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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기행 ②] 白軒 李景奭, 국가 위해 헌신… 우암 송시열과 악연




▲ 백헌 이경석이 문과 급제 후 왕으로부터 받은 교지.

전주 이씨 백헌 이경석
1595년(선조28년)-1671년(현종12년)


시국관의 차이에서 생긴 오해와 대립, 이념 갈등. 이는 오늘날의 신문 1면 기사가 아니라 350년 전 백헌 이경석(1595-1671)과 우암 송시열(1607-1689) 사이에 있었던 역사다. 명(明)·청(淸) 교체기의 국제 질서 속에서 그에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 남인, 서인 내지 노론과 소론 간의 현격한 인식 차에서 야기된 일이다.

이는 명분과 실리로 갈린 기싸움이었다. 고심한 끝에 실리의 측면에 선 이가 백헌 이경석이었고 명분에 입각해 열정적으로 조선의 자존을 확립하려고 있던 이가 우암 송시열이었다.

백헌과 우암은 서로가 인정하는 그 시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일반적인 성취의 측면에서 본다면 백헌은 우암을 크게 앞지른다. 학문을 바탕으로 진작 문과에 급제해 소위 출세가도를 달려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마침내 영의정이라는 최고 지위에까지 올랐다.

우암은27세 때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2년 뒤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의 사부가 된다. 그러나 그는 문과에 급제하지 않고서도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결정적인 계기는 1649년 척화파(斥和派)와 산림(山林)을 대거 기용하면서다.

이제 우암에게는 문과 급제라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된다. 우암은 ‘산림’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당시 백헌을 압도했다. 조정이라는 홈그라운드에서는 백헌이 승리했지만 전국 무대의 링에서는 백헌은 이미 우암의 적수가 못되었다.

여기서 ‘산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산림양덕지사(山林養德之士)’ 즉 산림은 재야에서 학문과 수양을 닦아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국왕의 부름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대개 이들은 경전에 밝고 행실을 잘 닦아 학문과 덕망이 모두 당대 최고였다.

‘십정승(十政丞)이 불여일왕비(不如一王妃)요 십왕비(十王妃)가 불여일산림(不如一山林)’이라는 속언이 전해지거니와 산림이라는 사람은 일종의 선민적(選民的)인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산림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산림을 불러 올려 이들에게 내리는 상징적인 조정의 직책은 성균관 시강원 찬선(贊善, 정3품)이나 사업(司業, 정4품)과 성균관 좨주(祭酒, 정3품)다.

좨주는 정3품직이지만 성균관의 책임자인 대사성(정3품)을 능가할 뿐 아니라 영의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국왕의 최고 자문역을 담당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한글 음으로는 ‘제주’이지만 성균관의 직책일 때만은 그 음이 ‘좨주’라고 바뀌는 독특한 이 직이 바로 ‘산림’의 상징이었다.

이 좨주는 혹독한 국가적 시련이었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재편되는 국가 질서 속에서 효종9년에 부활한다. 그 최초 임명자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었다.

동춘당은 우암 송시열과는 라이벌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며 그 후임이 우암 송시열이었다. 효종과 현종 숙종(1649-1720)으로 이어지는 산림의 전성시대는 이렇게 열렸다. 이 70여 년의 시기는 조선조에 있어서 가장 치열한 당쟁의 시기이기도 했다.

산림의 위상은 이후 좨주 직에 임명된 사람의 면면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 이후 윤휴, 윤증, 박세채, 허목, 이현일, 이희조, 정제두, 송덕상, 이직보, 송치규, 송계간, 송문흠, 홍직필, 채지홍, 임성주, 박윤원으로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

백헌에게는 우암 송시열과의 악연이 있다. 우암 송시열(1607-1689)과 백헌 상공의 첫 만남은 인조23년(1645)에 시작된다.

당시 백헌이 51세 우암은 39세 였다. 백헌은 이해 4월 이조판서 직에 있었고 9월에 우의정에 오른다. 백헌집에는 이때 이조판서 자격으로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 탄옹 권시를 등용했다고 적고 있다.

효종9년에 영중추부사인 백헌은 이조판서 송시열의 예론(禮論)을 지지한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재야 시절에 서울에 오면 백헌의 집을 찾아 서로 즐겁게 만났던 관계였고, 이는 천거를 받아 조정에 나갔을 때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현종2년(1661) 67세의 백헌은 고산 윤선도 해배건으로 인해 서로 틈이 생기게 되었고, 마침내 현종10년(1669) 우암 송시열이 삼전도 비문을 지은 백헌을 풍자해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서로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

우암은 심지어 백헌을 ‘향원(鄕原)’에 비유했다. ‘향원’은 요즘 말로 ‘악덕 지방 유지’ 정도에 해당된다.

우암의 명분론에 의거한 견해로는, 백헌이 당시 그렇게까지 굴욕적인 문자를 동원해 비문을 짓지 않고 그저 짓는 시늉만 했으면 되었는데 자존심을 모조리 무너뜨린 상태로 지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은 그의 손자인 이하성(李夏成)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우리 임금이 몸을 굽히고 욕을 참으신 것은 종묘사직을 위하고 만백성을 위해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인조께서는 처음에 신풍부원군 장유(張維), 전부사(前府使) 조희일(趙希逸) 및 신의 조부에게 함께 의논해 하룻밤 사이에 지어오라고 명하였는데, 소를 올려 끝까지 사양하였지만 사세가 급박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지어 바쳤던 것입니다.”

그 뒤 세 사람의 글을 청나라로 보냈고 그 중에 저들의 납득을 받은 백헌의 글도 고쳐짓기를 독촉받았다. 이에 국왕은 백헌을 불러 저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다는 절박함을 역설하고 다시 지으라고 종용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오늘날 삼전도 비문이다. 때는 인조15년(1637, 정축년) 12월, 당시 백헌은 43세로 도승지 겸 예문관 제학(종2품)을 맡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백헌은 자신이 천거하고 비호했던 우암으로부터 신랄한 공격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실학자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이라는 책에 보면 ‘백헌은 조정에서 벼슬한 지 50년 동안 한 번도 다른 사람과 다툰 적이 없었던 분’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면은 그가 지은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기질적으로 지위를 가지고 남을 억누르거나 문장으로 뻐기는 유형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다툰 대상은 불의요 오랑캐였을 뿐이다.

백헌은 전주 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의 왕족 출신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학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이름난 제자다. 그는 도승지, 대제학,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에 이른다.

당시 그의 나이 55세였다. 그는 학자와 시인으로도 괄목할 성취를 이뤘다. 문집(1700년 활자본으로 간행)은 56권 18책으로 시가 1832편, 문이 527편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사후에 나라에서 공을 기려 내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고결한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한 수의 시가 ‘새벽에 일어나서’라는 작품이다.

曉起 효기
西舍鷄三唱(서사계삼창) 서쪽 집에는 새벽이라 닭이 훼를 치고
東峯月一眉(동봉월일미) 동쪽 봉우리에는 달이 살짝 걸려 있네
秋空正澄廓(추공정징확) 가을 하늘은 참으로 맑고도 드넓은데
心亦澹然時(심역담연시) 이제 내 마음도 참으로 담담해지네.






이 시의 중심 단어는 ‘담(澹)’ 자이다. 이 글자는 담박할 담, 편안할 담, 싱거울 담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이 시에서 이 글자는 그 뒤에 ‘연(然)’ 자를 더해 욕심이 없이 담담한 모습, 또는 욕심이 없이 깨끗한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로 쓰이고 있다. 깨끗하고 청백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백헌는 부친의 임지인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났고 주로 현재의 서울 정릉에서 살았으며 뒤에 취현동(聚賢洞)으로 옮겨 살다가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현재의 분당구인 광주부(廣州府) 낙생면(樂生面) 선영에 모셨다.

참으로 부득이한 상황에서 지어진 삼전도 비문은 현재 백헌의 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 연유 또한 짐작이 간다.

이제 우리는 그 비문을 차분히 읽으면서 국론이 분열되고 힘이 없으면 외적에게 굴욕을 당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세상은 백헌과 우암 시대 이상으로 갈라져 공격하고 시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전도비 (원명, 대청황제공덕비)
조선 인조17년(1639) 건립
사적 재101호(1963. 1. 21)
위치: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289-3
규모: 총높이 5.7m, 비신 높이 3.95m, 폭 1.4m
재료: 비신-대리석, 귀부-화강암

다산 정약용의 송파수작(松坡酬酌)이라는 시 작품을 보면, “다만 지금 가랑비 속의 삼전도에는(只今煙雨麻田渡), 화각 단청한 비각 속의 큰비는 붉은 글자 가득해(畵閣穹碑字字)”라는 구절로 보아 당초에는 지금과 달리 비각이 있었다고 본다.




입력시간 : 2006/04/20 10:41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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