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 증후군' 혜빈이와 고운이 가족

▲ 고운이(왼쪽)와 혜빈이가 복지관에서 치료를 받던 중 엄마와 얘기하고 있다.
“혜빈이 배가 계속 불러와요. 만삭의 임산부 같아요.”

정기 검진을 위해 병원에 다녀온 혜빈(9)이 어머니 권정희(38) 씨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너무 속상한 게 병원에서 애한테 문제는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치료에 들어가야 할지는 모르겠다고 하는 거예요.”

사진기를 바라보며 귀여운 덧니를 드러낸 채 생글생글 웃음 짓는 혜빈(9)이는 여느 초등학교 아이들처럼 해맑다. 124cm, 20.5kg의 앙상하게 마른 몸이 조금 안쓰러워 보일 뿐, 어디에도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바라보면 다르다. 숨쉬기가 곤란한 듯 배를 남산만하게 불룩 앞으로 내밀었다가 집어넣기를 반복한다.

일정시간 ‘숨 참기’를 반복하는 것. 자칫 이러한 무호흡은 뇌의 손상을 부를 수 있고, 심하면 사망에 이를 위험도 있다. 그런데도 의료진으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진다고 한다.

혜빈이는 ‘레트 증후군’이라는, 여자 아이에게만 발병한다는 희귀 난치질환을 7년째 앓고 있다.

생후 얼마 동안은 정상적인 발육을 보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뇌에 이상이 생겨 신체 전반에 발달장애를 일으키는 무서운 질환이다. 레트 증후군에 걸리면 마음대로 손을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못하며 보행에도 장애가 온다.

호흡이 불규칙해지며, 척추측만증 등 합병증이 찾아오기도 한다. 외국에선 여아 1만~2만 명당 1명 꼴로 발병한다는데 국내에는 현재 약 80여 명이 앓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드러나지 않은 환자까지 합치면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정상발육 보이다 뇌 이상 생기며 발달장애

혜빈이는 우리 나이로 열 살이지만, 엄마 아빠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좋아하는 장난감을 눈앞에 두고서도 손을 내밀어 집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혼자서 미끄럼틀을 오르락내리락 했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뻗정하게 다리를 내밀고 걸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게 시작이라 생각하면 두려워요. 지금은 부자유스럽게나마 걸을 수 있지만, 휠체어에 앉아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고, 누워 지내야만 할 수도 있잖아요.”

권 씨는 서러움에 말문이 막힌다. “앞으로 복지혜택이 확대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겠어요. 치료법이 없으니…”

이 병의 완치를 위한 치료법은 현재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손발의 기능 퇴행을 완화시키기 위한 물리치료 등이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맏딸로 엄마 아빠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혜빈이가 처음으로 이상 증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18개월 무렵. 갑자기 이유 없이 울고, 짜증을 부렸다.

혜빈이 엄마 권 씨는 “처음에는 한 살 아래 동생이 생겨 엄마 아빠의 관심을 끌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며 “그래서 어르고 달래주는 등 예전보다 더 잘해줬는데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두 돌 무렵이 되자, 혜빈이는 장난감에 과도한 집착을 보였다. 동생이 장난감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댔다. 그러던 중 병원에서는 유사 자폐가 의심된다는 진단을 내렸다. 복지관을 다니면서 놀이치료를 받았지만 그래도 별 소용이 없었다.

32개월 무렵, 증세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하루 24시간을 쉬지않고 내리 울어대는 것. 그런 혜빈이를 달래는데 엄마 아빠는 죽을 힘을 다해 매달렸다. 엄마는 아침부터 자정까지 유모차를 끌고 집 주변을 돌아다녔고, 자정 이후부터는 아빠가 새벽까지 돌봤다. 그렇게 가족 모두가 힘겨운 두 달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혜빈이는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태는 더 심각했다. 아이는 손을 전혀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평소 그렇게 좋아하던 과자조차 가서 집어 먹지 못했다.

그제서야 병원에서 ‘레트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내 아이가 설마?’ 너무 끔찍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차라리 악몽이기를 바랐다. 곧바로 ‘이젠 뭘 해야 하나?’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의료진의 얘기는 너무나 잔인했다. “살아 있는 동안, 애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세요.”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치료법 없고, 엄청난 치료비에 발만 동동

다음 날부터 유명 대학 병원들을 전전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달리 치료법 없다”는 무심한 반응만 돌아왔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말이라도 제대로 해줬더라면 그렇게 서럽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는 “눈을 뜨고 있는 내내 병원의 무기력과 나 자신의 막막함에 울화가 끓어올랐다”고 참담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엄마 아빠는 ‘레트 증후군’에 관해 조금이라도 최신의 정보를 얻기 위해 해외 인터넷 사이트를 샅샅이 검색하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미국의 ‘레트 증후군’ 홈페이지를 찾아냈을 때 비로소 희망의 빛이 보였다. 미국에서는 경증의 아이들은 교육도 받고 성인이 되도록 오래 산다는 글이 떠 있었던 것이다.

한 가닥 희망을 봤으니, 치료를 더 늦출 수는 없었다. 장애인복지관을 찾아 물리치료를 신청했다. 그러나 ‘대기 불가’라는 통보가 돌아왔다. 복지관의 물리치료는 현재 보행이 안 되는 아이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겉보기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다리와 발의 변형이 차츰 진행되고 있는 혜빈이는 이제 곧 보조기를 맞춰야 한다. “점점 기능을 잃어가는 아이인데 완전히 퇴행이 나타나 걸을 수 없어야 받아준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나요.”

1년 여 전에는 큰 맘 먹고 미국에도 다녀왔다. 미국 필라델피아 글렌도만연구소에 효과적인 치료법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연구소에서는 아이의 질환 상태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이에 따라 아이에게 맞는 운동과 식이요법, 인지 교육 처방을 종합적으로 내려준다. 이러한 치료 결과, 걷지도 못하고 손도 못 움직이던 한 재미교포 2세 아동이 손과 발 사용이 모두 가능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행 열흘 만에 혜빈이 엄마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연구소에서 처방 받은 대로 아이에게 운동과 식이요법 등을 시키려면 온 가족이 한국 생활을 접고 혜빈이 치료에만 전부 매달려도 부족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용은 6개월에 1,000만원이 넘는다. 그렇게 최소 10년 넘게 치료해야 한다니 지금 형편으로는 현실적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요즘 혜빈이는 호흡 곤란에 척추 측만 증세까지 진행되고 있다. 언제 어느 기능이 또 떨어질지 몰라 가슴 졸이는 엄마의 심정은 오죽 힘들겠느냐 마는 겉으로는 잘 웃고 명랑하다.

엄마 권씨는 “엄마가 즐겁게 받아들여야 아이도 잠시 고통을 잊고 그것을 극복할 힘을 얻을 거예요”라며 “그래서 세상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굳건한 엄마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아이가 밥 먹는 것에서 화장실 가는 것까지 일거수 일투족 엄마는 눈을 뗄 수가 없다.

/ 임재범 기자

‘지금은 그나마 부모가 젊어서 돌봐줄 수 있다지만, 아이가 크고 부모가 늙으면 누가 이 애를 챙겨주나, 또 앞으로 의술이 발달해 혜빈이가 오래 산다고 해도 일반인처럼 생활할 수 있을까.’ 엄마는 걱정 또 걱정이다.

엄마 권씨는 “특수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우리 아이 같은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며 “직장생활은 꿈도 못 꾸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갇혀 지낼 아이를 생각하면 부모로서 너무 참담하다”고 털어놓는다.

잦은 발작, 그때마다 응급실행

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자녀를 둔 또 다른 가정.

올해 여덟 살의 고운이는 그 병으로 혜빈이보다도 더 중한 장애를 겪고 있다. 하루에도 스무 차례 이상 경련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응급실에 실려간다.

엄마 김문희(41)씨는 고운이의 이상 증상은 생후 18개월을 전후해 발견됐다고 한다. 아이가 걷지 못했던 것. 종합병원을 찾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성장이 다른 애들보다 조금 늦나보다…’ 여겼다.

그런데 24개월 무렵, 신문을 보다가 엄마는 기겁했다. “희귀병에 관한 기사였는데 우리 아이와 똑 같은 증세를 앓고 있었어요.” 병원에 예약하고, 진단 결과를 기다릴 때의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그 병은 아닐 거야’라는 일말의 기대도 가졌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고운이는 생후 30개월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했다.

엄마는 “조기에 발견해야 병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데, 병에 관한 정보가 없어서 뒤늦게 치료를 시작한 게 너무 후회된다”고 말했다. 걷고 설 수 있는 혜빈이와 달리, 고운이는 아예 일어서지도 못한다.

치료비도 큰 부담이 된다. 물리치료, 감각통합치료 등의 재활 치료비만 한 달 최소 50만원이 넘게 들어간다. “30분에 5만원이나 하는 언어치료는 비싸서 아예 시도도 못했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게다가 병의 악화를 막으려면 평생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한 복지관에서 치료 받을 수 있는 기간은 통상 2~3년. 이 기관 저 기관 대기 신청해놓고, 언제까지 옮겨 다녀야 할지 막막하다.

“병세에 맞게 치료라도 제대로 받아볼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서 제도적으로 의료ㆍ복지 혜택를 프로그램을 확대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한다.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그저 현 상태의 유지를 위해 평생을 치료해야 하는 희귀난치병 환자 가족들의 간절한 목소리에 정부와 우리 사회가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두 엄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 레트증후군 증상 및 진단

생후 얼마간은 정상적인 발육을 보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뇌에 이상이 생겨 전반적인 발달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이다.

보통 생후 6~18개월에 발병이 시작된다. 초기에는 손에 미세한 떨림이 나타나고 호흡이 불규칙해지며 한숨을 쉬는 모양이 자주 나타난다. 2~3세 경에는 레트증후군의 특징적인 증상인 양손을 비비며 손을 씻는 듯한 동작을 반복한다. 발육의 퇴행이나 습득한 기능의 상실이 급격이 이뤄진다.

5세 무렵이 되면 겉으로는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말하거나 손을 이용할 수 없다. 자폐증적인 행동과 경련을 일으키기도 한다. 근육 약화나 척추측만증 등 합병증도 나타난다.

◆ 레트증후군 발병 원인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X염색체 우성의 방식으로 유전되어 남아는 태아기에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아는 대부분 25세를 넘기기 어려운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돌연사의 위험도 지적된다. 심장의 부정맥이나 음식물 삼키기, 폐렴 등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할 수 있다. 경련을 일으킬 때에는 항간질제를 사용한다.

병을 완치할 수는 없지만 병의 진행을 완화하고 합병증을 예방할 수 있는 작업치료, 물리치료 등을 꾸준히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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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