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①문충공 藥泉 남구만 10대 종손이 지키는 종택 쓸쓸, 부친 독립 운동으로 종가 터전 잃고 보령시에 정착

자고나면 새 것이 옛 것을 삼켜버리는 첨단 디지털 시대에도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아날로그적 가치가 있다. 바로 자신의 뿌리알기다. 그것은 '내가 어디서 왔는가' 라는 실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전에 집안 어른들은 두꺼운 족보를 펴놓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등으로 올라가며 가문의 내력을 귀에 따갑도록 교육시켰다. 벼슬을 하거나 학문으로 큰 업적을 남긴 문중의 선현에 대해선 특히 상세히 설명했다. 그것은 그 인물들처럼 크게 되라는 바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문중을 알려주고 그 자손들은 모두가 하나라는 핏줄의식을 심어주는데 더 큰 의미를 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뿌리의식은 희미해지고 있다. 깨우쳐줄 집안의 어른들도 줄고 있다. 무엇보다도 초고속인터넷 시대에 웬 고리타분한 옛날 얘기를 하느냐는 젊은 층의 무관심이 팽배해 있다. 과연 뿌리알기는 배척해야 할 구습일까? 또한 실제로 우리는 자신의 성씨의 종손과 종택, 선현에 대해 제대로 알고는 있을까? 주간한국은 뿌리알기의 일환으로 국내 보학 연구의 대가인 서수용 박약회(博約會)간사가 쓰는 '성씨의 원류를 찾아서-종가 기행' 시리즈를 연재한다. / 편집자주

충남 보령시 주산면(珠山面) 금암리에 있는 약천(藥泉) 남구만의 종택을 찾아가는 길은 의외로 쉬웠다. 시원하게 뚫린 서해고속도로를 따라 남으로 달리기를 2시간여. 차 계기판을 보니 서울서 200km, 500리 거리였다.

보령시라는 이정표를 따라 종손이 산다는 주산면 소재지로 들어서니 1970년대 쯤에 단 듯한 색바랜 '영덕상회'라는 간판이 덩그러니 눈에 들어온다. 이 상점의 주인이 바로 문충공(文忠公) 약천 선생의 10대 종손인 남영우(南榮祐, 1934년 만주 출생)씨다.

웬만큼 문중사(門中事)에 정통하더라도 약천 종손이 사는 곳이나 종택의 내력에 대해 아는 이는 드물다. 그저 족보 상에 나온 이름자만을 손가락으로 짚을 뿐이다. 가게 간판만큼이나 세상의 관심에서 밀려난 때문이다.

수더분한 차림새의 73세 종손 남영우씨. 그는 상점 한 켠에 마련된 자그마한 생활 공간에서 객을 맞는다. 아직도 현역으로 팍팍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종택 그리고 종손과는 너무나 판이한 광경 앞에 그저 말문도 막힌다. 우선 족보를 보자고 운을 뗐다. 문충공파(文忠公派) 족보에는 일목요연하게 10대 종손란에 가게 주인의 이름자가 올라 있다.

종손이 사는 곳이 종택이고 종택에는 불천위(不遷位: 큰 공훈으로 나라에서 사당에 모시기를 허락한 신위)를 모시는 사당과 사대 봉사(四代奉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4대에 걸쳐 제사를 받드는 것)를 위한 사당이 별도로 마련돼 있어야 한다.

또 종중을 대표하는 종손은 대를 이어야 하며 봉제사(奉祭祀 : 제사를 모심)와 접빈객(接賓客: 손님을 대접함)의 의무를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종손은 외처(外處)로 오랫동안 나가 있을 때는 위패를 옮겨 모셨고 불천위 제사를 경건히 지냈다.

그런데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일부 명문가는 종택을 버리고 위패조차 땅에 묻고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나라를 떠나기도 했다.

▲ 남구만 묘소

문집에서는 비장감마저 감도는 거국음(去國吟)을 읽을 수도 있다. 안동의 고성 이씨 임청각 종손인 석주 이상룡 선생이 그러했다. 이 경악할 결단은 조상보다 국가와 민족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번에 만난 약천 종손은 그러한 우리의 슬픈 역사 속에서 희생되었고 그 때문에 기구한 인생역정을 걸어왔던 분이다. 이제는 잊혀졌지만 그래도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다.

현 종손의 부친은 상렬(相烈), 조부는 철희((喆熙)다. 종손의 종조부인 중희(重熙, 1873-1945)는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지냈던 애국선열이다.

김좌진 장군과 함께 항일독립 전투에도 참여했지만 자료를 고증받지 못해 서훈에서도 제외되었다가 지난해 광복절 때 비로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 훈장을 받기까지는 종손부(從孫婦)였던 종손 모친의 고증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만주서 태어난 종손 남영우씨

종손 남영우씨는 1934년 중국 만주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다녔고 해방과 더불어 고향인 현재의 용인시 모현면 파담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현국민학교로 전학 와서 우여곡절 끝에 졸업했으나, 여전히 객지를 떠돌던 부친은 거처를 서울로 옮겼다.

서울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집안 사람을 통해 일자리를 구한 부친은 한약 재료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현 종손은 협성고등공민학교(종로구 내자동)에서 야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쳤다. 종손과 종부가 객지에서 고용살이를 하고 그 금쪽 같은 외아들이 낮에는 사환으로, 밤에는 고학으로 학업을 지속하는 고단한 인생 역정이었다.

다시 노력 끝에 종손은 만학으로 명문 선린상고에 입학했으나, 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끝내 학업을 지속하지 못했다. 그 이후 본인의 표현대로는 '무식한 장돌뱅이'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았다.

'돌부처'라는 별호가 있었던 부친은 서울 생활을 접고 다시 종가로 돌아왔으나 얼마 못 가 고향이며 종가 터전 등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조용한 곳을 찾아 약천의 선대 묘소가 있던 현재의 보령 땅에 정착했다.

부친은 욕심도 없고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이었다. 어려서 모친인 동래 정씨에서 들은 바로는, 종가에 시집을 와 보니 제사가 1년에 서른 번도 넘었다고 한다. 가난한 형편에 도저히 감내할 수 없었던 부친은 위패를 모두 땅에 묻고 만주로 떠났다. 종손은 이후 부친이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현재 종손은 불천위 제사에 더러 참사(參祀)하는 일과 부모님 제사와 시사(時祀) 외에는 조부, 증조부, 고조부의 제사는 지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는 유가(儒家)의 상식으로는 놀라운 일이다. 약천의 불천위 제사의 경우도 종중의 결의에 의해 용인에서 ‘대낮’에 지내는데 자신은 반드시 참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저는 제사고 뭐고 잘 몰라요, 집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어요.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이제는 또 나이도 먹었고, 뭐 욕심도 없어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법 없어도 살 순박한 촌로의 솔직한 심정을 숙연하게 들었다.

조선 중기의 대정치가요 학자며 영의정을 지냈고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까지 받았던 약천의 10대 종손과 종택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그간에 그들이 겪었을 회한의 세월이 가슴에 찡하게 와닿는다.

마침 부인이 제주도 여행 중이고 3남 1녀의 자녀들도 모두 성가하여 외처에 살아, 이날따라 종손 남씨는 혼자서 가게를 지키고 있다. 30여 년 해온 일이라 이제는 장사하는데 익숙하다고 한다. 한복 입은 사진 한 장을 달라고 했더니 한복을 입어본 기억이 아득하다며 그냥 지금 모습으로 찍으란다.

처음 나가는 노종손의 모습이라 그대로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등을 떠밀다시피 상의만이라도 양복을 입어달라고 간청했더니 넥타이를 찾는 데만 반나절이다.

종손을 따라 들어선 안방은 협소했고 그 좁은 공간은 지나온 수십 년 세월의 애환을 증언하고 있는 듯하다. ‘2003년 6월 29일 고희연 기념’이라고 적힌 가족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노부부만 사는 시골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집안 사람 중에 유명한 이를 물었더니, 뜻밖에도 유명 개그맨 남희석(1971년 생)이 당질이 된다고 한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확인했더니 남희석의 고향이 충남 보령이었다)

상호를 '영덕'이라고 지은 사유를 물었더니, 자신의 이름자인 영자와 맏아들 이름자인 덕자를 따서 지었다는데, 생각해보니 남씨의 시조 영의공께서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린 곳이 지금의 경북 영덕 축산이라 하니 딱 맞아떨어진 듯하다.

종택이니 종손이니 하는 것에 욕심이 없다지만 대화를 나누는 중에 시조며 약천 선조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자부심이 넘쳐 흘렀다. 종택과 종손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생각하게 한 소중한 만남이었다.

오늘에 있어서 종가와 종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종가 탐방을 하면서 풀어야 할 숙제일 것 같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