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에 시를 노래하던 예술가들의 '마음의 고향'

광화문엔 오래된 ‘섬’ 하나가 있다.

1982년부터 20년 넘게 피맛골의 명물로 자리 잡았던 시인통신은 마음이 외로운 사람이 찾아가는 섬이다.

그 허름하고 좁은 골목길을 기억하는가. 초입에 팁 4만원이라고 쓰인 단란주점 네온 간판이 골목을 더 쓸쓸하게 만들어 주던 곳.

취객들이 잠시 실례해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침침한 분위기.

그런 광경이 더없이 낯익어 보이던 스산한 골목길. 그 품 안에는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던 작고 낡은 나무 문패가 있었다. 목로주점 같던 ‘詩人通信’.

문인들의 영원한 누님

암울했던 80년대엔 세상의 거친 물결과 싸우던 ‘젊은 피’의 집합소이기도 했고 돈 없고 빽 없는 하지만 혈기와 정신만은 살아 있는 문학청년들이 제 집 드나들듯 찾아와 밥 먹듯 술 얻어먹고 택시비까지 빌려가던 곳.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되어 한숨 쉬고 더불어 꿈꾸고 노래 부르던 곳. 누군가 서명을 하면 이유도 묻지 않고 믿고 따라할 수 있는 유일한 곳.

‘피맛골 살리기 서명운동’을 펼친 서민들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청진동 일대 재개발 물결에 떠밀려 손도 못쓰고 종적을 감춘 시인통신.

“세월이 변해도 여기만큼은 변하지 않는 고향 같은 곳이길 바랐죠.”

변하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늘 그 자리, 거기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 피맛골의 시인통신 지킴이 한귀남.

‘지하 문화계의 대모’, ‘문인들의 영원한 누님’, ‘한 여사’라 불리는 시인 통신의 주인장 한귀남씨는 반갑다는 듯 명함 한 장을 건넨다.

“하소연하던 것도 엊그제 일인 것 같은데. 할 수 없이 인사동으로 떠밀려 갔다가 여긴 아니다 싶어, 고향 그리워 다시 왔죠.”

3주도 채 안 지났다. 청진동에 두절된 시인통신이 정겹게 재개됐다. 청진동 해장국집 옆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오른 편에 신진장이 보인다.

옆 골목으로 꺾어 몇 발짝만 가면 ‘피맛골의 시인통신-예술의 광장’을 찾을 수 있다.

주인장이 고향 운운하지 않아도 사라진 시인통신을 발견했을 때는 윗세대에겐 고향집을 찾은 기분이겠지만 아랫세대에겐 외갓집 문 앞에 다다른 손주의 마음이다.

한씨는 피맛골이 그리워 다시 왔다. 하루라도 피맛골 근처에서 터 잡고 살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다. 인사동엔 더 이상 정붙이기 힘들었다.

예전의 인사동이 아니기에 재미 없었다. 그러다보니 몸도 고장 나고 마음마저 안 좋았다. 실연당한 사람마냥.

“피맛골 시인 통신을 기억하는 단 한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선 내가 추스르고 일어나야지 생각했어요. 외상하고 가던 사람들마저 그리울 무렵이었죠.”

한씨는 스스로 ‘만인의 누님’을 자청했다. 옮겨온 청진동도 재개발 벨트 안에서 자유롭진 못하다. 하지만 아직 자리를 지키고 사람을 맞이할 여유는 있다.

“옮긴 지 얼마 안돼서 내부를 정리하는 중이예요. 소문도 안내고 훌쩍 왔으니까. 용케 알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그럴 땐 오랫동안 집 나간 가족 맞이할 때의 기분이죠. 새우가 고래 되듯 드나들던 문청들은 지금 시인, 소설가가 되었고, 세상과 싸우던 그분들은 이미 요직에 있죠. 금배지 단 사람이 일곱은 넘는데요.”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이나 민주당의 김영환 의원 등 정치인도 여럿 있다.

구인환, 김병총, 마광수, 박경리, 박완서, 송영, 윤후명, 윤병로, 이외수, 전상국, 최학 등의 문인과 화가 강찬모, 개그맨 전유성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예술가와 문인, 언론인, 방송인들이 시인통신의 단골이다.

문을 밀고 들어가면 그들은 인생을 논하고 감성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 된다.

“젊은 시절 외상만 하던 사람이 살만해져서 밀린 월세도 주고 가고 그러죠. 그러지 말라고 해도 아들한테 밀린 외상값이라고 하면서 몰래 쥐어주고 가니까. 훈훈한 옛정이 여기선 그대로 살아나죠. 그러니 추억은 힘이 있는 거예요.”

낙서와 사진은 '추억의 힘'

시인통신 벽에 빼곡하게 차지한 단골들의 사진은 ‘추억의 힘’을 말해주고 있다.

예전의 청년들은 어느새 나이가 들어 희끗희끗해진 머리로 시인 통신의 문을 밀고 들어오지만 들어온 순간은 과거의 풋풋한 모습 그대로다.

추억을 노래할 때만큼은 나이든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한씨는 말한다. 한쪽 벽에 세워진 통기타와 빛바랜 월간지와 이론서,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벽의 낙서도 시인통신만의 것이다.

“지금 쓴 낙서가 훗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명문이 될 수 있으니까” 하며 단골들에겐 낙서할 수 있도록 화선지와 붓을 건네기도 한다.

시인통신의 추억의 힘은 낙서들이다. 언젠가 다시 붙일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이사 올 때 낙서들을 전부 뜯어와 보관중이다.

낙서 하나 하나는 전시회를 해도 될 만한 양이며 그 자체가 한편의 시다.

시인통신의 주인장 한씨도 시인이자 소설가다. 93년 문학계간지 포스트모던에 ‘나의 토방’ 외 4편의 시로 문단에 등단하고 2000년엔 지구문학을 통해 ‘피맛골에 부는 바람’으로 소설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95년도엔 시인통신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소재로 ‘간 큰 남자 길들이기’라는 수필집도 냈다. 학창시절 30년 넘게 소망하던 문학 소녀의 꿈을 뒤늦게나마 이룬 셈이다.

“피맛골과 함께 한 지 20년이 넘었으니 내 청춘, 내 삶이 고스란히 여기 묻어 있죠. 작품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요. 제 삶 자체가 소설이고 시죠.”

지금의 시인통신은 설치 미술가의 작품 같았던 피맛골의 2층짜리 목조 건물의 운치는 나지 않는다.

“자리가 비좁아 모르는 사람끼리 엉덩이 붙이고 앉아 삐걱거리는 의자에서 인생을 논하고 삶을 이야기하던 그런 운치는 지금 사라진 지 몰라도 마음까지 변한 건 아니죠. 옮기면서 생각이 바뀐 건 사실이예요.”

청진동 시인통신은 예전보다 깔끔해졌다. 방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조금 더 편하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

“여기 오는 단골들이 언제부턴가 제자나 후배들을 데리고 왔죠. 분위기를 바꾼 건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장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죠. 그 사람들의 영역도 인정해 줘야 하니까요. 또 나이 드니까 삐걱거리는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게 이젠 힘들더라구요. 함께 늙어가는 사람들을 조금 편하게 해 주고 싶었어요. 병이 나서 술 못 드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럴 땐 맘이 아프죠. 대신 안주를 넉넉하게 만들어요.”

예전보다 메뉴도 늘렸다. 술 못 마시는 단골을 위해 차나 식사를 대접할 수 있도록 바꾸었다. 지친 사람들이 찾아오면 편히 쉬어 갈수 있는 안방 같은 곳이길 바란다고. 추억은 고스란히 맘속에 있는 거라고 말한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공간

선생님을 따라 오던 제자는 이젠 시인통신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선배를 따라오던 후배는 동문회 모임을 시인통신에서 갖는다.

과거의 아우라는 가슴에 간직한 채 시인통신은 이제 아랫세대가 채워 나가야 할 문화공간이 되었다.

한씨의 막내아들 윤석호씨가 어머니의 대를 이어 시인통신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것처럼 시인통신은 이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곳이 되었다.

“재개발 물결이 오면 또 떠밀려 가겠지만 오늘 만큼은 굳건히 버티며 과거의 아우라를 유지해야죠. 내가 누군가요. 영원한 누님, 지하 문화계의 대모인데. 늘 그 자리에 있는 고향이 여긴데.”

세상으로부터 외면 당해도 거기만 가면 등을 토닥여 줄 것만 같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을 때 문 두드리고 싶은 곳. 시인통신은 그렇게 도시의 유일한 섬, 지상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들이 떠밀려와 꿈꿀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추억의 힘을 믿고 다시 그 ‘섬’에 가고 싶다. 2006년 세상이 골목이 될 지라도.


객원기자 cometyo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