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속승진 유보한 경찰공무원법 재개정으로 불만 폭발

“경찰 생활 25년째다. 정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승진은 기대하지 않는다. 경위로 승진하면 퇴직금이든 연금이든 혜택을 볼 텐데 아이들(대학생) 학비가 걱정된다.”

경기도 신도시의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이모(54) 경사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경찰공무원법(경공법) 개정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이 경사가 경사 계급을 단 것은 1995년으로 벌써 11년째이지만 눈 앞의 경위 승진은 스스로 ‘남 얘기’라고 말한다. 정년을 앞둔 ‘퇴물’에게 누가 관심을 가지겠냐는 것이다.

서울 외곽의 경찰서에 근무하는 최모(50) 경위는 더욱 신랄했다. “빽이든, 돈이든 하나라도 없으면 승진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최 경위는 경사에서 경위로 승진한 지 10년으로 경감 승진을 앞두고 있지만 매우 비관적이다. “현행 경찰 승진제도에선 경찰대 출신이 아닌 이상 나 같은 사람은 사실상 승진이 봉쇄돼 있다.”

그에 따르면 경찰 승진은 심사, 시험, 근속 승진으로 구분되는데 심사ㆍ시험 승진은 처음부터 젊은 간부들에게 밀리기 때문에 근속승진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인사권자와의 특별한 인연이나 로비가 없으면 승진이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곧바로 경위로 임관하는 경찰대 출신들이 버티고 있는 한 나이 많은 간부들은 설 자리가 없다”면서 “경감 승진에 4천만원, 경정은 6천만원, 총경은 1억원이라는 소문은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경사와 최 경위는 “지난해 12월 하위직 공무원의 근속승진을 보장한 경공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마지막 기대를 가졌는데 한달 만에 법이 뒤집히는 것을 보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며 한목소리로 울분을 토했다.

하위직 경찰공무원믈의 희망인 ‘근속승진제도’는 91년 경장 근속승진제(순경 8년)를 도입, 94년에는 경사까지(경장 9년) 근속승진이 가능토록 대상범위를 확대했다.

98년부터는 순경에서 경장은 7년, 경장에서 경사는 8년 재직시 근속승진이 가능토록 소요 연수를 각 1년씩 단축했다.

하위직 인사적체, 기형적 인력구조

그러나 근속승진제도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하위직 경찰의 적체 현상은 해소되지 않았다. 2005년 10월 1일 기준으로 경장의 경우 정원이 2만9,605명인데 반해 대상자는 3만1,754명으로 2,149명이 적체됐다.

경사의 경우는 더욱 심해 정원이 1만7,404명인데 반해 대상자는 2배에 가까운 3만4,189명에 달해 1만6,785명이나 적체됐다.

경찰공무원은 경사 이하 하위직이 전체 경찰관의 84.7%, 경위 이하는 94.8%로 거의 대부분의 경찰이 경위 이하로 구성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일반직 공무원의 경우 경사에 해당하는 7급 이하의 비율이 56.8%, 경찰과 조직체계가 비슷한 국세청이 64.7%인 점을 감안하면 경찰은 하위직이 지나치게 많은 기형적 인력구조다. 그만큼 승진적체가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에 따라 순경에서 경감까지 승진하는데 평균 27년 7개월의 장기간이 소요된다. 일반직(국가직) 공무원이 9급에서 6급까지 17년 9개월이 소요되는 것과 비교된다.

일본경찰과 대비할 때 한국 경찰은 경정~경위 점유율은 23.8%나 적은 반면, 경사 이하는 오히려 24.1%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본 경찰은 순사(순경)에서 출발해 경부보(경위)까지 승진하는 경우가 60%대에 이르지만 국내 경찰은 순경 입직자의 68%가 경사 이하로 퇴직, 초급 간부인 경위에도 오르지 못해 “말단으로 들어와 말단으로 퇴직하는” 게 현실이다.

일반직 국가공무원과 비교해도 9급으로 출발해 6급 내지 5급으로 재직중인 일반직 공무원비율이 29%인 반면, 순경 입직자 중 경정ㆍ경감에 이른 경찰공무원은 1.8%에 불과했다. (2005년 10월 기준)

경찰공무원은 또 승진적체로 인해 같은 근무연수의 일반직 공무원에 비해 보수 및 연금 등에서도 많은 불이익을 받고 있다.

공무원 보수표상 순경(67만3,900원) ㆍ경장(73만3,300원)의 기본급은 일반직 9급(61만7,300원)과 8급(70만3,900원)과 비교해 다소 높게 책정됐으나 검찰사무직, 교정 등 공안직 공무원(74만8,500원)보다 는 낮다.

국회는 이러한 하위직 경찰의 승진적체를 해소하고 사기진작을 위해 지난해 12월 열린우리당 최규식 의원이 '순경→경장→경사→경위'의 승진연한을 각각 6-7-8년으로 정하는 경공법 개정안을 의결하였다.

이 안이 본회의에서 가결되면 올해 정년퇴직자를 제외한 경사 5,000여명을 비롯해 모두 2만2,000여명이 근속승진의 혜택을 받게 된다.

순경 출신으로 23년간 근무하고 있는 인천 경찰서의 박모(46) 경사는 “승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평생 한이 풀리는 것 같다”며 개정 경공법에 환영을 나타냈다.

6·7·8년 경공법, 예산 등 문제로 재개정

그러나 이른바 ‘최규식 경공법’은 행정자치부, 총리실의 논의를 거치면서 무더기 승진에 따른 부작용과 예산부담이 250여억원에 이른다는 반론에 막혀 올 1월 말 승진연한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형태로 재개정됐다.

이에 하위직 경찰들은 “오랜 숙원이던 승진문제가 물거품이 됐다”며 즉각 반발했고 청와대와 경찰 수뇌부를 향해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급기야 서울경찰청 특수기동대 소속 송모(39) 경장 등 현직 경찰관 12명이 14일 “정부가 경찰공무원법 재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해 행복추구권과 직업수행의 자유를 침해받았다”며 노무현 대통령을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해 경찰 수뇌부에 충격을 주었다.

.경찰 수뇌부는 문제를 야기한 현직 경찰을 엄중 처벌할 것을 천명했지만 비간부 출신 전·현직 경찰과 그 가족, 시민들이 결성한 무궁화클럽(회장 전경수)이 중심이 돼 이택순 경찰청장 퇴진 등 경찰수뇌부와의 전면전 불사 의지를 밝혔다.

나아가 경찰 고위 간부들이 경공법 재개정안을 외면할 경우 검·경 수사권 조정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경찰 승진제도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찰대의 폐지를 지속적으로 펴나가겠다고 밝혀 경(警)-경(警)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현재 재개정된 경공법은 국회 행정자치위에서 여야 간 눈치보기와 힘겨루기로 확정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근속승진 규정을 경공법과 대통령령 중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와 승진연한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논란의 핵심이다.

과연 경공법이 어떤 모습을 갖출지 경찰 뿐만 아니라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전경수 무궁화클럽 회장 인터뷰

"하위직 승진연한제, 경찰사기 높일 것"

경찰 승진 연한을 규정한 경찰공무원법(경공법) 재개정안을 놓고 정치권과 경찰이 몸살을 앓고 있다.

정치권이 경찰의 눈치를 보느라 꾸물대는 반면 하위직 경찰은 재개정안에 반대를, 수뇌부는 이들의 집단행동을 막는데 안간힘이다.

전·현직 비간부 경찰과 그 가족, 시민, 교수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무궁화클럽’은 이런 와중의 중심에 있다.

2005년 9월에 결성돼 8,000여명의 회원이 모인 무궁화클럽은 하위직 경찰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면서 이것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수사권 조정 반대와 경찰대 폐지에 나서기로 해 파장을 낳고 있다.

13일 국회 앞에서 경공법 재개정안에 반대하는 1인시위를 벌인 전경수(53) 무궁화클럽회장을 만나 경찰 승진제도의 복잡한 속내를 들여다봤다.

전 회장은 1978년 경찰에 입문해 99년 퇴직할 때까지 강력계에서 마약 수사관으로 일했다. 22년 경찰관 생활 동안 1,000여 명의 마약사범을 검거했으며 중앙경찰학교 초대 마약 교관을 지냈다.

91년 한국마약범죄학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있으며 광운대 정보복지대학원 마약범죄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원광디지털대학 약물재활복지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현행 경찰 승진제도의 문제를 무엇이라고 보나.

▲현재 경찰조직은 경사 이하 하위직 경찰이 85%, 경위 이하는 95%나 되는 하위직이 지나치게 많은 기형적 구조를 갖고 있다. 승진 연한도 일반 공무원에 비해 매우 불리하다. 순경으로 입문해 30년을 근속하면 53세 나이에 겨우 경사를 달게 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재직시에는 과중된 업무에다 복지혜택은 형편 없고 범죄자와 맞서는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퇴직 때는 비간부인 경사에서 물러나는게 대부분이어서 연금에서도 차별을 받는다.

- 경찰공무원법을 어떻게 바꾸자는 것인가.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통과된 대로 순경-경장-경사-경위 승진 연한을 각각 6-7-8년으로 법에 명시해 달라는 것이다.

- 그럴 경우 소방ㆍ교정직 공무원과의 형평성이나 예산 증액 등의 문제가 거론된다.

다른 소규모 조직과의 형평성 때문에 대규모 조직이 부당한 대우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합리적 대우를 위해 예산이 증액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 승진 연한 제도에 따르면 일 안하고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자동 승진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무능력자도 승진해 결국 조직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승진 부적격자는 승진 연한 제도가 있어도 탈락하게 된다. 장기적으로 볼 때 요즘 순경의 80% 가량이 대졸 출신인데 승진 연한 제도로 훌륭한 자원이 충원될 수 있다. 또 승진에 연연하지 않게 되면 근무에 전력하게 마련이다.

- 승진 연한 제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수사권 조정에 반대하고 경찰대 폐지를 주장하기로 했는데.

▲수사권 조정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실무 경험이 없는 경찰대나 간부후보생 출신보다는 10년 이상의 실무 경험이 있는 경위ㆍ경감급 베테랑이 수사를 맡아야 한다. 경찰대 출신 간부는 병역과 학비, 승진 등 모든 부분에서 특혜를 누리면서도 경험 많은 실무자들의 승진을 가로막고 있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