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임나일본부


“2006년도부터 4년 간 사용될 중학교용 교과서 채택이 끝났다. 많은 국민과 아시아인들이 반대해 온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만드는 모임)의 역사ㆍ공민교과서의 채택은 기본적으로 저지됐다.

만드는 모임은 4년 전(2001년)과 마찬가지로 채택률 10% (약 12만5,000권) 이상의 목표를 내걸었으나 최종 채택률은 역사 0.39%, 공민 0.2%에 머물렀다.”

한국의 시민단체와 연대해 ‘만드는 모임’이 편찬한 후소샤(扶桑社) 교과서 차단 운동에 앞장서 온 일본의 연합시민단체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 21’의 다와라 요시후미 (表義文) 사무국장은 9월초 이렇게 선언했다.

‘만드는 모임’ 교과서의 참패는 국내에도 크게 보도됐다. 두 차례에 걸친 참패는 출판사인 후소샤에 사실상 8년 간의 막대한 적자를 안겼다는 점에서 앞으로 ‘만드는 모임’의 입김이 크게 위축될 것이란 낙관적 전망을 낳았다.

그러나 다와라 사무국장이 ‘만드는 모임’ 교과서만이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했듯 일본 교과서의 역사왜곡은 곳곳에 잠복해 있는 문제다.

‘만드는 모임’ 교과서와는 정도의 차이일 뿐 기본인식의 방향이 비슷한 교과서는 얼마든지 있다. 더욱이 특정 내용의 기술 태도를 기준으로 삼을 때는 정도의 차이조차 따지기 어려운 역사교과서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임나일본부’에 대한 것이다. 애초에 2000년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신청할 당시 ‘만드는 모임’ 교과서는 이렇게 적었다.

‘야마토(大和) 조정은 4세기 후반 바다를 건너 조선에 출병, 반도 남부의 임나(任那, 加羅)라는 곳에 세력권을 차지했고 후대의 일본 역사서는 그 거점을 임나일본부라고 불렀다.’

문부과학성 검정을 거치면서 이 기술은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라)라는 곳에 거점을 두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로 수정됐다.

애매한 표현이지만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독자적 거점을 가졌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은 거의 그대로 살린 셈이다. 그런데 다른 7종의 교과서도 ‘임나’라는 말은 피했지만 ‘영향력’ 등의 표현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연상시키는 기술을 담았다.

한일 간의 고대사 논쟁에서 늘 중심에 서고, 객관적 학문 논쟁보다는 민족 감정 등 다른 문제와 뒤엉켜 편견과 무리한 주장의 공방을 부른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이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일본측 통설의 출발점은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실려 있는 진구(神功) 황후 전설이다.

진구 황후가 역사 인물로는 보기 어렵고, 관련 내용 전체가 일본 열도 남부의 통일왕권 수립과정에 대한 설화적 묘사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80척의 배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의 7국과 4읍을 점령했다’는 내용만은 연대까지 369년으로 비정하는 등 일본측의 집착을 불렀다.

또 『일본서기』의 긴메이기(欽明紀) 등은 임나에 ‘일본부’가 존재했다는 점은 물론 그 관료들의 이름이나 활동 상황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고 있다.

한편으로 해석 논쟁이 아직까지 분분한 광개토대왕비문의 신묘년(辛卯年, 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해 결정적 증거라고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지금은 내용이 많이 축소되고, 해석 방향도 다양해졌지만 일본 식민사관의 중심을 이룬 임나일본부설의 골격은 1720년에 완성된 『대일본사』에서 이미 갖춰졌다.

‘진구 황후 때 삼한과 가라를 평정하여 임나에 일본부를 두고 삼한을 통제했다’고 적었다. 이런 일본의 인식은 1949년 쓰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임나흥망사』에 의해 완성됐다.

왜가 진구 황후 섭정 49년(369년)에 가야 지역을 군사 정벌하여 그 지배 아래 임나를 성립시킨 후 설치한 임나일본부를 중심으로 약 200년 간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다가 긴메이 천황 23년(562년) 신라에게 빼앗겼다는 내용이다.

고대 일본의 이른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또는 ‘출선기관(出先機關, 출장소)론’의 골자이다.

이런 일본의 주장에 대해 1960년대부터 잇따라 반론이 제기됐다. 북한 김석형이 제기한 ‘분국설’(分國說)은 고대 일본 열도에 삼한 주琯湧?일본에 출신지와 같은 이름의 나라, 즉 모국의 분국에 해당하는 나라를 건설했으며 임나국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임나일본부설을 완전히 뒤집어 고대 한국의 일본 열도 진출론으로 바꾸어 버린 그의 주장은 그 역사적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 발상의 전환을 자극했다.

일본에서 임나일본부를 가야지역에 집단 거주한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행정기관이나 자치기관으로 보는 설이 제기된 것도 그 영향이었다. 한국에서도 임나일본부를 백제가 가야 지역에 두었던 ‘임나백제부’로 보는 견해 등이 잇따랐다.

1980년대 이후의 임나일본부 연구는 크게 보아 전통적 임나일본부설의 내용을 축소하면서도 기본 골격을 유지해 임나 성립시기를 5세기 초나 6세기 초로 늦춰보거나, 아예 군사적 측면을 배제하고 외교나 교역기관으로 보는 견해가 주종을 이루었다.

애초에 임나일본부의 군사 ㆍ정치적 성격에 매달린 해석은 부(府)라는 명칭 때문이었다. 부는 중국 한나라 때 장군들이 천자로부터 위임받은 군사ㆍ행정권의 실행을 위해 설치한 군사통치기구를 가리켰다.

이를 그대로 적용하면 임나일본부는 어쨌든 임나(가야)에 설치된 일본의 군사통치기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부’의 일본식 훈독의 하나인 ‘야마토노미코토모치’를 적용하면 전혀 뜻이 달라진다.

‘야마토노’(大和の)는 ‘일본의’라는 뜻이다. ‘미코토모치’(御事持)는 당시 야마토 정권의 통치자인 오키미(大君)의 뜻을 지방의 수장들에게 전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을 가리켰다. 그러면 임나일본부는 통치기구가 되는 대신 일본이 임나에 파견한 사신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일본 최고 권위의 사전인 고지엔(廣辭苑)도 임나일본부를 ‘야마토 조정이 가야에 파견했던 사절단’으로 적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거나 턱없이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직도 한국 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을 다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비판에 일관성이 결여돼 있고, 한때 화제가 됐던 광개토대왕비문 조작설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삼국사기』나 광개토대왕비에 자주 등장하는, 4세기 한반도 남부에서의 왜병의 활발한 활동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다.

올 3월에 간행된 한일역사공동연구 보고서를 보면 4~5세기 역사를 두고 한일 양국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 내용을 3자적 시각에서 읽을 때 일본측과의 팽팽한 의견대립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의 군사활동 규모와 의미를 축소해 보려는 노력과 그 객관적 근거의 취약성을 지적하는 논쟁이 곳곳에서 발견될 뿐이다.

학계의 보다 치밀한 노력, 무리한 확대해석을 피하고 최대한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고, 그 이유는 무엇보다 고대사를 두고 양국, 또는 양민족의 자존심을 다투려는 엉뚱한 욕구 때문이다.

만약에 앞서 언급했듯 가야와 야마토 정권의 관계를 노르망디와 영국 노르만 왕조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면 이런 역사 외적인 압력에서 많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임나일본부의 다른 표현인 ‘우치노미야케’(內官家)에서도 그런 상상력은 뒷받침된다. 우치노미야케는 야마토 조정의 직할 영지를 뜻한다.

직할 영지를 어떻게 바다 건너 먼 곳에 둘 수 있을까. 프랑스에 완전히 영지를 빼앗길 때까지 영국 왕실이 노르망디를 영지로 갖고 있었듯 가야 지배층이 건설한 야마토 정권도 조상의 묘가 남아 있는 가야에 집착했을 것이다.

가야가 신라에 의해 562년 완전히 멸망했을 때의 야마토 정권의 비탄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상정하는 민족 단위의 역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역동을 거듭한 고대사의 이런 모습이 어떻게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다는 것일까.


황영식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10-05 14:31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