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택 지키기 "자부심 없인 못해"… 유지·보수 어려움도 호소

“시부모부터 고조까지 4대 조상을 기리는 4대 봉사(奉祀)에 명절 차례, 시제를 더하면 종부들이 준비해야 하는 제사는 일 년에 최소 12건이 넘어 제사를 끝내고 돌아서면 또 제사다. 그래도 우리 전통을 지켜나간다는 자부심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태 속에서도 힘들게 옛 전통과 문화 유산을 면면이 지켜오는 종가들. 종가의 종손과 종부들은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라는 부러움 속에 이 시대의 큰 어른으로 칭송받아왔다.

그 종가들의 종부들이 고운 차림을 하고 지난 9일 서울 중구 필동의 ‘한국의 집’ 안마당에서‘종가(宗家) 맏며느리 간담회’ 현수막 아래 모였다. 종부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문화재청이 마련한 자리로, 전국 39개 명문 종가의 종손과 종부, 차종부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전국의 종가 종손, 종부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는 처음”이라며 이날 행사에 의미를 부여했다. 종택을 지키며 전통 풍속을 잇고 있는 종가는 현재 전국에 10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백년 전부터 내려오는 종가의 독특한 관혼상제와 음식ㆍ생활 문화 등을 이어오며 전통 문화를 계승해온 이들이 한데 모인 이날의 자리는 격식 있고 고풍스런 얘기가 오갈 것으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고충 토로장이 됐다. 예상밖이었다.

종가 맏며느리들이 털어놓은 고충은 이들이 살고 있는 종택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에서 시작됐다.

고산 윤선도 종가의 차종부 한경난(43) 씨는“윤선도 유적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유물전시관을 지어놓은 뒤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며 문화재 지정만 할 뿐 관리에는 손 놓고 있는 당국에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선산 유씨 문절공 유희춘 종가의 노혜남(77) 종부는 “나이 들어 내 몸 하나 가누기 힘든데 너른 마당에 잡초 하나라도 나 있으면 종택을 찾는 손님들에게 죄 짓는 기분이 든다”며 종가 안주인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생각들을 풀어놓았다. 겉보기와는 너무도 다른 힘든 삶이라고 했다.

"기왓장 한 장 교체에도 1년 걸려"

문화재 지정에 따른 실생활과의 괴리도 여기 저기서 쏟아졌다.

오리 이원익 종가의 황금자(67) 종부는 “기왓장 한 장을 교체하고자 해도 절차가 복잡해 제 때 보수를 할 수 없다”며 “사진 촬영에서부터 개ㆍ보수 신청서 작성, 공사 허가까지 받는 데 1년도 더 걸린다”고 말했다.

대구서 온 경주 최씨 백불암 최흥원 종가의 종손 최진돈(55) 씨는 “사유권 운운하지 않을 테니, 문화재로 지정했다면 차라리 당국에서 관리권까지 가져가달라”고 유홍준 문화재청장에게 호소하기까지 했다. 집은 못 고치게 하고 당국에서 관리는 나몰라라 하니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종손은 “많은 사람들은 우리들이 한 폭의 동양화와 같은 경치의 고택에서 고상한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종택 관리사무소 직원이나 마찬가지다”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종손, 종부들의 이 같은 고충에 대해 유 청장은 “상당수 종가가 국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한 지방문화재라서 문화재청이 직접 지원하기 힘들다”고 해명했다.

그는 또 “관련 법안 통과로 내년 3월부터 기동성을 갖춘 ‘문화재관리보수단’이 활동을 하게 됐다. 앞으로는 이 보수단이 현장에 투입돼 적절히 조치할 것이고, 종택의 원형을 변형시키지 않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이라고 설명했다.

국가에 큰 공을 세우고 왕으로부터 시호를 받은 집안을 일컫는 종가는 조선 초 성리학이 국가이념으로 정착하면서 생긴 개념. 고택을 지키며 전통 풍속을 잇는 것 외에도 종가는 조상들의 제사를 지낸다. 이때 제사 준비는 자연스럽게 종부들의 몫. 하인이 있던 시절에는 제사 준비 부담이 덜했지만 요즘엔 맏며느리 혼자 이를 준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종가가 알아서 다 해주기를 바란다. 한 종가의 종부는“종부가 며칠 전부터 제삿상에 오를 제물을 준비해 놓으면 나이 든 종손은 도포자락 날리며 부엌에서 사당으로 음식을 나른다”며 고충을 털어 놓기도 했다.

돌아오는 것은 없고 책임만 무거우니 오죽했으면 요즘 젊은 여자들이 종갓집에 시집가는 것을 그렇게 싫어할까.

"유명한 종가에 시집 안오려 해"

또 다른 종부는 여기에 대해 “자부심으로 제사를 지내는 세대도 우리가 마지막인 것 같다”며 다른 지역의 한 종가를 두고 “그 유명한 종가에 며느리가 들지 않고 있다”며 자신이 종가의 맏며느리로 들었던 때와 사뭇 달라진 세상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삶이 힘들어도 종부답게 그들의 자부심은 컸다. 경주의 최부자집 강희숙(69) 종부는 “23세에 시집와 고생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종가 맏며느리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집안의 어른이었다”며 “맏며느리로 46년 지내면서 후회해 본 적은 한 순간도 없다”고 종부로 살아온 지난날을 회고했다.

강 씨는 또 “집안 법도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등 집안의 큰 일을 치러는 부모들을 보고 자란 탓인지 자식들도 잘 따라주고 잘 성장했다”며 “종가 맏며느리였기에 자식 교육에서는 이득을 봤다고 볼 수 있다”며 웃었다.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종손 종부들이었던 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동병상련하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간담회 후 삼삼오오 모여 창경궁 비원 등을 둘러보던 한 종부는 “불천위 제사(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보관하며 올리는 제사)를 지내면서 겪은 이야기가 이 곳에 온 사람들과는 통하더라”고 반가워했다. 그는 “밖에서 이 얘기를 꺼냈다간 ‘조선시대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드라마 얘기를 하고 있느냐’는 등의 놀림을 당했을 것”이라고 웃었다.

풍양 조씨 종손 조정희(73)씨는 “종가 안주인들이 겪은 고생은 며느리들도 모른다”며 “처음 있는 자리라지만 앞으로도 이런 자리가 계속 이어져 전통 문화를 이어가는 종부들이 서로의 고충을 털어놓고 위로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