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김소연은 성큼성큼 걸었다. 길고 곧은 다리로 걷는 그녀를 사람들은 컴퍼스가 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둘러 걸을 때는 유독 긴 팔과 다리를 앞 뒤로 휘젓곤 했는데 마른 체형 때문인지 그 걸음걸이는 마치 그림자가 휘청이는 것 같았다.

작은 얼굴, 깨끗한 피부, 길고 가는 눈매는 동양적인 이미지로 흔하고 평범해 보였고, 살아있는 콧대와 무표정은 다가서기 힘든 차가운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는 듯 보였다. 키만 컸을 뿐 인형같이 예쁜 마스크는 아니었다.

시대는 변했다. 동시에 미의 기준도. 178센티의 큰 키와 차가워 보이지만 동시에 청순미를 풍기는 그녀의 마스크는 도회적인 세련미를 대변해 주는 미의 상징이 되었다.

노 메이크업에 꾸미지 않아도 그녀는 자체가 모델감이었다. 슈퍼 엘리트 모델은 그렇게 탄생했다. 95년 슈퍼 엘리트 모델 1위. 당시 16세 최연소 모델. 김소연, 그녀는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TV드라마 ‘짝’, ‘정 때문에’와 미니 시리즈 ‘1.5’, 영화 ‘신혼여행’ 그리고 CF에서 자주 얼굴을 보였고, 방송 연기대상에서 아역상과 인기상을 받는 등 한 때 매스컴에서 그녀를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슈퍼모델이 된 후 김소연은 현대판 신데렐라의 생을 만끽하며 살았다. 그 후 10년이 지났다.

무대와 무대 밖의 이중주 삶에 행복

“전 요즘 어느 때보다 정신없이 바쁘고, 또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에요."

TV에 안 나오면 마치 활동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 봄과 가을 시즌이 되면 모델들은 각종 패션쇼로 여느 때보다 분주해진다.

게다가 ‘안녕 형아’의 박유빈과 ‘불량주부’의 이영유 등 아역 탤런트들에게 필라테스를 가르치며 필라테스 비디오까지 찍었다.

비디오는 성장기의 어린이에게 도움이 되는 ‘키 크는 필라테스’ 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어른을 위한 필라테스 등 두 가지로 나뉘어 출시된다.

다이어트와 요가 열풍으로 요가, 필라테스 비디오 출시가 연예계의 트렌드처럼 되었지만 김소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지 않고 전문 강사로서 필라테스를 소개하기 때문이다.

안양예고 시절 요가와 스트레칭은 슈퍼 모델이 되기 전 그녀가 필수로 거쳐야 하는 전공이었다. 큰 키에 뻣뻣한 몸이 요가를 통해 유연해지면서 모델 활동을 하는데도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

그러다 2년 전 MTV 코리아의 프로그램 진행자로 필라테스를 소개하면서 필라테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라테스가 모델 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호주와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며 남다른 공을 들였다.

피트니스 체인 락시 웰니스 센터의 전속 모델로 활동하며 필라테스 강의를 하게 된 그녀는 전문 강사로 거듭나고 싶었다.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필라테스 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싶어서 3개월 동안 하루 8시간을 투자했어요.”

땀나는 노력 끝에 필라테스 자격증까지 취득한 그녀는 모델 일을 하는 틈틈이 신라호텔 등 웰빙 프로그램이 있는 곳에서 강사로 활동 중이다. 그렇게 몇 년 동안은 필라테스를 위해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그녀다.

“모델들은 골반이 비뚤어진 경우가 많은데 필라테스를 하면 뼈가 제 자리를 찾는 기분이 들죠. 잘못된 자세 교정에도 좋고, 근육을 강화하는 동시에 부드럽게 만들어 주거든요.” 모델 김소연의 이력에 ‘필라테스 전문 강사’라는 프로필 하나가 더 추가된 셈이다.

“필라테스는 원래 독일의 조셉 필라테스란 사람이 개발한 운동이에요.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부상당한 군인들의 재활치료를 위해 사용되었는데, 이후 미국에 소개되어 무용수, 운동선수, 배우들에게 사랑받게 되었죠.”

차분히 필라테스의 유래를 설명하는 김소연. 그녀는 슈퍼 모델이라기 보다 필라테스 전도사를 자청하고 나온 사람 같았다. 그녀에게 듣고 싶은 것은 정작 모델의 세계였는데.

“저는 패션쇼에 가까운 사람들조차 초대 안 해요. 무대에서 자유를 즐기고 싶어서요. 무대와 무대 밖의 삶, 이중주를 즐기거든요.”

모델 일은 이미 일상이 되었다. 먼저 질문하지 않고선 모델 일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그녀다. 무대 위에서 그녀의 변신은 자유다. 숨겨진 내면을 보이는데는 무대만한 곳도 없다.

무대 위의 화려한 불빛은 백스테이지의 우울함을 달래주곤 한다. 무대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 주목 받는다는 것, 묘한 긴장감, 그런 감정을 이젠 즐길 줄 안다. 모델 일은 그녀에게 천직이다.

지난 4일 롯데호텔 페닌슐라에서 ‘사랑의 열매’라는 이름의 자선 패션쇼가 열렸다. 슈퍼모델들의 모임인 아름회의 멤버들이 정기적으로 여는 이 패션쇼에서 김소연은 프랑스 명품 브랜드 센린느 자선티셔츠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

거기서 얻은 수익금 전액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된다고. “자선패션쇼를 통해 전액을 사회에 기부하고 대전의 천성원이란 시설에서 봉사활동도 하죠. 그 외엔 모델들만의 친목활동이 있어요.” 외모만 아름답다고 아름회가 아니라, 마음도 아름다워야 아름회라는 말도 그녀는 빼놓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선 패션쇼에 꼭 참여한다고.

“돈에 구애받고 싶지 않아요. 돈을 조금 주어도 하고 싶은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라면 꼭 하죠. 반대로 돈 때문에 마음에도 안 드는 일은 이미 안 한지 오래 됐어요.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소박한 행복을 얻고 싶은 사람이에요.”

4기 슈퍼 엘리트 모델이기에 이미 김소연은 아름회에서 대선배에 속한다. 여자라면 한번쯤 꿈꿔 보는 직업, 하지만 노력만으로 절대 될 수 없는 것들 중의 하나인 슈퍼 모델은 스타가 되는 빠른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소연, 그녀의 생각은 다르다.

“스타가 되는 건 적성에 맞는 사람에겐 좋은 일이죠. 그 시절 제가 꾸던 꿈은 평범해지는 거였어요.”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연예계 생활에서 그녀는 일찍 환멸을 느꼈다. “모든 아역스타들이 겪는 것인데 사춘기 시절 학교 생활과 사회생활 두 가지에서 오는 괴리감을 저는 감당하기 힘들었죠.”

대학(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들어와서도 적응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시절 거쳐야 하는 사춘기적 고민을 대학교 때 했던 그녀는 한 학기 휴학을 하는 동안 방황했다.

“젊음의 상징이 호기심이라고 하잖아요. 저는 아무것도 궁금하지가 않았어요.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채 애 어른이 되었죠. 어릴 때 유명세를 탔고, 부와 명성만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일찍 깨달았다고 할까요.”

김소연은 이중생활을 즐길 만큼 영악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바람대로 연예계에서 조금씩 빠져 나옴으로 슬럼프를 극복했고 평범해지는 연습을 했다.

“한 가지 일을 끈질기게 오래 하는 사람이 재능 있는 사람이래요.”

방송에서 인생 배우고 행복 느껴

요즘 그녀는 양천구 지역 유선 방송에서 생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인생수업 받으러 매주 수요일마다 목동 방송국에 가요.” 라고 말하는 그녀. 가수 현미씨가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모습에 푹 빠지기도 하고, 20년 동안 무명이었다가 노래 하나로 뜬 가수의 지난 삶에 눈물도 흘렸다.

한번은 학교 선배인 정치인이 나와 동문회비 안 냈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사회 각계 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 사는 이야기를 하는 안방 같은 프로그램이다.

다양한 사람들 속에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 그녀는 그때마다 인생을 배우는 기분이다. 모델일과 필라테스 강사,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 세 가지 일만으로 행복하다는 그녀. 화려한 연예계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와 자신의 속도에 맞는 일을 찾아 성장해 나가는 그녀의 모습 속에 쇼프로에 출연하기보다 친구랑 떡볶이 먹으며 수다를 떨고 싶어 했던 소녀 김소연이, 미니 시리즈 한편 찍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리는 삶보단 같은 과 동기들과 어울리며 술 취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일탈을 꿈꾸던 새내기 김소연이 눈 앞에 그려졌다.

그 소박한 꿈들 중 이루지 못한 것들도 사실 많다. 요즘 그녀의 꿈은 사업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두르진 않는다. 내공을 쌓으며 준비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에게 맞는 일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대에 서는 느낌은 항상 좋아요. 백스테이지는 차갑고 어둡고 정신 없지만 무대는 밝고 따뜻하고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잖아요. 그것이 우리네 인생 같기도 하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이 느낌, 적당한 긴장, 이런 기분 때문에 늘 무대에 오르는 것 같아요.”

그녀는 천상 모델이다. 나른한 오후, 대학로 ‘로마의 휴일’에서 행복한 티타임을 즐기던 그녀는 바람 냄새를 맡아가며 욕심내지 않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객원기자 cometyo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