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⑤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

대구 서씨의 약봉 서성의 후손과 풍산 홍씨의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의 후손들이 잘 되었음을 의미하는 이 말은 조선 시대 양반가의 지향(指向)이기도 했다.

약봉의 넷째 아들 서경주(1579-1643)는 선조의 맏딸인 정신옹주(인빈 김씨 소생)와 결혼해 왕실과 혼인했고 이후 그의 후손인 도위공(都尉公)파는 약봉가에서 더욱 두드러진 집안이 되었다.

모당의 경우는 손자인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이 정명공주(1603-1685)와 결혼해 왕실과 혼맥을 형성했다. 공주는 7남 1녀를 낳아 오늘의 명문가 풍산 홍씨 모당공파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선조는 8명의 부인과의 사이에 14남 11녀를 두었다.선조의 유일한 공주인 정명공주는 역시 선조의 유일한 대군인 영창대군과 함께 제2부인인 인목왕후 소생이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영창대군을 사사(賜死)하고 모후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했다. 정명공주도 같은 운명이었다. 공주의 결혼은 인조반정 뒤에야 가능했다. 이렇게 약봉가와 모당가는 선조의 자녀를 대상으로 서로 얽힌 인연도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모당 집안이 잘 된 것은 대대로 덕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때 백사가 인용한 말이 있다. “예로부터 이르기를, 땅에 곡식을 심는 것보다 덕을 씨뿌리는 것이 낫다(古云 樹田不如種德).”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모당의 평생을 “대개 공의 평생은 모두 학문으로 얻어진 것. 명철함을 지켜 이름 드날리니 살아서는 평안했고 죽어서도 평안했네(盖公平生 皆學之力 保哲完名 生安沒寧)”라고 요약했다.

이처럼 후손들을 위해 덕의 씨앗을 뿌리고 평안하게 산 풍산 홍씨 현조(顯祖)인 모당 홍이상.

모당의 16대 종손은 홍정수(洪鉦洙, 1973년생)씨다.

나이는 서른이 넘었지만 이십대 중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준수한 외모를 지닌 종손은 서울 언남고를 거쳐 한국외국어대(92학번)를 졸업했고 아직도 미혼이다. 대학에서 네덜란드어를 전공했으며 한때 공직을 꿈꾸고 행정고시를 준비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출판사 탐구당(探求堂) 과장이다.

종손은 현재 서초동 아파트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영호남 지역과는 달리 경기 지역에 뿌리를 둔 반가(班家)들은 지금껏 고풍스럽고 번듯한 종택을 보존해 온 경우가 드물다. 문중의 결속력이 영호남과 같지 않은 데다 각종 개발바람으로 헐린 곳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모당가도 그러하다.

고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종택 터전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성석동 고봉산(高峯山) 아래이다. 예전엔 이곳을 귀이동(歸耳洞)이라 했다. 풍광이 아름다운 한적한 시골이었던 이곳은 이제 일산의 번화가를 조금 벗어난 대로변으로 변했다.

다만 이곳 묘하(墓下) 제청(祭廳)인 영모재(永慕齋)에서 매년 음력 9월 19일에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다. 모당의 묘소는 고양시 일산구 성석동 풍산 홍씨 선산에 있다. 신도비명은 월사 이정구가, 묘지명은 창석 이준이 지었다고 한다.

생가 부친인 홍석무(洪錫武, 1941년생)씨가 모당의 15대 종손으로 입후(入後·양자로 들어감)한 뒤 1993년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정수씨에게는 종손으로서의 책무가 지워졌다. 당시 정수씨는 대학교 1학년생이었다. 정수씨의 조부인 홍기세(洪起世, 1906년생)씨 역시 양자로 들어와 세간에서는 종통이 끊어질 것에 대해 우려하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문중의 어른으로 종통을 굳건하게 지켜낸 이가 탐구당의 하정(荷亭) 홍석우(洪錫禹, 1919년생) 사장이다. 종손의 백부(伯父)인 홍 사장은 11남매 중 장남이었다.

“모당 종가가 절손(絶孫)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네가 동생들 많으니 희생을 해라”는 문중 어른들의 말씀과 종가를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사심을 버리고 형제 중에 가장 반듯한 아우를 골라 종통(宗統)을 잇게 했다는 홍사장은 어린 조카이기도 한 종손 정수씨를 자신의 회사로 데려다 곁에 두고 아침 저녁으로 보도(輔導·도와서 바르게 이끎)하고 있다.

홍 사장은 우리나라 출판계의 1세대 원로로서 80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탐구당은 한국 출판 역사에 빛나는 저작물을 많이 내놓은 출판 명가이다. 명문가에서 명저를 줄곧 간행해온 것이다.

“부친 또한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근무하시다 탐구당으로 돌아와 20여년동안 계셨던 출판인이셨습니다.”고 말한 종손은 자신 또한 출판인의 길을 걷고 있기에 가업도 계승하는 셈이다.

홍 사장과 종손을 보면서 불현듯 ‘유부유자(猶父猶子)’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예전엔 자주 사용되었던 아름다운 고유명사지만 이제는 컴퓨터로 한자 변환조차 안 되는 생소한 단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본래의 의미는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전적 의미는 ‘조카와 삼촌’이다. 유(猶)란 닮았다는 글자다. 아버지 같고 아들과도 같은 존재를 말한다. 즉 조카는 숙부를 아버지처럼 존경해 따르고 숙부는 조카를 아들처럼 생각해 가르치고 애호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오늘에도 여전히 유부유자의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서울의 삼각지 ‘배호거리’ 뒤편에 있는 탐구당을 찾아가 만난 홍 사장과 어린 조카인 종손 정수씨를 통해 본다.

모당(慕堂)이란 호는 홍이상 선생이 35세 때 ‘어버이와 조상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지어 평생을 썼다. 그가 진정으로 영모한 것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부친을 일찍 여의고 젊은 시절 막중한 종손의 책무를 지게 된 정수씨는 “선현 모당의 ‘영모 정신’을 이어받아 종가를 반듯하게 이끌겠다”고 다짐을 밝혔다.

모당의 저서

학자는 저술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모당유고가 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의 문집을 쉽사리 만날 수 없다.

이는 문집으로 간행되어 널리 퍼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를 당해 아주 없어졌거나 혹은 그 일부가 초고(草稿)나 유고(遺稿)의 형태로 본가나 제자들 집에 남아 있지만 간행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모당은 후자에 해당된다.

학자로서도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모당은 방대한 양의 문집이 간행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알아본 바로는 대부분이 일실되어 전하지 않고 겨우 필사한 3책 분량만 남아 있는데, 그것도 정식 문집 편차로 완성된 상태는 아니다.

이런 형태를 정고본(定稿本)이라 한다. 이 문집이 14대손 홍기훈씨에 의해 1974년에 영인본 형태로나마 간행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 문집에는 210여 수의 시와 8편의 상소문, 그리고 연보(年譜) 등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모당이 남긴 학문이나 문장을 엿보기는 쉽지 않지만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단원 김홍도가 그린 8첩 평생도(平生圖)를 통해 모당의 일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평생도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생활 과정을 단계별로 정형화한 그림인데, 그 표준이 된 인물이 모당이었다. 김홍도의 '모당 홍이상 평생도'는 당시에 하나의 사회 유행을 불러일으켜 수많은 아류작을 양산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