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⑩ - 10대 종손 김지섭씨, 사당·종택 없고 가난 물려받아

조선 후기에 외척들의 정치 개입으로 삼정의 문란과 매관매직 비리 등 수많은 부작용이 드러났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왕실의 사친(私親)으로 올곧은 처신을 했던 이가 있었으니, 경주 김씨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이 바로 그 사람이다.

1724년(경종4) 61세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가 되어서는 더욱 근신하는 마음을 가져 평소에 검약함이 한사(寒士: 가난한 선비)와 다름이 없었고, 벼슬에 나아가 일을 처리할 때는 자신을 낮추기에 힘썼으며, 조정의 일에는 일찍이 간섭함이 없었고 또한 부탁도 하지 않으니 당시에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평했다.

이러한 평가는 국조보감이나 개인 문집 등에서도 일관되게 보여진다.

조선 시대에 관료로 일생을 깨끗하게 마친 이가 흔하지 않은데, 왕실의 인척으로 영화를 누린 이 중에는 더더욱 드물었다. 대부분 호가호위로 권세를 휘두르다 낭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당쟁이 소용돌이쳤던 숙종 시대에 국왕의 장인으로 또 사승관계에 있어서 소론파 인사(서계 박세당)와 연을 맺었음에도 시종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역사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칭송할 만하다.

수곡 김주신의 10대 종손은 김지섭(金知燮, 1969년 생) 씨다. 조부는 김정근(金正瑾, 1915년 생)이며 부친은 김낙경(金洛經, 1936년 생)으로 모두 세상을 떠났다.

숙종이 하사한 거택 독립운동 위해 팔아

종손의 조부는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나와 일본 동경제대에 유학했을 정도로 수재였다. 이는 생존해 있는 부인(전주 이씨, 흥선대원군 형의 증손녀, 1916년 생)의 증언이다.

그러나 현 종손의 증조부인 김교헌(金敎憲:1868-1923, 문과급제, 성균관 대사성 역임)이 대종교 제2대 교주(宗師)를 맡아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일제의 핍박을 받아 웅지를 펴보지 못했다.

대종교는 단군을 모시는 민족종교로 나철(羅喆, 1863-1916)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교주가 죽은 후 김교헌이 계승했다.

김교헌은 만주로 교세를 확장했는데, 청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 독립투사들 대부분이 대종교 교인이었다고 한다. 이는 종손의 재종숙부인 김왕경(金汪經, 1936년 생) 씨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제2기 강남구 구의회 의장을 지낸 김왕경 씨는 어려서 집안 어른들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어 가문의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 묘소에서 본 북한산

중국 지린성(吉林省) 화룡시(和龍市) 대종교 3종사 묘역에는 나철, 김교헌, 서일(徐一, 1881-1921) 등 세 분이 나란히 안식하고 있다. 5년 전 여름에 그곳을 찾았을 때 드넓은 들판 한 켠에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보이는 초라한 비석이 생각나 감회가 새롭다.

수곡 종가의 종손이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맹활약하였지만 가정적으로는 후손에게 빛나는 훈장보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물려줬다. 김왕경 씨 자신도 초등학교만 겨우 나왔고 현 종손 역시 고등학교만 졸업한 것도 모두 쇠락한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고 한다.

종손은 영동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사업을 하다 돌아가신 부친의 뒤를 이어 서울에서 6년째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종택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숙종이 하사했던 박동(현 서울 종로구 견지동) 340칸 저택을 증조부가 만주로 독립운동하러 가면서 팔았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또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말죽거리 일대 50여 만 평의 문중 땅도 매각해 독립군 군자금으로 남몰래 기부했다고 덧붙였다. 부원군의 집은 말하자면 왕조와 운명을 같이 한 셈이다. 숙종으로부터 하사받았던 저택을 그의 종손이 망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사심 없이 던졌고 남은 후손은 가난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것.

김왕경 씨는 종가와 관련된 독립운동 비사를 줄줄이 풀어놓았다.

“김좌진 장군이 고려공산당의 사주로 암살당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저희 선친께서 이 사실을 듣고 흥분하시면서 ‘현상금 걸려서 일본 프락치에게 암살당했는데 무슨 소리냐. 공산당과는 힘을 합해 일본군과 싸웠는데 암살할 이유가 하등에 없었다’라고 말하셨어요. 그래서 내가 충남 홍성군 문화관광과에 전화까지 해서 왜곡된 역사를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반영하지 않더군요.” 재종숙인 김 씨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대화 중에 곁에 있는 종손에게 부원군의 불천위 제사에 대해 물었다. 예상대로 불천위 제사는 계승되지 못했다. 현재는 시제만을 받들고 있는데 대략 40, 50여 명의 후손들이 모인다고 한다. 물론 위패를 봉안한 사당도, 옛터에 남은 종택도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후일 종택이 지어진다면 인원왕후가 태어났다는 ‘양정재(養正齋)’라는 현판을 높이 걸어야 할 것 같다. 종손은 서울 중계동의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2000년에 김해 김씨와 결혼해 현재 어린 딸 하나를 두고 있다. 종손의 부친은 경기상고와 성균관대학을 나왔다.

수곡에 대한 문헌을 섭렵한 뒤 그의 묘소를 답사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2리 산26-1번지에 있는데, 그 입구에는 당당한 신도비 한 기가 서 있다. 묘소에 오르는 녹음 속으로 난 길은 가파르지 않다.

묘소 바로 옆에는 조선 말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金弘集)의 묘소도 함께 있다. 일반인들은 김홍집의 관향에 관심이 없겠지만 그는 경주 김씨로 구한말 너무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김주신의 5대손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묘소는 다른 곳에서 옮겨 왔지만 화려하지 않은 점이 후손답다.

신도비명을 읽다가 수곡은 경림부원군(慶林府院君) 주은(酒隱) 김명원(金命元, 1534-1602)의 현손(玄孫)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다.

김명원은 성품이 선량하고 인품이 온화했고 좌의정이 되어서도 아름다운 마음(其心休休)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된다. 김명원의 형 김경원(金慶元)은 명종 원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삼대 문과 장원급제 집안이 바로 이 집이다.

그의 부친은 남에게 무엇이나 주기를 좋아해 부채나 글씨를 상자에 두고는 견디지 못했을 정도였다 한다. 그래서 은혜를 입은 이 가운데 평생 감사해 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나 수곡에게 부친은 원모(怨慕)의 대상이었다. 부친은 그가 다섯 살 때, 모친은 24세 때 세상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숙부인 김필진(金必振)이 스승이자 후견인이었다. 그의 모친은 풍양 조씨 좌의정 포저(浦渚) 조익(趙翼)의 손녀요, 연안 이씨 영의정 조암(釣巖) 이시백(李時白)의 외손녀다.

신도비 옆 고옥 방치 아쉬워

신도비 옆으로는 단번에 무너질 듯한 고옥 한 채가 자리잡고 있다. 집은 퇴락하기 이를 데 없고 사는 이조차 없다. 그래서인지 집 뒤의 감나무 두 그루도 고사목으로 휑하다. 다만 주변에 잘 가꾸어진 고추 등 푸성귀들이 6월의 태양 아래 싱싱하다.

빈집으로 들어서니 범상치 않은 주춧돌 등 석재들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분명 유래가 있음직한 ‘고재(古材)’다. 기와집의 기둥이며 서까래도 여염집의 것과는 규모와 모양이 사뭇 다르다.

오는 길에 재궁 입구에서 40년 동안 이곳에 살고 있는 후손 한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서 이곳이 숙종의 장인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재궁이며, 문중에서 이 집을 수년 전에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무단히 노력했다는 사실과 함께 재미난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10대 종손 김지섭씨

“부원군 부친의 종손인 우리 회장(김덕경, 金一振의 종손)의 평생 소원이 이 재궁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문중에 토지보상금으로 100억여 원이 나왔어요. 그런데 문중 회의를 열었다 하면 다른 파의 대의원 숫자가 많아 종손 뜻대로 되지 않아 늘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죠. 결국 4억원만 이 집을 짓는 데 배정하고 나머지 상당부분은 개인별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그 전에 서울대 교수로 있던 족친이 문화재관리국에 부탁을 해서 국비와 도비, 군비를 지원받아 수리를 했어요. 당시 나라 예산이라 일부 집수리와 주변 담만 쌓는 데 그쳤는데 지금은 이 지경이 되고 말았지요. 부끄럽습니다.” 문중 유산 보존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런데 예산을 주기 위해 조사를 나왔던 사람들이 “이 집은 건축 양식이 아주 특이합니다. 또 여기에 사용하고 있는 주춧돌 등 석재들은 고려 때 왕실 등에서 사용했던 것들입니다. 문화재적 보존 가치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 해에 시해당하고 또 서울대교수로 있던 족친도 세상을 떠나 복원작업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고 그는 전했다.

그 얘기를 듣고 다시 보니 이제는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섬돌이며 주춧돌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너무 낡아 수리를 할 단계가 지나 이제는 중건을 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종중 재산으로 일부 예산을 확보하고 있으니 부족한 나머지는 종중의 후손들이 힘을 모으면 될 것 같다.

다만 예전처럼 후손들이 각자의 무관심과 이기심에 치우쳐 수곡 종가의 귀중한 유산을 더 이상 방치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