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권씨 충재 권벌1478년 (성종9) - 1548년 (명종3)

▲ 밀부교지
충재 권벌의 본관은 안동,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 또는 훤정(萱亭)이다.

그는 성종9년 11월 6일 안동 도촌리(속명, 도계촌)에서 태어나 19세 때인1496년(연산군2)에 진사, 1507년(중종2)에는 문과에 급제했고, 42세 때인 1519년 (중종14) 2월에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사화가 일어날 조짐을 보고 외직을 자청해 삼척부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해 11월 그가 그토록 우려했던 기묘사화의 피바람에 끝내 휘말려 파직되어 낙향했다.

중종 초년(1516년)에 조광조와 김정국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적극 가담했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파직을 당했던 것이다.

이후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그 화를 온몸으로 맞아 결국 평안도 삭주 지방으로 유배되어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연도에 백성들이 눈물을 흘린 천리길 운구가 있었고 지금도 상여가 지나갔던 마을 앞 고개 이름을 부여현(扶輿峴)이라고 부른다.

그는 살아있을 때 병조판서, 한성판윤, 예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고, 사후에 관작이 회복됨은 물론 영의정에 추증되어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고 문집 9권 5책을 남겼다.

그의 일생을 정리한 대표적인 글로 퇴계 이황이 행장(行狀)을, 사암 박순과 우복 정경세가 각각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남겼다.

행장은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중요한 글로, 집안 사람이나 제자들에 의해 정리되는 유사(遺事)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공인이 되는 객관적인 글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문중 인사보다는 이를 감당할 만한 명망있는 외부 인사에게 맡겨 짓게 한다. 당시 퇴계 선생이 행장을 지었다면 이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외 충재 선생의 삶을 정리한 글로는 묘갈명과 묘표, 묘지명, 시장(諡狀) 등이 있다.

퇴계는 제자들이 작은 학문공간을 마련하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손수 현판이나 시를 써서 격려했다. 그런 일에는 자신의 글을 애써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 제자들이 자신의 선대(先代)에 대한 행장을 봉청했을 테고 퇴계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을 것이다.

퇴계 선생이 남긴 문집의 분량이 방대한 것을 보더라도 그가 글쓰기를 얼마나 즐겼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행장과 관련해서 퇴계는 매우 엄선된 몇몇 인물에 한해서만 글을 남겼다.

퇴계집 중에 행장 부문은 두 권 분량이다. 48, 49권에는 명종, 농암 이 선생, 성주목사 황 공, 정암 조 선생, 회재 이 선생, 의정부우찬성 권 공, 선부군 행장초 등 8명에 대해서 쓴 행장만이 남아 있다.

그 면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명종은 당시의 국왕이고, 농암 이 선생은 주변에서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조선 중기의 명신 이현보이며, 성주목사 황공은 자신의 애제자로 먼저 세상을 버린 금계 황준량, 정암 조 선생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자신이 존경했던 선배인 조광조다.

다음 권에는 회재 이언적과 충재 권벌,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부친에 대한 행장을 임시로 적어두었다.

이를 정리하면 ‘선생(先生)’이라는 표현을 쓴 이는 농암 이현보,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이고 ‘공(公)’이라는 표현을 쓴 이로는 금계 황준량과 충재 권벌을 들 수 있다.

표현에 있어서 ‘선생’이냐 ‘공’이냐 하는 문제는 이후 논란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정암 조광조의 경우는 예외지만, 농암 이현보와 회재 이언적 양 가문에 있어서는 공히 퇴계 선생과의 관계와 관련해 논란이 있었다. 농암 문중과 야기된 사승(師承) 논쟁(論爭)이 그것이다.

그런데 회재 이언적과 충재 권벌을 두고 한 사람은 선생을, 또 다른 한 사람은 공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나름대로 의미를 둔 것으로, 학자와 정치인으로서의 비중을 고려해 잣대를 달리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이도 간단치는 않다. 금계 황준량의 경우는 자신의 제자이기에 공이라는 표현이 합당하지만, 충재의 경우는 안동 지역의 23년 선배며, 국왕도 인정했을 정도로 학문을 즐겼던 실천 유학자였던 점을 감안하면 선생이라 표현해도 큰 문제는 없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퇴계가 그렇게 결정한 것이라면 그에 따른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회재 이언적과 충재 권벌은 을사사화라는 혼란기를 수습하기 위해 함께 고민했던 주역이었다. 두 사람은 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이복동생이던 명종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원상(院相:국왕 사후 졸곡까지 26일까지 정무를 총괄하던 임시벼슬)에 함께 임명되었다.

그러나 후일 회재 이언적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최고의 평가를 받았으나 충재 권벌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리고 회재의 고향인 경주 양동과 배향 서원인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비중에 비해 충재 권벌의 고향인 봉화 유곡(닭실)과 배향 서원인 삼계서원은 일반의 관심권밖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충재 권벌은 이 시대에 재조명되어야 할, 잊어서는 안 될 큰 인물이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았던 절개를 지녔다. 이는 영의정을 지냈던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표현에 잘 나타나 있으며(公有死難不可奪之節), 이를 행장의 글에서 인용한 퇴계는 ‘그 말씀이 참으로 인정된다(其言不信然也哉)’고 평가했다.

그러나 충재의 절개는 강성 일변도로 흐른 것은 아니었다. 을사사화를 평한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글에 “대신의 풍도를 가진 한 사람이 있었으니 곧 찬성 권벌이다(得大臣風度者一人 曰權贊成). 오호라, 참으로 위대하도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권벌은 을사사화 당시 병조판서로 있었다. 그때 좌의정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 등이 억울하게 귀양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죄 없는 대신을 귀양 보내는 것에 반발해 강개하게 항의했다.

이때 원상으로 있던 회재 이언적은 권벌이 항의해 올린 글을 보고 놀라며 “이렇게 하면 화변(禍變)을 더욱 일으키게 할 뿐”이라며 지나치게 직설적인 문구를 지웠다. 이에 권벌은 탄식하며 “이런 말을 지워버리면 차라리 아뢰지 않는 것이 옳소”라며 반박했다. 결국 문제의 원고를 고쳐 상소했으나 문정왕후의 노여움을 사 귀양을 면치 못했다.

▲ 문과급제 교지

이런 사실을 전한 율곡 이이는 자신의 석담일기에서 “행실에 있어서는 권 공이 이 공을 따르지 못했으나 화난(禍難)에 임해 항절(抗節)한 데 있어서는 이 공이 권 공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 공이 권 공보다 우월하다고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흥미로운 평이 아닐 수 없다. 충재에게 후한 점수를 준 점은 기질적으로 율곡과 통하는 점이 충재에게 있었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충재의 묘소는 봉화 유곡리 중마을(내유곡) 큰재궁골에 있다. 단분(單墳)으로 정경부인 화순 최씨와 합장이다.

묘갈에는 ‘충정공충재권선생지묘(忠定公충齋權先生之墓)’라고 쓰여 있다. 부친인 의정공 권사빈(權士彬)과 모친인 파평 윤씨, 숙부인 교수공 권사수와 부인 봉화 금씨, 아들 권동보와 권동미 등 후손들의 묘소가 함께 자리잡고 있다.

선생의 신도비명은 특이하게도 두 기가 서 있다. 원래는 사후 20년이 되던 1568년(선조1)에 좌의정에 추증되었을 때 사암 박순이 지었으나, 1591년(선조24)에 재차 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어 영의정으로 증직되자 우복 정경세가 다시 지은 때문이다.

근사록(近思錄) - 영조가 하사한 서책, 종택에 보관

조선시대에 있어 학자의 필독서였던 근사록은 원래 중국에서 주자(朱子)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등 네 학자의 글에서 일상 생활에 절실한 것을 뽑아 편집한 책자다. 제목은 논어(論語)의 '절문근사(切問近思)'에서 나온 말로 ‘절실하게 묻고 그것을 가까운 데서 생각하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전체 14권 622조목으로 된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에 우리나라로 들어온 이래 수차에 걸쳐 간행됐고 몇 종은 현재 보물로까지 지정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책들 중의 두 종류는 충재 종택에 보관되어 있다.

중종 초년에 충재 선생은 국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하루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여러 신하와 함께 상화연(賞花宴)을 벌였는데 행사를 마친 뒤 내시가 수진본 근사록을 주웠다고 왕에게 아뢰었다.

책을 본 중종은 즉시 “이것은 권벌의 수중물(袖中物)일 것이다”하고 즉시 돌려줄 것을 명했다. 이는 국왕도 알아줄 정도로 충재가 근사록에 심취해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 뒤 영조 때에 이르러 이러한 전조(前朝)의 고사(故事)를 들어 국왕이 영남 감영을 통해 후손으로 하여금 당시의 책자를 받들고 오게 하라고 명했다.

이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하고 있는 충재의 후손 강좌(江左) 권만(權萬)이 책을 받들고 조정에 들자 영조는 의관을 정제하고 맞아들여 보고는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대학연의(大學衍義) 등 서책을 하사해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영조가 내사(內賜)한 이들 서책들은 모두 종택에 잘 보관되어 있다.

청암정에 올라보면 ‘근사재(近思齋)’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충재의 서책이요 가문의 자랑인 근사록을 보관하고 있는 유서깊은 공간이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