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관리직의 권익 찾기, 구조조정 등 깊어가는 고용 불안… 직장 내 권익 지켜줄 '보루' 인식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어느날 갑자기 사직 권고를 해와 거부했더니 멀리 떨어진 근무지로 발령을 내지 않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징계 조치를 내리지 않나…. 사측의 부당한 조치에 대항하기 위해선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현대자동차의 중간관리자급 직원인 강석권 차장이 최근 노조에 가입한 이유를 밝히면서 털어놓은 자신의 경험담이다.

강 차장은 노동위원회나 국가인권위원회, 청와대 신문고에 호소하는 등 여러 가지 자구책을 써봤지만 결국 자신의 권익을 제대로 지켜줄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은 노조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기업의 중간관리층에 속하는 과장, 차장, 부장급 사무직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노조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과거 노동운동의 무풍지대나 다름없던 중간관리층에 노조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특히 생산직 노동자들이 주로 노동운동을 해온 제조업계에서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제조업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사무직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추진되는 곳은 GM대우자동차다.

1999년 출범한 사무직장발전위원회(사무노위)를 모태로 하는 GM대우 사무직 노조는 조직 대상만 부장급 노동자들을 포함해 무려 4,30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은 지난해 7월 민주노총 산하 산별연맹인 전국금속노동조합에 가입, 사무지부 설립 총회를 가지고 본격적인 노조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무노위 한계 절감, 노조 가입

GM대우 사무직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한 것은 법적으로 노동 3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무노위의 한계를 절감해서다. 노조와 비슷한 체계를 갖추고 회사에 교섭을 요청하는 등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과는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였던 것이다.

당초 GM대우 사무직 노조는 몇 가지 장벽에 부닥쳐 출범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생산직 노조가 이미 존재해 현행법상 복수노조 금지조항에 저촉됐을 뿐 아니라, 회사측과 맺은 단체 협약의 노조 가입 제한 규정으로 인해 노조 가입의 통로가 원천 차단돼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묘안이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에 가입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하면 별도의 노조 설립 절차 없이도 금속노조 조합원 자격이 주어지는 데다, 초(超)기업 단위의 금속노조를 통해 GM대우 사측에 대해 노동 3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GM대우 외에도 금속노조에는 4개의 제조업체 사무직 노조가 더 활동하고 있다. 2004년 4월 가장 먼저 출범한 두산인프라코어 사무직 지회, 2005년 2월과 12월 각각 깃발을 올린 기아자동차 사무관리직 지회와 대우버스 사무직 지회, 그리고 올해 2월 이 대열에 합류한 현대자동차 일반직 지회 등이다.

이들 노조의 공통점은 한 사업장 안에서 기존 생산직 노조와는 별개로 조직돼 활동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금속노조에 따르면 기존 생산직 노조에 과장급 이상 사무직이 통합 조직된 노조도 생겨나고 있다. 대우상용차, 창원의 동명중공업 등이 그 같은 사례다.

그렇다면 최근 몇 년 사이 제조업계에서 사무직 노조 결성이 줄을 잇는 배경은 무엇일까. 대다수 노동 전문가들은 IMF 이후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일상화하면서 사무직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이 깊어진 점을 핵심 사유로 꼽는다.

금속노조 이상우 미조직ㆍ비정규사업국장은 “과거에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다소간 사용자 시각에서 노동운동을 바라봤다면 지금은 구조조정의 칼바람 앞에서 스스로 절박한 노동자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며 “회사와 교섭을 하든 대화를 하든 뭔가를 요구하려면 노조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현실을 자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현대차의 경우 최근 몇 년간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과장급 이상 간부 사원 수백 명을 수 차례에 걸쳐 전국 각지로 대기발령 내는 등 부당한 인사 조치를 취해 사무직의 고용 불안감이 극심해졌다는 게 노조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사무직 노조 바람이 부는 또 다른 이유로는 노조로 뭉친 생산직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커졌다는 점도 꼽힌다. 생산직 노동자들은 노조를 통한 꾸준한 임금 투쟁으로 소득이 높아졌는데 비해 조직화가 안된 사무직 노동자들은 사측의 방침에 휘둘려 자신들의 이익을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2007년 복수노조 허용 땐 크게 늘 듯

이에 대해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김금숙 교육선전실장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고용 불안이 사무직 노조 결성의 핵심 동기이지만 대기업에서 일부 나타나는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임금 역전 현상도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근로 조건 개선에 대한 동기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물론 사무직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은 걸음마 단계다. 노조의 숫자도 적을 뿐더러 어렵사리 출범한 노조의 경우에도 조합원 가입률이 충분한 수준은 아니다. 공감대가 서서히 형성되고는 있지만 사측과 생산직 노동자 사이에 낀 어정쩡한 위치 때문에 관망하는 층이 아직은 훨씬 두텁다.

하지만 현행 복수노조 금지 제도가 사라지는 내년부터는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생산직 노조가 활동 중인 사업장에서도 사무직 노조를 설립하는 것이 법적으로 쉬워지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에서는 복수노조 시대를 앞두고 조직 확대 계획을 벌써부터 수립해 놓고 있다.

기본 방침은 두 가지다. 첫째는 사무직에 대해 배타적인 생산직 노조들의 노조 규약을 고쳐 사무직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삼성그룹처럼 노조가 없는 기업에 사무직 노조를 출범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노총 조직본부 강훈중 국장은 “서비스, 유통업종 등에만 조직화가 안된 사무직 노동자가 300만 명에 달한다”며 “한국노총은 노조 가입의 제약을 가급적 모두 풀어 사무직 노동자들을 끌어안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7년은 과연 화이트칼라가 권익찾기에 본격 나서는 해가 될 것인가. 노동계의 새로운 움직임에 귀추가 주목된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