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서씨 약봉 서성
1558년(명종13년)-1631년(인조9년) 자 玄紀 호 藥峯 시호 忠肅

약봉 서성은 퇴계 선생의 제자인 함재 서해의 유일한 혈육으로 안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였다. 서해 선생은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서울에서 안동으로 낙향해 아들 약봉을 낳았다. 약봉은 당시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태생이 화려했다.

약봉은 조선 초 명신 양촌 권근의 사위인 서미성의 5대손이요 서거정(徐居正)의 종현손(從玄孫)이다. 조부는 생원과 문과를 거쳐 예조참의에 올랐다. 5대조 이래 대과에 급제한 이가 세 분이다.

약봉의 외가도 명문이다. 그의 외조 이고는 안동의 명절(名節)로 이름난 임청각(臨淸閣) 이명의 아들이다. 또한 약봉의 장인인 광주목사(廣州牧使) 송영(宋寧)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송일의 손자다.

하지만 그는 매우 외로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생후 1년 반이 못 되어(명종14년, 1559) 부친이 2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집안에는 25세의 어머니 고성 이씨와 중부(仲父)인 춘헌공 서엄 내외만 있을 뿐이었다. 서엄에게는 아직 자녀가 없었다. 그리고 같은 해 백부인 서대(徐岱) 내외가 몇 달 사이로 별세했다. 그들에게도 역시 자녀는 없었다.

약봉은 세 살 때 모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온다. 약봉이 서울살이를 시작한 것은 춘헌공 서엄의 제택(第宅·살림집과 정자를 통칭)이 있던 약현(藥峴)으로(현 서울 아현동 서울역 뒤 중림동 천주교회가 있는 자리) 그곳에서 10여 년간 서엄에게 글을 배웠으며 결혼까지 하게 된다.

약봉의 가문에는 당시 장수한 사람이 드물어 쇠락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엄은 총명한 어린 조카 약봉에게 문명(文名)을 기대했다. 이제 약봉에게 주어진 것은 재명(才名)과 수복(壽福)이었다.

이인(異人)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약봉의 모친은 서울 약현에다 안동 소호리 친정집을 본떠 큰 제택을 먼저 꾸몄다.

단촐한 가족임을 아는 이웃에서는 그 규모 때문에 비난할 정도였다. 하지만 모친은 “우리 집안이 지금은 이렇지만 훗날 창대해져 이 집도 협소할 날이 올 것입니다”고 자신했다. 그 소망은 생전에 실현되었다.

77세의 수를 누린 모친은 칠순 때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53세의 약봉 이외, 중견 문신으로 활동한 37세의 경우(景雨)와 국왕인 선조의 사위인 31세의 경주 등 4명의 손자, 손부 그리고 증손자 8명, 증손녀 1명 등 슬하에 19명의 자손이 가득했다.

이후 모친의 소망은 수백 년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다. 약봉 직계 본손 중에 문과 급제자가 123명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증명한다. ‘모당’은 풍산 홍씨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1549-1615)을 지칭한다.

약봉은 어린 시절 중부인 서엄에게 학문을 배워 성장한 뒤 율곡 이이와 귀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세(1586) 때 알성문과에 급제해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학자로서보다 관료로 더 이름을 떨쳤다.

약봉은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 경기 등 6도의 관찰사와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개성유수,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지중추부사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등의 직도 수행했다. 그리고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중신인 고명칠신(顧命七臣)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는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함경도와 강원도 등지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함경도 마천령을 넘어 회령으로 들어간 두 왕자 일행은 그곳의 반민(叛民) 국경인 등에 의해 붙잡혀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지는 참담한 지경을 당한다. 천신만고 끝에 그 위기를 벗어난 약봉은 왕자 구출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북평사 정문부를 장군으로 추대하여 경성, 길주 등지에서 전공을 세운다.

비록 왕자 구출에는 실패했지만 반민 일당을 주살하고 그 지역의 여러 군(郡)을 평정하는 데도 큰 공을 세운다. 이런 사실은 지난해 일본에서 반환되어 올해 3월 1일 북한으로 인도된 함경도 의병전승기념비(北關大捷碑)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저술로는 증손자인 서문유가 주선해 간행한 약봉유고(藥峯遺稿)를 바탕으로 중간된 4권 2책이 남아 있다.

약봉의 태실
삼대 정승·삼대 대제학 배출

약봉 서성 선생이 태어난 태실은 특이한 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삼대 정승과 삼대 대제학으로 대표되는 명문가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에 있는 이 건물은 안채인 태실(一字 구조)과 사랑채인 소호헌(丁字 구조)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호헌은 현재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호리의 약봉 후손들은 안동에서는 ‘소호리 서씨’로 통하는데, 널리 알려진 양반이면서도 영남 남인(南人)의 구심지인 안동에서만은 인정받지 못한 처지다.

그 이유는 첫째 퇴계 문인의 후예였지만 후손들이 대부분 노론 쪽이었고, 둘째 일찌감치 서울로 생활 기반을 옮겨 안동에 뿌리를 공고히 내릴 여건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소호리 대구 서씨들과 마주한 곳에 후대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산 이씨 문중(목은 이색의 10대손이며 서애 류성룡의 외손자인 수은 이홍조가 입향조, 양지마을이라 함)의 경우 약봉가의 성취와 비교할 때 열세지만, 안동에서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소퇴계(小退溪)로 부르고 ‘소호리 한산 이씨’를 한 급 높게 친다.

대구 서씨 문중 구심
귀암서원

귀암서원(龜巖書院)은 대구시 북구 산격동 산79-1에 있는 대구 서씨의 현조인 서침, 서거정, 서해, 서성을 배향한 서원이다.

귀암서원은 대구시 중구 동산동 중심가에 있었으나 번화가는 서원 입지와 잘 맞지 않아 현 위치인 산격동 연암공원으로 옮겨 중창했다.

대구 달성 서씨의 대표적 인물을 배향해 유림의 서원이면서도 대구 서씨 문중의 구심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