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 1단지와 2단지가 양재대로를 만나 멈춰서는 지점 맞은편에는 대모산이 있다. 야트막한 산세에 수목이 울창해 가볍게 등산에 나선 인근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등산객만 대모산의 품에 안기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각박한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소외된 사람들도 이곳에 지친 심신을 의탁하고 있다.

대모산 자락 일대 9만7,000여 평의 부지 위에 조성된 구룡마을. 서울 최대의 판자촌이자 강남의 마지막 달동네로 알려진 곳이다. 베니어판과 폐(廢)건자재 등을 얼기설기 덧대 만든 벽 위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는 식으로 지어진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은 마치 1960~70년대 빈민촌 풍경을 연상케 한다. 시간도 멈춘 듯하다.

여기서 직선 거리로 1.3km 남짓 떨어진 곳에는 마치 극심한 빈부격차의 상징물처럼 ‘귀족 아파트’로 불려지는 도곡동 타워팰리스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착잡하게 만든다.

대모산 일대에 구룡마을이 처음 형성된 것은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80년대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도시 미관 정비에 나선 당국의 철거 조치에 따라 시내 곳곳에서 떠밀린 빈민들이 하나둘씩 흘러 들면서 집단촌이 만들어진 것.

구룡마을은 행정구역상 개포동에 속하지만 주민들 대다수는 주민등록에 실재하지 않는 ‘유령 주민’들이다.

모든 가옥이 사유지에 불법적으로 지어진 무허가 건물인 까닭에 행정 당국에서 구룡마을 사람들을 주민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남구청은 초창기에 정착한 60여 세대에 대해서는 구제 차원에서 주민등록을 해줬으나 이후로는 집단촌 형성을 우려해 중단했다.

그렇다고 해서 갈 곳 잃은 사람들이 밀려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 구룡마을은 90년대에도 꾸준히 빈민들이 유입돼 상당한 규모로 커졌다. 강남구청의 2001년 현황 조사에 따르면 마을에는 1,900여 세대, 4,100여 명의 주민들이 삶의 둥지를 틀고 있다.

그런데 ‘버림받은 땅’ 구룡마을에 언제부턴가 개발 바람이 솔솔 불고 있다.

서울에서 대규모로 개발 가능한 마지막 노른자위 땅으로 인식되면서 부동산 개발업계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 이 일대를 ‘개발행위 허가제한 지역’으로 묶어뒀던 강남구청의 조치가 지난해 12월 해제된 것도 개발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구룡마을이 개발되면 아파트 입주권을 받을 수 있다며 마을 주민증(주민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거주 확인서)을 외지인들에게 수천만원에 팔아 넘긴 이른바 ‘딱지’ 사기 일당이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구룡마을 주민들은 남의 땅에 집을 지어 불법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마을이 개발되더라도 사실상 법적으로는 아무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지난 3월 대한토지신탁과 한 시행사가 공동으로 구룡마을 일대에 대한 민간 도시개발 사업 계획을 강남구청에 정식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업 내용은 20평형 이상 아파트 3,000여 가구와 단독주택, 상가 등을 포함한 ‘친환경 도시’를 조성한다는 것.

주민들의 귀를 더욱 솔깃하게 만든 것은 전체 아파트의 30%를 구룡마을 원주민들에게 공급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렇게 되면 약 800여 세대 정도가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다. 철저히 소외된 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한 줄기 서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특히 구룡마을의 양대 자치 조직인 ‘주민자치회’와 ‘자치회’는 사업의 이해관계를 놓고 서로 등을 돌린 채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우선 ‘주민자치회’측은 구룡마을 재개발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 한 관계자는 “여기 사는 사람들 모두 아무런 권리가 없는 게 사실인데 사업 추진을 하는 쪽에서는 우리에게 아파트 입주권을 주겠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고 밝혔다.

주민자치회는 대한토지신탁의 모기업인 군인공제회측과도 상당 부분 사업에 대한 교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게다가 주민자치회 소속 400여 세대는 구룡마을 일대에 가구당 10평 정도씩 땅을 소유하고 있다. 언젠가 마을이 개발될 때를 대비해 권리 주장을 위한 최소한의 지분을 마련했다는 게 주민자치회의 설명이다.

한 관계자는 “이 열악한 곳에서 산 지가 벌써 20년째다. 우리 주민들에게 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이상 바랄 게 뭐 있겠나”라며 개발 사업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그러나 ‘자치회’측의 반응은 싸늘하다. 이들은 개발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사업 추진 방향이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입장이다.

자치회측은 군인공제회가 사들인 25만여 평 가운데 실제로 개발 가능한 부지는 2만평 정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나머지는 모두 자연녹지로 지정돼 있어 개발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군인공제회가 전체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는 점이다. 자치회 측은 군인공제회의 사업 계획대로라면 일부 주민들은 아파트 입주 혜택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머지 주민들은 삶의 터전에서 다시 쫓겨날 처지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김병찬 자치회장은 “군인공제회가 일부 주민과 함께 가면서 우리를 무시하고 배제하는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구룡마을 개발 사업은 어떤 식으로든 대부분 주민의 의사와 이익을 반영하는 쪽으로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두 자치 조직이 이처럼 팽팽히 대립하는 가운데 구룡마을 개발사업 계획서를 강남구청에 접수했던 대한토지신탁과 시행사가 최근 갑작스레 계획을 자진 취하한 것으로 밝혀져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강남구청 도시계획과 관계자는 “지난 6월 중순 대한토지신탁 등이 사업 계획을 스스로 취하했다. 이유는 ‘본인 사정’으로 적혀 있었을 뿐 더 이상의 배경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시행사의 한 관계자는 “자세한 사정을 말할 수는 없지만 당초 접수했던 사업 계획을 일부 변경해 다시 접수할 예정이며 군인공제회, 대한토지신탁과의 파트너십도 유지될 것”이라고 밝혀, 사업 추진 의사에 변함이 없음을 시사했다.

일각에서는 자연녹지 지역에 아파트 개발 사업이라는 무리수를 뒀던 군인공제회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한 발 물러선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서울시와 강남구청 등 당국에서는 구룡마을 일대를 주거, 상업 지구로 용도 변경하기는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다.

결국 현재로서는 구룡마을 개발 계획이 더 이상 탄력을 받기는 힘든 상황이다.

한바탕 개발 바람에 마음이 들떴던 주민들은 과연 이 같은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 주민은 이에 대해 “지금까지 여기서 살다 보니 이력이 났는데 앞으로도 못 살 일이 뭐 있느냐”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비록 주류 사회에서 소외돼 살아왔지만 구룡마을 주민들은 그들 나름의 치열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뜻일지 모른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