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오랑과 세오녀 설화가 시사하는 초기 신라와 일본 이즈모(出雲, 현재의 시마네현) 지역의 밀접한 관계는 이후 한반도와 일본 각각의 정세변화에 따라 크게 바뀐다.

한반도 중부 지역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가 장기 전쟁을 벌인 4세기 말에 이르면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고구려-신라 및 백제-가야-왜의 대립 구도에 들어간다.

이런 구도 아래 한반도 동남부의 좁고 척박한 땅에 한정된 신라의 상대적 세력 위축은 불가피했다. 이즈모 지역에 구축됐던 신라계 세력도 규슈(九州) 지역에서 북상을 거듭한 가야계 세력에 밀려 근거지를 잃었다.

한반도 안에서의 신라의 위축과 이즈모 지역의 신라계 이주민 세력의 위축은 선후를 따지기 어렵다. 신라가 강성했다면 이즈모 지역 이주민 세력의 위축을 막을 수 있었다.

또 거꾸로 이즈모 지역의 신라계 세력이 당시 일본 열도의 정치 통합 과정에서 강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면 한반도에서의 신라의 세력 위축에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가정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으니 두 가지 요소가 상호 작용했다고 보아 넘기는 것이 편하다.

당시 신라가 택한 방법은 눈 앞의 위협인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그에 따른 왜의 반발을 어떻게든 완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신라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전하는 것이 이른바 ‘박제상(朴堤上) 이야기’다.

박제상 이야기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대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은 그 근거였을 문헌 기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선 이 이야기를 전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부터 다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제상전은 이렇게 전했다.

【박제상(모영?毛永이라고도 한다)은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고, 파사 이사금의 5대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阿道) 갈문왕이고, 아버지는 물품(勿品) 파진찬이다. 제상은 벼슬이 삽량주(?良州) 간(干)이었다.

앞서 실성왕 원년 임인(壬寅= 402년)에 왜국과 화친을 맺을 때 왜왕이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삼겠다고 요구했다.

실성왕은 일찍이 내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던 터여서 그 아들에게 분풀이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기에 왜왕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미사흔을 보냈고, 또 11년 임자(壬子= 412년)에 고구려에서도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볼모로 요구하자 그를 보냈다.

그 후 눌지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말 잘하는 사람을 구하여 미사흔의 형제를 데려오기로 하였다. (중략)

이에 왕이 제상을 불러 부탁하니 제상이 대답하기를 “제가 비록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지만 명령대로 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고는 이윽고 예방 절차를 갖추어 고구려로 가서 고구려 왕에게 말했다.

“제가 듣건대 이웃나라와 교제하는 도리는 정성과 신의뿐이라는데 아들을 볼모로 교환하는 것은 오패(五覇)보다 못한 행위로서 진실로 말세의 일입니다.

지금 우리 임금의 사랑하는 아우가 여기에 온 지 거의 10년이 가까워 우리 임금이 형제 간의 간절한 회포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대왕이 그를 고맙게 돌려 보낸다면 마치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 빠지는 셈으로 대왕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고, 우리 임금이 대왕에게 입은 덕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생각해 보소서!”

왕이 옳다고 하여 (눌지)왕의 아우를 제상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오자 대왕이 기뻐하며 제상에게 말하기를 “두 아우에 대한 생각이 마치 두 팔과 같은데 이제 오직 한 팔만 찾았으니 어찌하랴?”하였다.

제상이 대답하기를 “저의 재간이 비록 우둔하오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사오니 끝까지 대왕의 명령을 그르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국이고, 왕 또한 무던하여 제의 말 한 마디로 마음을 돌릴 수 있었지만 왜국 사람 따위는 말로 타일러서 들을 리 없으니 속임수로서 왕자를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제가 왜국으로 가거든 저에게 나라를 배반하였다는 죄를 내려 왜인들이 알게 하기를 바랍니다.”

(중략)

이에 앞서 백제 사람이 왜국에 들어가 중상하기를 신라와 고구려가 왜국을 침공하려 한다고 하니 왜국에서 이 말을 곧이 듣고 군사를 보내어 신라 국경 밖에서 순행하며 지키게 하였는데 마침 고구려가 침입해 왜국의 순라군을 모두 잡아 죽였다.

울산시 기념물 제1호인 치산서원은 치술 신모의 당집이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이 때야 왜왕이 백제 사람의 말을 참말로 여겼으며 신라 왕이 미사흔과 제상의 가족들을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 제상이 실지로 본국을 배반한 자라고 생각하였다. 그제야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습격하려 했는데 제상과 미사흔까지 장수로 삼아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왜병이 바다 가운데 있는 산으로 된 섬까지 와서 왜국 장수들이 가만히 의논하기를 신라를 쳐 없앤 뒤에 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잡아가지고 돌아가자고 하였다.

제상이 그것을 알고 미사흔과 함께 배를 타고 놀면서 마치 물고기와 오리를 잡으려는 사람처럼 보였더니 왜인들이 이를 보고 그들에게 딴 마음이 없다고 좋아하였다.

이에 제상이 미사흔에게 본국으로 슬며시 돌아가라고 권하니 미사흔은 “내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고 있는데 어찌 나 혼자 돌아가겠는가?”하고 말했다.

제상이 “만일 두 사람이 함께 떠난다면 계획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라고 말하니 미사흔이 제상의 목을 안고 울면서 하직하고 돌아왔다.

(중략)

왜인들이 미사흔이 도망간 것을 알고 제상을 묶어 두고 배를 저어 미사흔을 추격하였으나 때마침 안개가 자욱하여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인들이 제상을 자기들 왕에게 보내어 즉시 목도(木島)에 귀양을 보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을 시켜 장작불로 제상을 온 몸을 태운 뒤에 그의 목을 베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매우 슬퍼하여 대아찬을 추증하고 가족에게 후한 상을 내렸으며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게 해 제상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후략)】

《삼국유사》의 기록은 우선 등장인물이 박제상이 아닌 김제상, 미사흔이 아닌 미해(美海), 일명 미질희(未叱喜)로 되어 있다.

또 왜왕이 사신을 보내 ‘성의 표시’를 요구하고이에 응하는 형태로 미해가 왜국을 예방했다가 억류된 것이 내물왕 36년(390년)의 일이라고 적었다.

김제상이 고구려에 몰래 숨어 들어가 보해(寶海)를 구출하고, 왜국에 들어가 미해를 도망시키는 과정도 《삼국사기》와는 다르고 연대도 425년으로 잡았다.

자신의 신하가 되기를 종용한 왜왕에게 “차라리 계림(鷄林=신라)의 돼지, 개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으며 차라리 계림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을 없다”고 했다거나 제상의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낸 곳을 달리게 하여 ‘지금도 갈대에 피 흔적이 있는 것을 세상에서는 제상의 피라고 한다’는 얘기를 담았다.

또 ‘김제상의 부인이 못 견딜 만큼 남편을 사모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었다. 이래서 치술 신모(神母)가 되었으니 지금도 이곳에는 당집이 있다’고 전했다.

현재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얘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을 뒤섞은 것인 셈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흔히 말하는 망부석(望夫石) 전설은 없다.

대신 《삼국유사》가 언급한 치술령이 울산시 울주군에 있고, ‘치술 신모’를 모신 당집에서 사당으로 변했다가 다시 서원으로 바뀐 치산서원이 울산시에 남아 있어 어느 시기에 만들어진 민간의 전설인 것으로 보인다.

박제상 이야기가 전하는 역사적 진실은 4세기말~ 5세기 초 신라가 맞았던 어려운 환경이다. 또 일본이 야마토(大和) 정권으로 통합되기 이전 규슈와 이즈모 등 동해 가까운 지역의 정치세력을 가리켰을 ‘왜’가 이미 신라에 상당한 압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농업생산력을 국력의 지표로 삼아 지도책에서 평야지대를 확인하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