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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칠지도




백제와 왜의 관계를 보여주는 칠지도

백제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왜와 관계를 맺었다. 그 관계는 신라와 가야의 중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와 왜의 관계는 대체로 대립이 중심이고, 가야와 왜의 관계는 대단히 친밀한 관계였다고 볼 때 백제와 왜의 관계는 전략적 협력관계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가야의 중개로 제휴ㆍ연대 관계를 가졌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동맹관계로 발전했다.

백제와 왜의 동맹관계에 대한 시각은 다양하다. 백제가 4세기 말에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길 때 이른바 ‘한성(漢城) 백제’의 주력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가 강력한 세력권을 형성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고, 그에 앞서 온조(溫祚)계와의 다툼에서 밀린 비류(沸流)계 세력이 일찌감치 일본 열도에 진출했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옛 문헌과 역사적 상황을 살펴볼 때 가장 상식적인 견해는 백제가 가야와 일본 열도의 오랜 교류에 편승해 일본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다.

앞의 두 시각은 백제와 왜의 교류가 본격화한 이후의 일을 앞선 시기에 갖다 붙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백제와 왜의 교류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4세기 후반, 즉 366년의 일을 적은 《니혼쇼키(日本書紀)》의 기록이다. 백제가 왜의 사신을 맞아 비단과 활, 철정(鐵?ㆍ쇠막대) 40개를 준 것으로 적혀있다.

당시 일본 열도에서 철광 개발이나 제련이 이뤄지지 않아 전적으로 철의 조달을 가야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철제 무기나 도구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쇠막대 40개는 특별한 의미를 가졌을 수 있다.

또 《니혼쇼키》의 왜가 전적으로 현재의 나라(奈良)현을 중심으로 한 야마토(大和) 정권에 치중했다는 점에서 당시 백제와의 교류를 튼 일본의 정권은 중심 세력인 야마토 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러 세력이 각축하는 가운데 가야의 중개로 선진문물의 대국인 백제와 관계를 확립한 것은 야마토 지역의 세력이 다른 지역의 세력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국내 사료에서 처음 등장하는 백제와 왜의 관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년)조의 백제 태자 전지(?支)의 볼모 기사다. 아신왕 6년 여름 5월에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는 기록이다.

《삼국사기》가 비교적 자세히 언급한 전지왕의 기록은 이렇다.



칠지도가 보관돼 있는 이소노카미 신궁

【직지(直支)라고도 한다. 《양서(梁書)》에는 이름을 영(映)이라고 했는데 아신왕의 맏아들이다. 아신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태자가 됐고, 6년에 왜국에 볼모로 가서 있었다.

14년에 아신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신 맡아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왕의 막내 동생 접례(?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전지가 부고를 듣고 울면서 돌아가기를 청하니 왜왕이 군사 100명으로 호송하였다. 전지가 국경에 들어서자 한성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고하기를 “대왕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왕의 아우 접례가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원컨대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오지 마소서”라고 했다.

전지가 왜인을 만류하여 자신을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거해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나라 사람들이 접례를 죽이고 전지를 영접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5년(409년)에 왜국에서 사신을 시켜 야명주를 보내 오자 왕이 특별한 예로써 대했다. 14년(418년) 여름에 왜국에 사신을 파견했고, 흰 포목 10필을 보냈다.】

같은 볼모 얘기지만 지난번에 살펴 본 박제상 이야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왜가 볼모를 돌려보내며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호위하기 위해 100명이라는 적지 않은 병사를 딸려 보낸 것이 결정적이다.

신라 중심으로 씌어진 《삼국사기》가 박제상 이야기와의 균형을 위해 억지로 ‘볼모’라고 표현한 것일 뿐 실제 자격은 상당히 달랐음을 알 수 있다.

397년이면 백제가 한강 유역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치열하게 다투면서 힘의 열세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당시 백제를 도와 고구려의 남하에 저항할 세력이라고는 일본이 유일했다.

앞서 가야를 통해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어둔 백제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는 위기를 앞두고 지원 세력인 왜에 확고한 성의 표시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태자를 사신으로 보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왕이 죽자 그 뒤를 잇기 위해 태자가 귀국했고, 왜는 그의 귀국을 막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백제와 왜의 이런 관계를 보다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한일 간에 오랜 논란을 불러 온 칠지도(七支刀)다.

일본 나라현 덴리(天理)시에는 이소노카미(石上) 신궁(神宮)이 있다. 고대 일본의 지배세력의 하나였던 모노노베(物部)씨의 조상을 모신 씨족 사당이다.

보통의 씨족신을 섬기는 신사라면 신궁이란 이름을 가질 수 없다. 신궁은 많은 신사 가운데 천황가의 인물을 섬기는 신사에 한정해서 붙이는 이름이다.

따라서 이소노카미 신궁은 일본 천황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신사일 수밖에 없다. 역사서이기도 하지만 일본 신토(神道)의 경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 《고지키(古事記)》에 이세(伊勢) 신궁이나 미와(三輪) 신사와 함께 이름이 나와 있는 세 신사 중의 하나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야마토 정권의 무기고 자리에 세워진 신사였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일본 고대국가 성립 초기에 무기가 단순히 전쟁용, 살상용의 의미를 넘어 제의적 상징성이 강했음을 생각하면 야마토 정권의 기반이 이 무기고에서 나왔기에 이소노카미 신궁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1874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ㆍ사찰의 주지에 해당)로 부임한 스가 마사토모(菅政友)는 보물창고에 대대로 보관돼 온 유물을 조사하다가 칠지도를 발견했다.

녹이 심하게 슬었지만 어렴풋한 금빛 명문(銘文)의 존재를 알아채고 쇠줄로 녹을 긁어냈다. 당시 엄청나게 많은 녹이 떨어져 나갔고, 금가루도 함께 묻어 나가 원래의 글자가 많이 훼손됐지만 대체적인 명문의 내용은 파악됐다.

앞면에서는 ‘태화4년 5월16일 정오에 백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능히 모든 무기를 물리칠 만해서 후왕에게 주기에 알맞다’(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生?百兵宜供供侯王)는 내용이 드러났다.

또 뒷면은 ‘예로부터 일찍이 이런 칼은 없었다. 백제 왕세자 기생이 덕이 있는 까닭으로 왜왕을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해 보이라’(先世以來未有此刀百?王世子奇生聖德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는 뜻으로 읽혔다.

이 칠지도를 두고 한일 양국 학계는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일본측은 칠지도 명문을 ‘백제가 칠지도(七枝刀)와 칠자경(七子鏡)을 바쳤다’는 《니혼쇼키》 진구(神功) 42년(372년)의 기사와 연결시키려고, 한국측은 이를 배제하려고 오랜 줄다리기를 해왔다.

칠지도가 《니혼쇼키》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이라면 임나일본부설 등 다른 관련 기록의 신빙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서로가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필요한 것은 동일한 행위에 대한 해석이 주체에 따라 다르다는 상식이다. 칠지도를 만들어 주면서 백제는 왜왕을 후왕, 즉 제후라고 인식했다.

또 칼을 길이 후세에 전해 백제의 뜻을 알리도록 주문했다. 그것을 일본의 왕권이 확고해지고 백제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8세기에 ‘용비어천가’로 씌어진 《니혼쇼키》가 ‘백제의 후왕이 헌상했다’고 내용을 틀어 쓴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앞의 전지왕의 ‘볼모’ 기사와 칠지도 명문을 합쳐서 읽으면, 백제와 왜의 관계가 조금씩 내용이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고구려의 남하에 위기감을 느껴 백제가 적극적으로 왜국과의 군사동맹을 모색했지만 한반도 정세가 소강상태에 빠짐에 따라 왜와의 관계에서 여유를 찾으면서 백제의 문화적 우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 2005-11-2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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