닫힌 문을 열다
55년 걸린 '지척의 땅' 밟기

분단 후 55년. 굳게 닫힌 성(城)문이 열렸다(開). 서울에서 불과 2시간30분 거리에 위치한 개성은 지금까지 남녘사람에겐 금단의 땅이었다. 베일에 싸여있던 개성을 지난달 26일 다녀왔다.

당일치기로 진행된 제한적인 관광, 많은 것을 눈에 담고 카메라에 담느라 어느 때 보다 긴 하루였다.

자연미에서야 금강산을 따라갈 수 없겠지만, 유적지마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있어 답사여행코스로 손색이 없었다.

북측 출입사무소에서 간단한 수속을 밟고 나서 본격적인 개성관광이 시작됐다. 출입수속을 마치고 차량에 탑승하니 북측 안내원 2명이 차량에 동행했다.

개성관광을 소개하는 가이드이기도 하지만, 북측 주민이나 군사시설을 몰래 찍는 지를 관찰하는 감시원이기도 하다.

“주민 사진을 촬영하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묻는 짓궂은 남측 기자의 질문에 “그렇게 되면 좀 힘든 여행이 될 겁니다”라고 받아친다. 이어진 한바탕 웃음. 처음부터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

출입사무소에서 1시간 정도 지나니 개성공단이 눈에 들어온다. 남의 기술력과 북의 인력이 모여 대규모 공단을 건설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여기서 개성시내까지는 불과 5분 거리다.

개성 시내의 첫인상은 1960~70년대가 배경인 드라마나 영화의 세트장에 온 느낌이다. 봉동책방, 개성영화관, 리발관, 공업품상점, 아동백화점 등 간판을 뒤덮은 큼직한 글씨들이 인상적이다.

유독 상점이 많은 걸 보면 역시 그들은 개성상인의 후예인가 보다. 일터로 가는 개성 주민들의 표정도 밝은 편. 관광객을 반기며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싱그럽다. 아파트 베란다마다 잿빛 벽면의 칙칙함을 가리기 위해 놓아둔 화사한 화분도 이국적이다.

첫 여행지로 방문한 곳은 고려성균관. 조선의 성균관보다 500년을 앞선다. 성균관이 최고 학부의 교육을 하던 곳이니, 이 곳은 국내 최초의 대학으로 보면 될 터이다.

지금은 대부분 건물이 고려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300년 앞선 금속활자를 비롯, 고려청자, 별자리를 그려놓은 천문도 등이 볼거리다. 천년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도 빼놓지 말아야 할 구경거리다.

선죽교는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철퇴에 맞아 숨진 고려 충신 정몽주의 한이 서린 곳으로 유명하다. 길이 6.77m, 너비 2.54m의 조그만 다리지만 많은 사연이 서려있다.

다리 주변에 난 참대는 정몽주가 피를 흘린 자리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선죽교(善竹橋)라는 이름도 이 때문에 지어졌다. 자세히 보면 다리가 둘이다.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원래 선죽교에 난간을 설치, 사람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새 다리를 놓은 것이다. 다리 옆에 새겨진 선죽교비석은 조선의 명필 한석봉의 친필이다.

선죽교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자리잡은 표충비는 암수 돌거북위에 세워놓은 비석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울음을 울었다고 전하는데, 6ㆍ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눈물을 흘렸다는 신비의 비석이다.

이 비석에 절을 하면 자식을 잘 낳을 수 있다고 해서 개성의 신혼부부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개성관광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박연폭포다. 시내에서 개성-평양간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가량을 이동한다.

저 멀리 송악산이 눈에 들어왔다. 처녀가 누워있는 모습을 닮았다. 헌데, 처녀의 배부분이 불쑥 솟았다. 임신한 처녀의 형상인 셈이다.

재미있는 전설이 전한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어떻게 하면 고려를 멸망시킬 수 있을 지 산신령에게 물었더니, “처녀의 모습을 닮은 송악산이 임신을 하면 고려는 멸망한다”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송악산에 올라가 매일 자위행위를 했고, 그렇게 얻은 정액을 송악산에 묻었더니,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송악산 처자를 임신시킨 장본인을 이성계로 설정한 것은 아마도 500년 왕조를 멸망시킨 데 대한 개성인의 반감이 아닐까 싶다.

박연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국내 3대 폭포에 속한다. 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리던 황진이와 서화담은 가고 없어도, 폭포의 거침없는 포효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37m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이 장관이다. 폭포앞 용바위에는 황진이가 머리채에 걋?묻혀 일필휘지로 갈겨쓴 시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비류직하 삼천척/ 의시은하락구천(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ㆍ물줄기 내리 쏟아 길이 삼천 자, 하늘에서 은하수 쏟아지는가).’ 초서체로 쓰여진 이 글은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의 한 구절이다.

웅장한 박연폭포의 위용을 제대로 보려면 범사정이 좋다. 내친 김에 박연폭포 상류로 거슬러올라 가는 것은 어떨까.

범사정옆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면 대흥산성 북문과 만난다. 이 곳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바가지 모양의 연못을 만난다.

옛날에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용왕의 딸과 함께 살았던 곳이란다. 박연(朴淵)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개성인의 상술은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나 보다. 산성에 간이 매점을 마련, 관광객을 맞고 있다. 물건을 파는 여성 안내원의 미모가 예사롭지 않다.

물건 값이 다른 매점의 2배가량이지만 그 미소에 빠져 즉석에서 구입한 들쭉술을 들이키는 관광객이 적지 않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니 한 안내원이 서투른 솜씨로 가야금을 퉁겨댄다. 그 장단에 맞춰 한 관광객이 서화담이라도 된 듯 덩실덩실 춤을 춘다. 더 이상 남과 북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성=글ㆍ사진 한창만기자


입력시간 : 2005-09-07 15:06


개성=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