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품과 법도로 '전통'의 맥 잇는다

경북 상주(尙州)시는 예로부터 비옥한 토양에 온난한 기후가 더해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고을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경상도를 대표하는 도시로 신라 고도 경주와 쌍벽을 이뤘다.

전국이 8도 체제로 정비된 태종 13년(1413년)에는 경상 감영(監營)이 설치되기도 하는 등 경상도의 정치, 경제, 군사 거점 도시로 수백 년 동안 위상을 이어왔다.

역사가 깊은 고을은 그곳에 터전을 잡고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한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집안의 사람들은 온갖 세파에도 그 전통과 자부심을 쉽사리 내던지는 법 없이 꿋꿋하게 지켜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영동고속도로 경기 여주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내닫는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따라 1시간여 하행하다 보면 상주터널을 통과하기 직전 오른쪽으로 널따랗게 펼쳐진 평야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고려시대 이후부터 조선 말기까지 수많은 정승과 관리들을 배출한 명문가 풍양 조씨(豊壤 趙氏) 가문의 발자취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아니, 발자취뿐 아니라 그들의 숨결이 여전히 맥동함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풍양 조씨 종가(宗家)를 면면히 이어가고 있는 종손(宗孫)과 종부(宗婦)의 노력 덕택에 가능한 일이다.

400년을 이어온 종택 ‘오작당’

풍양 조씨 종택 오작당 창건 400주년 기념비

지난 17일 마치 봄볕처럼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오후, 기자는 풍양 조씨 입재공파 종택(宗宅)을 찾았다.

몇 집 살지 않는 시골 마을을 물어 물어 가는 길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아는 14대 종손 조정희(73)씨는 일찌감치 집 밖에 나와서 기다리다 반갑게 맞아주었다.

잘 여며 차려 입은 한복 매무새와 금테 안경 너머로 비치는 힘 있는 눈빛, 노령이 느껴지지 않는 꼿꼿하고 반듯한 걸음걸이. 조씨의 첫 인상에는 노(老)종손의 기품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조씨가 부인 채춘식(70)씨와 함께 살고 있는 종택에는 ‘깨닫고 뉘우치는 집’을 뜻하는 ‘오작당’(悟昨堂)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빛 바랜 기왓장과 나무 골조로 봐서 꽤 오래된 한옥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오작당은 무려 400여년 전에 지어졌다.

“11대조 할아버지께서 오작당이라는 이름을 붙이셨죠. 지난 2001년에는 창건 400주년을 맞아 기념식도 치렀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여기 살다가 성장한 뒤에는 대구에 나가 사업을 하면서 잠시 고향을 떠났죠. 10여년 전 종손이셨던 선친께서 돌아가신 뒤 그 역할을 물려 받기 위해 돌아와 살고 있습니다.”

조씨의 명함 뒷면에는 오작당 창건400주년 기념식 사진이 실려 있는데, 그가 종손으로서 종택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작당은 원래 안채와 바깥채 등 모두 40여 칸의 대규모 전통 한옥이었으나 지금은 안채, 사랑채, 사당 등 3동만 단출하게 남아 있다. 정부는 오작당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해 1982년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32호로 지정하기도 했다.

종손, 종부의 가문 위한 절대 희생

종손과 종부는 자신의 삶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손은 태어날 때부터, 종부는 시집을 가기로 마음 먹었을 때부터 오로지 종가만을 위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래서인지 종손과 종부에게는 여느 사람들에게서 보기 힘든 특별함이 있다. 한 가문을 아우르고 떠받치는 중심으로서의 책임감, 사명감, 희생정신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저절로 배어나는 풍모와 자태가 그것이다.

“옛날에는 종손의 권위가 집안에서는 왕과 같았죠. 모든 친족들이 종손의 한 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권위가 과거 같지 않아요. 게다가 자신의 가족을 챙기고 종택을 관리하는 일만도 여간 버거운 게 아니죠. 그럼에도 종손으로서 종가를 꾸려나가는 것은 주어진 의무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달라졌지만 종손의 사명은 달라질 수 없다는 조씨의 말을 경청하는 동안 어느 순간 점심상이 사랑채로 들어왔다.

풍양 조씨 종손 조정희씨와 종부 채춘식씨

종부 채씨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들이 간소하지만 먹음직스레 보였다.

종부에게 감사의 뜻을 건네려던 차에 조씨가 짐짓 말을 가로챘다.

“종손과 종부에게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ㆍ조상을 모시고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저의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도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손님이 찾아오면 당신은 굶을지언정 꼭 대접을 하시곤 했습니다.”

조씨의 말처럼 봉제사 접빈객은 명문 종가의 종부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무이면서도 버거운 일이었다.

종부 채씨는 지금도 4대(代) 여덟 분의 제사를 모실 뿐만 아니라 사당에 따로 모신 불천위(不遷位ㆍ나라에 기여한 큰 공적으로 사당에 영구히 모시기를 나라로부터 허락 받은 신위) 조상들에게 봄, 가을로 두 차례 제사를 올리고 있다.

게다가 설, 추석 명절 차례상까지 보태면 노(老)종부의 고달픔이 얼마나 클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씨와 채씨는 양가의 선대 어르신들이 맺어준 인연이다. 채씨는 그저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시집 와서 묵묵히 종부의 길을 걷고 있을 따름이다.

허나 요즘 시대에 어떤 부모가 선뜻 딸자식을 고생길이 훤한 종가 맏며느리로 시집을 보낼 것이며, 어느 처녀가 종손과 백년가약을 쉽사리 맺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조씨는 맏며느리를 맞아들였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허허 웃는다.

“며느리는 제 아들에게 시댁이 종가라는 사실을 대충 듣고 시집을 왔다고 합디다. 그런데 나중에 하는 말이 ‘이런 정도의 종가인 줄 알았으면 시집을 안 올 건데’ 하더군요.”

달라진 세상, 적응하는 종가

다소 무뚝뚝하고 권위적일 것 같은 조씨이지만 아내와 며느리를 배려하는 속내는 따스하다. 아울러 종손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자세를 견지하되 융통성도 지녔다.

“제사나 명절 차례상을 준비할 때 며느리를 부를 수도 있지만 도시 생활을 하며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학부모가 얼마나 바쁘고 근심이 많을까 싶어 안 부릅니다. 그렇지만 아내가 힘겹게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자면 참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까닭에 조씨는 조상들의 예법을 유지하면서도 제례나 상례 등 각종 집안 행사를 간소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대대로 전해져 오는 조상들의 유품이나 교지(관리 임명장), 서간(편지) 등 가보들도 후손들의 보존 부담을 좀 덜자는 뜻에서 관계 기관에 기탁했다.

하지만 가슴 한 구석 섭섭하고 답답한 마음이 왜 없을까.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으려는 세상이 되다 보니 종손이라는 존재도 서서히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조상을 등한시하고 전통을 계승할 사람이 없어지는 마당에 종가의 맥이 끊길 위기도 당연히 오지 않겠습니까.”

조씨는 종손의 역할이 차(次)종손인 장남(45)까지는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지만 차차종손인 장손(19) 대에는 좀 어렵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현실적으로 세상의 변천을 막을 도리가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앞두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정을 나누며 종가에 며칠째 머무르는 장손을 보니 조씨의 걱정이 기우에 그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집안의 전통은 쉽게 만들어지지도, 쉽게 허물어지지도 않는 것이기에.

풍양 조씨, 조선 후기 안동김씨와 쌍벽이룬 세도가

풍양 조씨의 발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이 풍양현이었기 때문에 풍양 조씨로 불린다.

시조 조맹(趙孟)은 인근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은자였는데, 나이 70세 때 고려 태조 왕건의 눈에 띄어 남쪽 정벌에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는 등 여러 차례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됐다. 이후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풍양 조씨 가문이 더욱 크게 번성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정승 7명을 비롯해 수많은 문무 백관을 배출했을 뿐더러 왕비도 2명이나 나왔다.

영조, 정조 시대에 집안의 세력을 크게 확장한 풍양 조씨는 조선 후기에는 안동 김씨와 쌍벽을 이루는 세도가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도 풍양 조씨 출신의 인재들이 각계 각층에서 활약 중인데, 이 가문에서 배출된 유명 인사로는 조순 전 부총리와 천재 바둑기사 조치훈씨 등을 들 수 있다.

풍양 조씨 문중은 후손들에 대한 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집안의 중고생,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상주 낙동면 오작당 인근의 고택 양진당에서 매년 여름 개최하는 ‘풍양 조씨 뿌리 교육’이 대표적인 사례다.

20년 이상 이어져온 이 행사를 통해 가문의 전통과 자긍심이 제고됐을 뿐 아니라 많은 인재들도 양성되고 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