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154~183년)이 즉위한 지 4년째인 정유년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서 해조를 뜯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가 하나 나타나더니 그를 태우고는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하였다.

“이 사람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바닷가에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하였다. 그녀 역시 바위 위로 올라갔더니 바위는 또 이전처럼 그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의아하게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세오녀를 왕에게 바쳤다. 부부는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녀는 귀비가 되었다.

이 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이 왕께 상주하였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 나라에 내렸다가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

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이에 연오랑이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오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짐의 비(妃)가 짜놓은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오.”

그리고는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대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되찾았으므로 그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간직하여 나라의 보물로 삼았다.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고 하고,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기이편(奇異篇) 제1권에 나오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다. 저자인 일연(一然)은 13세기 당시까지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다.

연오랑이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되었다는 일연의 기술에 대해 승려였을 것으로 보이는 어느 후세인은 이런 주를 달았다. “『일본제기(日本帝記)』를 살펴볼 때 (이 때를) 전후하여 신라 사람으로서 왕이 된 자가 없었다. 이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지 진짜 왕이 아니다.”

전설이나 설화를 액면 그대로 해석하려고 애쓴 그의 모습에 미소를 떠올리게 된다. 고려 시대라면 능히 그랬을 것이다.

이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에 담긴 참 내용을 찾아내려고 한 대표적인 학자가 북한의 김석형이었다.

가야 중심세력이 본격적으로 일본 열도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되는 5세기 이전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사람들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라고 이 설화를 높이 평가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이 설화 보따리에 담긴 내용을 더듬어 보자.

설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귀비고라는 창고 이야기는 신라 왕실이 따로 비단을 넣어 두는 창고를 가지고 있었다는 전승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경주에서 동쪽으로 동해를 찾아가면 이르게 되는 곳이 바로 영일 땅이다. 이 지역은 그 이름처럼 한반도에서 가장 해가 일찍 뜨는 곳으로 매년 1월1일에는 관광객이 새해 첫 해돋이를 보려고 몰려든다.

지금이야 해돋이는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설화의 배경인 당시에는 태양신, 천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국가적 행사의 무대였을 것이다.

그 제사 장소가 뜻으로 읽으면 ‘으뜸가는(都) 제사(祈)를 올리던 들판(野)’이었다. 귀비고는 이 제사에 소요되는 제물과 도구를 간직하던 성스러운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일현의 옛 이름에 ‘근오기’(斤烏支)라는 것이 있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적고 있다.

근(斤)이 ‘큰’(大)의 이두로서 흔히 쓰였다는 점에서 ‘큰 오기’의 이두식 표기라고 볼 수 있다. 또 언양(彦陽)의 옛 이름에 지화(知火)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원래는 ‘지불’이었다.

이 ‘큰 오기’와 현재 시마네(島根)현인 이즈모(出雲) 지방 오키(隱岐) 섬의 발음이 비슷한 것은 먼 옛날 이즈모 지역이 신라와 깊은 관계를 가졌음을 추정하게 하는 일본 설화나 지리적 요소 등과 함께 두 지역의 적지 않은 관련성을 시사한다.

설화 마지막에 나오는 도기야(都祈野)를 욱기야(郁祈野)의 오기로 본다면 도기야도 ‘오키’와 관련된 말이 될 수 있다.

야마다 가오루(山田薰) 같은 일본 학자는 이 오키섬 옆의 지부(知夫)섬도 언양의 옛 이름 ‘지불’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그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가 단순히 먼 옛날 신라인의 일본 이주를 알려주는 것만이 아니라 더욱 큰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삼국유사≫가 설화의 시대배경으로 소개한 서기 157년 중국의 뤄양(洛陽)에서 일식이 있었다는 ≪후한서(後漢書)≫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영일에서도 일식이 있었던 사실을 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설화가 일식이나 월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 하늘에 대한 제사도 인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자연현상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 대응이었을 것이다.

다만 설화를 역사적 사실과 정확히 대응시키려는 태도는 그리 과학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어느 시기의 특정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이뤄진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에 가깝다.

특히 신라가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지 못한 서기 157년의 일로 치기에는 설화 속에 나오는 왕권의 범위 등이 너무 크다. 오히려 훨씬 나중의 일이 기록이나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삼국유사》에 와서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야마다씨가 결론으로서 밝힌 아래 이야기는 개연성이 있다.

“아마도 연오랑이 지부리 섬에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떠나 온 고향 오기(烏支), 즉 영일의 이름을 따서 옮겼든, 세오녀가 하늘에 제사지내 해맞이를 한 욱기야(郁祈野)의 지명을 옮겼든 오키라는 지명은 연오랑과 세오녀가 신라의 동해안에서 일본으로 가지고 간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여러 가지 의문이 한꺼번에 풀릴 수 있다.”

‘오키’나 ‘지부’가 모두 신라 지역 이주민들이 신개척지에 붙인 이름이고, 그것이 나중에 일본에서 행해진 대대적인 ‘반(反) 신라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굳이 연오랑과 세오녀가 붙였다고 볼 필요는 없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상징하는, 신라 이주민들의 영향력이 미쳤던 지역을 굳이 오키섬이나 지부섬에 국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즈모 지방 자체가 한반도 동남쪽 땅 일부를 떼어서 붙인 것이라는 현지의 신화, 야요이 시대 이래로 이 지역에는 경상도 동남해안으로부터의 이주가 활발했다는 점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는 고대 일본 열도에 제대로 왕권이 수립되기 전 이즈모 지방의 패권을 잡았거나,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신라 출신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제법 오랜 기간을 신라 왕권과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설화를 통해 여자들이 만든 비단을 고국 신라에 보내기도 했고, 잦은 왕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주석자들은 신라 사람이 일본 땅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는 얘기에 강한 의심을 품었다. 그들은 다른 글에서도 보이듯,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 ≪일본제기≫라는 역사서까지 대조하며 사실 확인을 하려고 했다. 그리고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변방의 왕’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의 시각은 두 가지 점에서 틀리지 않다. 우선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의 시대 배경을 이루는 4, 5세기 이전의 일본에서 고려 시대의 눈으로 볼 때 ‘중앙의 왕국’이라고 할 만한 지배적인 왕권은 없었다.

또 이즈모 지역은 일본 열도에서의 왕권 수립 과정에서 패배자의 지위에 놓여 이후의 역사에서 사라져갔다는 점에서 변방일 수밖에 없었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