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 박씨 서계 박세당1629 (인조7) - 1703 (숙종29) 자 季肯, 호 西溪, 시호 文節

▲ 박세당 영정
박세당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고려 시대 학자인 박상충(朴尙衷, 1332-1375)의 10대손이며, 좌참찬 박동선의 손자요 이조참판 박정(朴炡)의 네째아들이다. 의령 남씨 남일성(南一星)의 딸을 배필로 맞아 태유(泰維)와 태보(泰輔), 태한(泰翰)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1629년(인조7년) 8월 10일 전라남도 남원부 관아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부친상을 당했다. 소년 시절 고모부인 교관 남사무에게 글을 배운 뒤 처남인 남구만, 처숙부인 남이성(南二星) 등과 경서를 강론했다. 32세에 증광문과를 장원 급제했다. 그의 둘째아들 역시 문과에 장원 급제했으니 이처럼 부자가 겹경사를 한 것은 조선 시대에 드물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1세에 모친상, 22세에 셋째 형 사망, 38세에 부인 사망, 55세에 중형(仲兄)사망, 58세에 장자 사망, 61세에 둘째아들의 사망이 이어졌다.

서계 박세당의 글을 읽다보면 그는 시대를 초월해 정신적으로 폭넓게 사유했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40의 불혹(不惑) 나이에 말 그대로 세상의 부러움을 떨쳐버리고 자아 성찰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수락산 석천동은 부친인 금주군(錦洲君)의 유업이 있던 곳이며 먼저 간 아내 의령 남씨가 잠든 곳이다. 채소밭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밤이면 삼간초옥에서 성현의 경전을 고증하며 심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 태도로 완성한 '사변록' 책은 왕명으로 조목조목 비판 받아 끝내 사문난적이라는 극단적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실록에 나타난 서계에 대한 인물평은 극단적이다. 숙종26년 8월엔 이조판서직이 내려졌다.

박세당은 벼슬이 낮은 때부터 성밖 교외에 살면서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후생들을 가르치면서 사서를 주석하였다. 그는 주자와 다르게 해석한 것이 많았으니 이를 두고 이단(異端)이라고 말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서계는 한갓 문사(文士)이지 이단자는 아니다.

▲ 문과급제 교지

삭탈관직되어 유배형에 처해진 그가 이인엽(李寅燁)이 상소하여 풀려나 석천동 정침에서 임종한 것은 그나마 천행이다. 숙종 실록에 박세당과 관련된 글이 115건, 사변록 글이 18건에 달하며, 숙종29년에만 10여 건이 실려 있다.

비난의 포문은 홍계적(洪啓迪:1680-1722)이 유생 108명과 함께 열었다. 이들은 박세당의 글이 성인을 업신여겼으며 정인(正人)을 욕했다고 단정한 뒤, 이경석 비문과 사변록을 거두어 불태움과 동시에 엄중한 벌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대해 국왕의 조치는 신속했다. 즉시 삭탈관직과 함께 문 밖에 내치게 했고 유신(儒臣)들에게 조목조목 따져 잘못을 지적한 글을 올리게 했다.

김창흡 등이 가장 먼저 팔을 걷고 서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박세당의 제자인 수찬 이탄(李坦)과 이인엽(李仁燁) 등이 구명소를 올려 반박했다. 이탄은 후일 서계의 연보를 작성한 사람이며 이인엽은 상소로 서계가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한 이다.

서계는 1703년 (숙종 29년) 75세로 5월 21일 세상을 떠나 수락산 서편의 장자골에 잠들었다. 아들 박태보의 주선으로 그린 영정을 통해 62세 때의 생전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사변록(思辨錄)에 얽힌 이야기
사서·시경·서경 새로 해석… '사문난적' 낙인

사변록은 박세당의 주요 저술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은 사서와 시경과 서경의 본문을 주석한 것으로 모두 14책 분량이다. 특히 그가 역점을 둔 것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즉 사서인데 그중에도 대학과 중용을 중시했다.

그는 기존의 금과옥조로 받들던 주자의 견해라 할지라도 다시 천착해 자신이 이해한 내용으로 새로 주석을 달았는데 경전의 이러한 해석은 조정과 학계에 큰 문제를 야기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극단의 공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사문난적이란 성현의 학문과 상반된 해괴한 논리를 펼쳐 정도를 해치는 도적(盜賊)이라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사문난적이라는 극단적 공격을 받았던 인물로 윤휴와 박세당 그리고 허균을 들 수 있다.

윤휴는 서계보다 12년 선배로 서로 학문적인 교감이 있었다. 국왕으로부터 조목조목 사변록의 잘못을 지적해 올리라는 명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 일을 맏은 이는 응교 권상유(權尙游: 1656-1724)와 교리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이었다. 이들은 공동 작업 형식으로 진행했다.

권상유는 우암의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의 아우로 이조판서까지 이르렀던 학자요 정치가다. 권상유는 왕명에 따라 부담은 가지면서도 변파록(辨破錄)을 지어 올렸는데 이를 본 농암 김창협은 "나는 그의 학식은 따를 수 없다"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이관명은 양관 대제학과 우의정에 까지 이른 학자요 정치가였다. 그의 아우인 이건명(李健命) 역시 우의정을 지낸 혁혁한 전주 이씨 밀성군파(密城君派) 출신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44세로 이조좌랑 직에 있었다.

결국 변파록은 두 신하의 사퇴로 우여곡절을 겪은 뒤 1703년(숙종29) 8월에 결국 이관명이 완성해 올렸고 이를 홍문관에 보관했다.

수찬 남취명은 사변록을 불태워 없애라는 왕명에 대해 중국에서도 유가에 반대한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그리고 불가(佛家)의 글을 그렇게 하지 않은 사실을 들어 조정을 설득했다.

후손들에게 남긴 처세의 글
타고난 "명운을 잘 지켜라"

누구나 자신이 죽은 뒤 후손들이 반듯하게 잘 살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자신이 살아있을 때 당쟁의 격류에 휘말린 두 아들이 비명에 세상을 떠났다면 남은 자손들에 대한 감정이 보다 더 애틋할 것이다.

서계는 남은 아들과 두 손자 등 자손들에게 경계함(戒子孫文)이라는 글을 남겼다. 1696년(68세)에 쓴 이 글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보존해 타고난 명운을 잘 지키는 법(保身全命之道)'으로 요약된다.

모두 네 편으로 나누어진 이 글에서는 줄곧 '조심(愼)'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삼년 상식(上食)은 예가 아니다. 옛날에는 없던 것이다"라고 하면서 내 자손들은 남이 괴이하게 여길지라도 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인 가르침보다 강한 어투다.

매사에 조심해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되 그것이 진리와 어긋난다면 무리가 따르더라도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 외에 독서의 중요성과 그 방법, 형제 간의 우애 등을 가르쳤다. 서계공파 종중에서는 이 글을 별본으로 인쇄 배포해 후손들이 읽고 실천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저술
문집 22권 11책 목판본으로 간행

문집 22권 11책이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사변록 외에 농서(農書)인 색경(穡經) 2권 2책 등이 있다. 문집에는 시가 약 800여 수, 상소와 차자(箚子)가 56편, 편지 60여 편, 변론 4편, 서문 13편, 기문 4편, 제발(題跋) 14편 등이 실려 있다. 묘지와 묘갈 등 묘도(墓道) 문자(文字)도 70여 편 실려 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