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열린 '육지 속 섬'…활발한 스포츠 마케팅·문화예술도시 조성 등으로 지역발전 견인

두메산골 강원도 양구(楊口)가 변하고 있다. 국토의 정중앙에 자리잡은 이 곳은 군사분계선과 해발 1,000m를 훌쩍 넘는 사명산, 동화산, 대암산 등으로 둘러싸여 ‘육지 속의 외로운 섬’으로 불리던 곳이다.

최근 양구가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난 대설(大雪ㆍ12월7일)에 양구를 찾았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군복 차림의 장병들. 그리고 이들을 위한 군인용품점이었다. 버스 터미널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매점 하나도 양구 버스터미널에는 없었다.

대신 명찰, 장갑, 목도리, 라이터, 벨트 등을 판다는 내용의 간판과 그 물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읍내의 분식점, 슈퍼마켓 등 많은 시설들도 군복으로 가득찼다.

이처럼 군인들을 빼놓고 양구를 얘기할 수 없는 것도 양구의 특징이다. 2만2,000명을 약간 웃도는 양구 군민과 맞먹는 수의 군인들이 양구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군인들을 상대로 한 숙박업소와 음식점이 주된 상업 형태다. 을지전망대, 양구전쟁기념관, 제4땅굴, 펀치볼 등 널리 알려진 관광지가 더러 있지만 ‘군사도시’라는 색깔만 짙게 할뿐, 양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육지 속의 섬이라는 별칭에서 직감할 수 있듯 양구 발전의 걸림돌은 열악한 접근성이었다.

30~40분 걸리던 춘천~양구 길이 70년대 중반 소양댐이 생기면서 두 배 이상 늘었고, 이 때문에 눈이 날리기라도 하면 고개를 구불구불 넘던 도로(46번국도)마저 통제돼 양구는 그야말로 ‘육지 속의 섬’으로 변했다.

이런 양구가 과연 무엇으로 전에 없던 생기를 되찾고 있다는 것일까. 터미널 인근의 한 약국에서 만난 노인의 짧은 말 한 마디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좁은 양구에 무슨 무슨 체육 대회가 끊길 날이 없어.”

'작지만 강한 양구'로 거듭나기

각종 체육 대회를 유치해 투자효과를 내는 이른바, 스포츠 마케팅으로 활기를 불어 넣고 있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양구가 올 초부터 12월7일까지 유치해서 연 외부 행사만도 24개에 이른다.

FIFA에서 공인받은 인조잔디 축구장.

대회의 규모도 최소가 ‘도단위 대회’다. 양구를 찾은 이 날도 ‘제 45회 대통령배 전국 펜싱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유치해 내는 종목도 다양하다.

펜싱 외에도 빙상경기, 축구, 테니스, 보디빌딩, 역도, 태권도, 탁구, 마라톤, 유도, 검도 등등 산골 마을에서 열리는 경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양구로 들어오는 길에 본 듯한 홍보간판, ‘작지만 강한 양구’가 떠올랐다.

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FIFA의 공인을 받은 인조잔디 축구장을 비롯 4곳의 천연ㆍ인조잔디구장과 실내체육관 6개, 테니스장 11개, 실내외수영장 2개, 실내게이트볼장, 궁도장, 역도 경기장, 풋살(미니축구) 구장 등을 갖춘 종합경기장과 보조 경기장으로 다양한 체육대회를 소화해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다. 프로축구, 빙상, 유도, 역도 등의 종목에서 32개팀 5,300여명의 전지훈련팀을 유치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같은 시설을 바탕으로 양구는 2006년에 매머드급 국제대회인 아시아클럽대항 역도대회와 도민체전을 유치해 놓고 있다.

도민체전처럼 단일 종목의 경기가 아닌 여러 종목의 경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종합체전을 군단위의 지자체가 유치한 일은 강원도에서 유래 없는 일이다.

지금껏 춘천과 원주 등 강원도 시단위 지자체들이 돌아가면서 치르던 행사를 양구가 유치한 일과, 양구 군민의 수보다 많은 2만5,000여명(연인원)이 경기에 동원되는 경기를 유치한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 해 강원도민생활체육대회를 유치해 성공적으로 치른 바 있는 양구는 내년 도민체전을 통해 지역발전을 8년 정도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수근 미술관 등 다양한 문화시설

양구는 체육대회를 통해서만 활기를 띠게 된 것은 아니었다. ‘군사 도시’에서 오는 삭막한 이미지를 다양한 문화예술 시설들로 상쇄시키고, 양구의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2002년에 문을 연 박수근미술관이다. 양구군 정림리에서 태어난 박수근 화백의 생가가 있던 곳에 200여평 규모로 세워진 박물관은 자체의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2002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초대되기도 한 작품이다.

박수근 미술관

미술관 뒤의 동산에는 박 화백과 그의 부인이 잠들어 있다.

박수근미술관 옆에는 지난 11월 예술인마을도 문을 열어 이 같은 분위기에 힘을 실었다. 외부의 예술인들에게 공방을 제공하고 그들을 한데 모음으로써 양구를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거듭나게 하자는 취지다.

3,000여평의 부지 위에 지상 2층 규모로 건립된 예술인마을은 작업 공방은 물론 자체적인 기획 전시실을 갖춰 지역의 대표 문화공간으로 자리잡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이 밖에도 국내 최초의 선사박물관, 향토사료관, 민속자료관, 박제박물관 등도 여느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시설들이다. 하지만 양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천문대와 연계한 지구과학관과 방산자기박물관도 건립 중에 있다.

양구 방산면에서 나는 백토는 경기도 광주의 도공들이 만들어 왕실에 바치던 백자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자기박물관은 백자문화를 꽃피게 했던 양구 방산의 백토를 알리고, 자기박물관과 연계한 가마터체험장을 통해서 교육공간으로 거듭난다는 계획이다.

다른 지자체들이 기업들을 유치해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때 양구는 구경만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날이 있었다. 첩첩 산중에 싸인 양구에 시선 한번 주는 기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구는 이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기지를 보였다. 굴뚝 하나 없는 양구를 생태관광단지로 조성한다는 전략이었다.

청정환경 이용해 소득증대

생태관광단지 사업은 양구군이 야심차게 추진 중인 일로 그 핵심에 파로호상류 인공습지조성사업이 있다. 국내에서는 처음이자 최대 규모다.

투입될 총 비용만 183억원에 이르는 이 사업은 저류보를 설치해 물을 가두고 그 속에 수중, 수변 식생대를 조성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양구군은 공사가 마무리되는 2008년이면 생태관광 및 교육장으로 각광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인공으로 조성되는 파로호 인공습지와 달리 대암산 정상의 용늪은 자연 습지로 잘 알려져 있다.

해발 1,300m지점에 위치해 함경북도와 백두산에 이어 3번째 발견된 용늪은 각종 희귀식물이 자생해 자연사박물관으로도 불리는 고층습지다.

1997년 람사협약(국제습지보전협약)에 따리 국제적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이 같은 청정 환경을 소득 증대로 연결짓는 사업도 주민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산채클러스터구축과 산양증식복원센터 설립 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산채클러스트의 경우 2007년까지 10만여평 규모의 대지에 자연산 곰취와 더덕, 고사리를 비롯한 다양한 산채 재배단지를 조성해 주민의 소득을 증대시킨다는 계획이다.

산양증식 복원센터 건립 사업은 민통선 인접지역에 서식하고 있는 산양을 증식, 복원해 교육의 장으로 활용된다.

육지 속의 섬, 양구가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데에는 향상된 접근성을 빼놓을 수 없다.

착공 5년 만에 지난 12월1일 개통된 배후령 터널이 1시간 20분씩 걸리던 춘천~양구간 이동 시간을 50분대로 줄여줬기 때문이다.

2008년과 2009년에도 각각 직선화되고 터널화되면 양구에 더 이상 ‘두메산골’, ‘육지 속의 섬’의 수식어를 붙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