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온 뒤에 땅은 굳어진다"

1년 6개월 간의 난자 채취를 둘러싼 ‘황우석 논란’이 일단 진정 국면으로 돌아섰다.

인간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의 개척자이자 윤리 의혹의 당자사인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가 11월24일 기자회견을 갖고 “소속 연구원의 난자가 제공된 것과 난자 채취에 따른 보상금이 지급된 것이 사실”이라며 “다만 이러한 사실은 모두 사후에 알게 됐다”고 솔직하게 해명했다.

그 동안 영국의 과학저널 ‘네이처’와 한국생명윤리학회가 수 차례 제기한 의혹에 대해 일관되게 부인해 왔던 그의 발언이 거짓임을 사과한 셈이다.

이로써 황 교수는 1964년 마련된 과학연구의 국제 기준인 ‘헬싱키 선언’(인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책임자인 의사와 고용관계에 있는 자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사실상 금기시한 윤리 기준)을 위배한 것은 물론 과학자로서 신뢰성에 씻기 힘든 오점을 남기게 됐다.

그러나 ‘황우석 고백’ 이후 세계의 여론은 동정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네이처는 “한국의 연구는 황 박사 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영국 과학자의 말을 인용했고, BBC는 “한국의 연구는 계속돼야 한다”고 한 영국 국립의학연구소의 로빈 로벨 박사의 말을 소개했다.

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황 교수와 제럴드 섀튼 박사의 결별과 관련, “(윤리적으로) 극히 민감한 줄기세포 연구와 복제 분야에서 국제 규범의 준수가 특히 사회적 전통이 매우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한국이 주도하는 줄기세포 연구의 국제적 공조에 차질이 우려되는 점도 없지 않다. 섀튼 박사의 결별 선언 후 미국 캘리포니아 퍼시픽 불임센터, 어린이 신경생물학치료재단 등이 의혹이 해소될 때까지 한국의 줄기세포허브 참가를 유보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논문을 실었던 미국의 과학저널 ‘사이언스’ 조차 “황 교수의 소명이 있은 후 입장을 밝히겠다”는 태도로 학술적 차원의 조치가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황 교수의 기자 회견장에서 “난자 제공 연구자가 강력히 프라이버시 보호를 요청해 네이처지에 사실과 달리 답했다”는 해명에 대해 “네이처에 이미 이름이 다 공개된 연구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전 세계를 상대로 거짓말을 한 이유를 설명해보라”고 받아 친 미국 타임 기자의 질문에서 볼 수 있듯 외국 연구진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높아 보인다.

그 동안 윤리적 논쟁보다 난치병 치료를 위한 과업과 황 교수 연구가 가져 다 줄 국익을 강조해 온 네티즌과 정치권의 여론과는 달리 국내 과학계와 시민단체들은 인간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의학의 어떤 다른 분야보다 엄격한 윤리성을 요구하는 국제적 기준에 따라 과학계나 정부가 보다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지각 고백에 아쉬움

사태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황 교수는 진실을 밝힐 기회가 수 차례 있었다. 지난해 5월 네이처가 “황 교수팀 연구실의 박사 과정 여학생 2명이 난자 기증자에 포함돼 있다”면서 윤리적 문제를 처음 제기한 직후 연구원의 난자 기증사실을 확인했음에도 황 교수는 이 사실을 공식 부인했다.

이후 한국생명윤리학회가 지난해 5월부터 올해 6월까지 3차례에 걸쳐 ‘난자의 출처를 밝히라’는 공개질의와 토론 제안에도 그의 대응은 마찬가지였다.

또 황 교수는 최근 공동연구를 해 온 섀튼 박사의 결별 선언 직후에도 CNN 주최 컨퍼런스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는 정부가 정한 윤리 가이드라인을 엄격하게 준수했다”며 연구원의 난자 채취 등이 없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서울대 수의대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황우석 교수











이후 언론의 집요한 취재에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이 초기 연구에 금전적 대가를 치르고 얻은 난자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서야 비로소 황 교수는 입을 열었다.

이런 탓에 국내 과학계는 막판까지 몰린 듯한 상황에서 나온 황 교수의 ‘지각 고백’이 그의 진정성을 반감시켰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보건복지부의 태도도 사태를 진정하기는커녕 악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황 교수의 11월24일 입장 발표 직전 복지부는 서울대 수의대학 기관윤리위원회(IRB)의 ‘체세포 줄기세포 연구를 위한 난자 수급 자체조사’ 결과를 대신 발표했다.

복지부가 설명한 보고서의 결론은 황 교수 연구팀에 제기된 연구자의 난자 제공 의혹 등은 사실이지만, 현행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발효(2005.1.1) 이전의 일로 법적으로 책임질 일이 없고, 강요나 회유에 의한 것이 아닌 데다 영리를 추구하기 위한 대가가 오간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윤리 준칙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황 교수가 만류했음에도 본인들이 자발적 의지로 난자를 제공했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존엄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동ㆍ서양 문화의 차이에서 생긴 논란임을 강조했다.

이는 연구원이 난자 제공을 하게 된 배경을 연구원의 신분상 강요를 뿌리치기 어렵다는 ‘국제적 인식’보다는 ‘자기희생적, 헌신적’ 행위로 바라보는 ‘한국적 인식’에 무게를 뒀다.

그러자 그 동안 윤리 논쟁에 침묵을 지켜 왔던 시민ㆍ사회단체들이 ‘이건 아니다’라며 발끈하고 나섰다. ‘글로벌 스탠다드’가 강조되는 과학계 풍토와는 거리가 있는 접근이라는 것이다.

‘세계줄기세포 허브’까지 출범한 마당에 한국적 사정만 강변하는 안이한 인식으로는 국제적 연구 공조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인식이다.

녹색연합, 환경운동연합, 시민과학센터, 대한 YMCA연합회 등 12개 시민단체의 모임인 ‘생명공학감시연대’는 “복지부의 발표는 상식 이하의 이야기”라며 한국 과학의 선진 국제화를 위해 매를 맞을 건 맞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 이들 단체는 “사회 일각에서 왜곡된 국익론과 결과 지상주의가 제기되는 것을 우려한다”며 “진실을 명백히 밝히는 것만이 우리 생명과학계가 국제적인 고립과 비난을 피하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또 시민단체들은 “2004년 사이언스에 발표된 논문에 공동 저자로 이름이 올라 있는 청와대 박기영 정보과학기술보좌관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사퇴를 촉구했다.

단체들은 “박 보좌관은 생명윤리 논란이 일자 조언했다고 주장했다”며 “이제 황 교수 연구과정의 윤리 문제가 밝혀지는 상황에서 ‘몰랐다’고 말을 바꾼다면 별 기여도 없이 공동 저자가 됐다는 점을 자인하는 것 밖에 안 된다”고 지적했다.

"과학엔 국경이 없다"

황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네이처의 문제제기가 나왔을 때 연구원은 물론 나 역시 연구원의 난자 기증이 윤리적으로 어긋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또 “헬싱키 선언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고까지 했다. 인간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과학적 미래와 윤리적 불안을 함께 불러 일으키는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성격의 것이다.

이번 사태는 국내 과학계가 세계의 선두주자라는 사실에 도취돼 얼마나 국제적 생명과학 윤리기준에 둔감했는지를 반증한다.

황 교수가 자주 인용한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은 있다”는 파스퇴르의 말은 이제 “과학자에게 조국은 있어도 과학엔 국경이 없다”는 것으로 당분간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황 교수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순수 과학자의 길을 걷겠다”고 밝혔다. 그의 이러한 다짐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것은 비단 한국인 뿐은 아닐 것이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