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두터운 장막을 걷어내고 화담과 명월을 현실로 불러내다

최학의 소설을 읽으려면 담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첫 문장을 읽고 ‘나는 곰곰이 중국 대륙 어느 한 곳에서 담배를 입에 문 작가의 표정을 떠올린다’는 독자의 글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최근 출간된 서경덕과 황진이의 사랑을 그린 ‘화담명월’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연초 금연 계획에 들어간 이들에겐 다소 위험할 수도 있다.

“창밖의 무성한 녹나무 이파리들을 벗 삼아 조선조 중기의 한 탁월한 사상가에게 차를 권하고 담배를 나눠 피며 더불어 사랑 이야기까지 듣는” 작가의 상상으로 떠나는 여정은 “더불어 흥겹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소설을 읽다 보니 어느새 중국 베이웨이루에 있는 한 대학 외국인 교수 숙사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강의실과 술집, 슈퍼를 왔다 갔다 하며 한달 동안 썼다는 화담명월.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비로소 고전명작을 읽고 난 후의 묘한 기분과 일치했다. 우린 한 동안 조선조 중기로 여행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화담명월’(나남)은 지금까지 알려진 서경덕과 황진이에 대한 판에 박힌 이야기와는 다르다.

황진이가 파계시켰다고 알려진 고승 지족 선사에 관한 전설도 금욕적인 군자의 사표(師表)로 신화화 된 서경덕도, 천기로 태어나 조선의 견고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흔들었다는 황진이에 대한 전설도 그의 소설 ‘화담명월’ 앞에서 낱낱이 벗겨진다.

작가의 상상 속 이야기에 빠져 있노라면 어느새 그들의 실체가 진실이라고 믿기 십상이다. 소설가 최학은 이렇게 해명한다.

“역사소설은 역사에 박제돼 있는 인물과 사건에 대해 혈액을 공급하고 체온을 부여하는 일이죠. 역사에는 역사가의 해석만 있을 뿐 역사의 진실이란 없습니다. 역사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기술과 또 다른 방식의 역사 해석법인 것이죠.”

육체적 사랑과 거리가 멀다고 알려진 서경덕은 황진이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고 면벽수도 했다는 지족선사는 사실 35살의 난봉꾼에 예사 한량일 뿐이다.

총 16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서경덕의 제자 서기(徐起)와 여인(서경덕의 둘째 부인)이 과거 행로를 더듬으며 펼쳐지는 사후 이야기와 서경덕 살아 생전 현재 시간을 통해 당시의 정치상황과 화담의 철학적 이념이 그려진다.

소설은 인간 서경덕과 황진이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마침내 전설의 장막을 걷어낸다. 희노애락애오욕의 감정들을 화담의 철학적 담론과 연결시켜 인간 본성과 천지 조화의 도, 그리고 성과 사랑의 본성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소설가 최학은 말한다.

그는 왜 조선조 최고의 기 철학자 화담 서경덕에게 눈길을 돌렸을까.

“선조시대 동서당쟁과 퇴계, 율곡 등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대립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장편을 만든다는 꿈은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죠. 화담 서경덕은 진작부터 그 전초 작업이라고 여겼죠. 자청해서 역사상 인물 중 서경덕을 골랐죠. 서경덕이야 말로 기호학파의 원조니까요.”

기호학파 대립 다룬 역사소설 계획

그는 앞으로 기호학파의 대립문제를 다룬 역사 소설을 쓸 계획이다. 그렇기에 서경덕의 삶이 녹아든 ‘화담명월’을 써야만 했다. ‘화담명월’을 쓰는 동안 그는 그 동안 알지 못했던 바에 대한 공부도 적지 않았다.

“서경덕은 서북풍(西北風)보다 빨랐지요. 중국이 아니고 국내에서 썼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국에 간 보람을 이런 데서 갖는 거 같아요.”

소설가 최학을 중견작가라 부르는 것은 올해로 ‘소설장이 생활’ 33년째이기 때문이다. 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공모에서 ‘폐광(廢鑛)’이 당선된 후 소설은 언제나 그와 함께 했다.

“그 당시 신문에 실린 소설을 읽은 독자들에게 팬레터를 받았는데 대개 제목을 발광이라고 읽었죠.” 단편 폐광 이후 그는 6년 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한다. 역사소설 ‘서북풍(西北風)’이다.

“74년 대학졸업 후 골방에서 쓴 장편 소설 ‘동강(冬江)’이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최종심까지 올라갔다 떨어진 기억이 있어요. 79년에 재도전해서 당선이 되었죠.”

79년 당시 한국일보가 당선 고료를 사상 최고인 1,000만원으로 올린 해였다. 서북풍 당선 이후 그는 인기작가로 유명세를 얻었기에 그 당시를 자세히 기억해 낸다.

“서북풍을 쓸 때는 하루 4,50장의 작업을 했죠. 2,500장을 쓰는데 6개월이 걸렸어요. 신촌의 와우 아파트 단칸방에서 박박 울어대는 어린애를 발로 밀쳐 내 가며 원고를 썼죠. 마감 날짜 이틀을 넘겨 간신히 2,500장의 서북풍을 탈고해서 급히 신문사에 갖다 주었죠. 마감을 넘겼기에 조마조마했는데, 한해가 다 갈 무렵 문화부 우계숙 기자에게 당선의 반가운 소식을 받았죠. 상금도 받기도 전에 이곳 저곳에서 고마운 이들을 찾아다니며 한턱내기에 바쁜 시절이었죠.”

서북풍은 80년 1월1일부터 한국일보에 연재되었고 그는 원고 청탁에 분주한 생활을 한다.

“여기 주간한국에도 ‘골목 하나 사이’ 라는 소설을 청탁을 받아 실었었죠.”

와우 아파트에서 화곡동 단독주택으로 이사해 난생 처음 대문 기둥에 문패를 달게 되었고 화단 구석에다 오리 두 마리도 키우며 꿈에 그리던 전업 작가 생활을 했다. 장편 소설 ‘안개울음’을 쓸 때는 팔공산 환성사에 두 달 동안 기거하기도 했고 함께 전업 작가였던 소설가 박범신, 박양호와 어울려 낚시를 다니기도 했다. 전업 작가 생활을 즐기기엔 더없이 따분해질 쯤이었다.

“대전 동아학원(현 우송학원)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죠. 대학교수가 돼 보지 않겠냐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어요.”

그가 서울을 떠난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삿짐은 그 당시 친한 문우들이 도와 서울 떠나는 행사를 조촐하게 갖기도 했다.

서울에서 전업 작가 생활을 하며 인기 작가로 유명세를 치르다 어느 날 지방대 교수가 되어 중심에서 벗어난 기분이 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젓는다.

모교인 고대 대학원에 진학해 선배 소설가 송하춘 선생을 지도교수로 두고 학생과 선생 노릇을 하며 살았고, 그 사이사이 문학지나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며 나름대로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서울에 있는 문우들이 한참 그리울 때였죠. 문예창작과가 생기자 창작특강을 개설해 매학기 소설가, 시인 2명씩 불러 대전에 내려와 강의하게 했어요. 친했던 문우나 선후배들을 불러 그들과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죠.”

정진규, 조정권, 최승자, 안도현, 이진명, 나희덕 등의 시인과 윤흥길, 윤후명, 박덕규, 박상우, 작고한 김소진까지 유명한 문인들이 소설가 최학을 만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와 특강을 하고 그와 술을 마셨다.

중국 체류 1년, 활발한 글쓰기

2004년 가을, 그는 잠시 고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중국 남경 소재 효장 대학의 한국어 교육을 위해 출국해 일년 동안 체류하면서 그 동안 밀린 숙제 같던 일을 해낸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의 위촉을 받아 쓴 ‘한국고속철도건설사’와 우송대학교 창립을 맞아 쓴 ‘우성 50년사’, 게다가 모교인 양정고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아 ‘양정100년사’의 현대사 편까지 모두 중국에서 탈고했다.

올해 출간될 계획인 ‘시와 함께 하는 우리나라 산하기행’도 그 중 하나다. 너무 많은 글을 쓴 탓인지 ‘손목터널증후군’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좋아하던 등산도 하지 않았다. 소설 ‘화담명월’도 그때 탈고했다. 한 달 걸렸다.

“30년 넘게 소설장이 생활을 해 왔지만 탈고 때의 기분은 언제나 기묘해요. 예사의 산문과 소설이 전혀 별개임은 이런 기분에서 확인되죠. 벅찬 감개가 있는가 하면 허망, 허탈에 몸서리치기도 하니까요. 자긍심과 참괴감, 쾌감과 자조가 범벅되죠.”

이어 그는 말한다.

“소설작업은 세상의 가운데로 파고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되레 세상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작업이지요. 세상의 물결에 굳건히 발 담그고 있는 이들은 이 따위 걸 쓰지도 읽지도 않죠. 지극한 소수들, 세상 물결에서 떠밀려 나와 있는 이들, 그 고단한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만 이를 어루만지면서 홀로 한숨짓고 홀로 신명을 내죠.”

그 또한 그 때문에 소설을 쓰고 있음을 짐작할 만하다.

"중국 운남성에 있는 대리란 곳에서 소설을 쓸 계획이에요. 그곳은 사시사철 봄처럼 따뜻한 곳이죠. 친한 친구들과 거기서 보낼 노후 계획도 다 세워놨어요.”

전설로 화석화된 화담과 명월의 이야기를 현실로 불러들인 소설가 최학은 그들의 숨겨진 비밀을 찾았지만 재미는 어디까지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고 말한다.

중국의 대리는 소설가 최학의 마음속 유토피아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봄처럼 따뜻한 그곳에서 쓰여 질 화담명월 이후의 역사소설이 진작부터 그리워지는 건 그 때문이다.


객원기자 comety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