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된 이민 규제 강화 법안, 반대 시위 미 전역으로불법 체류자 문제 등은 한인 사회도 타격, 미 정치권도 갈팡질팡

“우리가 미국이다(We are America)”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 주인 논란이 한창이다. 10일 수도 워싱턴의 미 의회 앞 내셔널몰을 비롯, 미국 100여 개 도시에서는 200여 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거리마다 성조기와 함께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의 국기들이 물결을 이뤘고, “우리가 미국이다”는 구호는 스페인어와 영어로 번갈아 들렸다.

이민자들이 ‘인종의 용광로(melting pot)’ 미국 사회의 객이 아닌 주인이라는 선언인 셈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시위를 “잠자는 거인이 깨어난” 사건으로 지적했다.

미 정치권이 논의 중인 이민 규제 강화 법안 반대 시위는 캘리포니아에서 미 전역으로, 라티노에서 중국 한국 등 아시아계, 중동계, 아프리카계로 번져가고 있다. 다음달 1일도 ‘이민자 없는 날’로 정하고 직장 출근 및 학교 출석을 보이콧하는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제2 민권운동의 출발

이번 시위의 주인공은 미국 전체 인구(3억 명)의 13%인 4,000만 명에 달하며 흑인을 제치고 ‘제2의 인구’로 성장한 히스패닉계다.

하지만 1,200만 불법체류자 가운데 20만 명을 차지하는 한인 교민 사회는 물론이고 미국 내 이민사회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50년 전 흑인 민권운동이 미국 사회에 가져온 변화만큼이나 엄청난 변화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위 참가자들도 흑인 민권운동의 아버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을 빌어 ‘우리에게도 꿈이 있다’고 외치며 아메리칸 드림과 민권운동을 절묘하게 결합시켰다.

뉴욕에서는 “이번 시위는 21세기 민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다”, “이번 시위로 미국이 이민자들의 나라인지, 아닌지 판가름날 것이다”같은 구호가 쏟아져 나왔다. 에드워드 케네디(민주ㆍ매사추세츠) 상원의원도 “민권운동의 부활”이라고 평가했다.

이민 문제는 미국의 국가적 난제로 떠올랐다. 지난해 3월 현재 외국 태생의 이민자 3,520만 명 가운데 2000년 1월부터 5년간 미국에 새로 정착한 이민자는 790만 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더욱이 그 중 절반인 370만 명은 불법 체류자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APㆍ입소스가 9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이민 문제’라고 답한 사람은 13%. 1월 조사에 비하면 무려 4배나 늘었다. 반(反) 이민정서도 널리 퍼져있다.

불법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에 득이 된다고 응답한 사람은 22%에 불과한 반면 부담만 가중시킨다는 응답은 65%를 차지했다.

불법체류자도 미국 시민이 될 수 있을까

미 상원이 지난달부터 이민 규제 강화 법안 논의를 시작했지만, 정치권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불법 이민 규제 강화를 추구하는 공화당 내에서조차 규제 방법 및 강도, 범위 등이 다른 법안이 4개 이상 난립할 정도로 정치권도 섣불리 이민자들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민자들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탓이다.

상원의 공화, 민주당 지도부가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7일 공화당 의원들이 전체회의에서 불법체류자를 구제하는 내용의 이민법 개정안을 부결시키면서 이민 사회의 실망감은 더욱 커졌다.

존 매케인(공화) 의원과 에드워드 케네디(민주) 의원이 공동 제안한 법안에 기초한 합의안은 체류 기간에 따라 불법체류자를 세 부류로 나눠 차등적으로 구제될 수 있는 법적 절차를 담았다.

양당 지도부 합의안에 따르면 5년 이상 불법 체류한 사람들은 고국으로 귀국하지 않고도 길게는 6년까지 미국 체류를 연장할 수 있는 취업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불법 체류에 따른 벌금과 미납 세금을 내면 그 6년 뒤에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고, 다시 5년이 지나면 시민권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불법체류 기간이 2년 이상 5년 미만인 경우엔 일단 출국한 뒤 임시노동자로 비자를 받아 미국에 재입국할 수 있도록 했다. 체류기간 2년 미만인 경우는 계속 불법체류자로 남으며, 재입국 보장 없이 일단 미국을 떠나야 한다.

공화당 의원들은 여기에 폭력 등 전과 기록이 있는 불법 체류자나 임시취업프로그램을 통한 영주권 취득을 금지하는 등 구제 범위를 축소하는 수정조항을 포함할 것을 요구하며 반대해 법안 논의를 원점으로 돌렸다.

동시에 이민을 옹호하는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불법 체류자에 대한 구제책이 전혀 없는 빌 프리스트 공화당 원내대표 대체안에도 반대표를 던져 부결시켰다.

지난해 12월 하원 단일안으로 통과한 ‘센센브레너 법안’도 불법 체류자의 구제보다는 처벌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법안은 불법 체류자들에 대해 5년 내 고국으로 돌아가 임시 근로자 또는 영주 희망자로서 재신청을 하도록 하고, 불법 체류자를 고용한 업주는 엄중 처벌하며, 미국_멕시코 국경에 320km에 이르는 장벽을 세우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미 상원은 2주간의 휴회가 끝난 뒤 24일부터 새로운 합의안을 마련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갈 예정이나 타결 전망은 불투명하다.

더욱이 상원에서 최종안을 도출하더라도 이민 규제 강화 법안 반대 시위의 직접 타깃이 되고 있는 불법이민 규제 일변도의 ‘센센브레너 법안’과 절충 문제도 남아있다.

미 영토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자동으로 미국 시민권을 주는 이른바 ‘속지주의’를 불법체류자 자녀에 대해서는 제한하는 이민국적법 개정안도 하원에 발의돼 있다.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 득인가 실인가

▲ 미 애리조나주 멕시코 국경지대에 설치된 펜스 옆으로 미국 국경수비대 차량이 지나고 있다. / AP=연합뉴스

이민 규제 논란의 종착역은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대한 판단에 달려 있다. 미국 정치권과 학계도 이민자들이 미국 경제에 미치는 득과 실에 대해 계산기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불법 이민에 대해 미국인들의 위기감이 날로 커지는 이유는 갈수록 늘어나는 불법 체류자들에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법체류자 1,200만 명 중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700여 만 명에 달한다. 미국 전체 근로자의 20분의 1에 해당한다.

농수산 건설노동자 가정부ㆍ청소부처럼 미국인들이 꺼리는 궂은 일자리는 이민자들이 없다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업률 4.7%의 사실상 완전 고용 상태에서 불법 체류자들을 모두 추방시키면 당장 노동력 부족 현상이 벌여져 임금 및 물가 상승을 부채질할 수 있다고 진단하며, 이민 규제가 가져올 경제적 부작용을 경고하고 있다.

불법 이민 때문에 주로 고졸 이하 빈곤 계층이 큰 타격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저임금 일자리를 두고 이민자들과 경쟁을 벌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저임금 불법체류자를 내쫓는다고 해도 미국인들이 그만한 보수에 만족하고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게 확실하다”며 “미국인들의 임금 인상 요구로 인건비 부담이 커지면 기업들이 일자리를 해외로 이전시킬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오드리 싱어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은 “학생수 초과, 의료 보장 등 불법 이민자에게 들어가는 비용 부담이 크지만, 결국에는 세금을 내는 이민자들이 늘어나면 보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문향란 기자 iam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