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화 불가능한 예측불허 시대 'Complex System'현실세계와 유사한 이론적 특성… 사회 각 분야로 폭넓게 확산

▲ 미국 실리콘 밸리도 복잡계 속성을 지닌 기업 생태계다.
# 1: - 2005년 2월18일 한국은행(BOK)은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금융소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수익성 제고를 위해 외환보유고의 투자 대상 통화를 다변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사실은 며칠 뒤인 21일 뒤늦게 외신을 통해 해외로 타전됐다. 로이터, 블룸버그, CNN 등 주요 언론사들은 ‘투자 대상 통화 다변화’라는 보고서 내용을 달러화 매각으로 해석해 “세계 4위 외환 보유국인 한국이 달러화를 팔 계획”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그러자 JP모건, 모건 스탠리 등 세계 유수 투자은행들도 덩달아 “한국의 달러화 다변화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도 영향을 미쳐 일본, 중국 등이 비슷한 정책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며 잇달아 경고하고 나섰다.

파장은 엄청났다. 이튿날 전 세계적으로 달러화 가치가 동반 급락하는 사태가 빚어진 것. 특히 엔화나 유로화 같은 주요 통화에 대한 달러화 가치의 낙폭이 두드러졌다. 물론 원-달러 환율도 급락했다.

다음날에는 세계 외환시장의 급락세가 한국 외환시장에 부메랑으로 날아와 추가적인 충격을 안겼다. 이른바 ‘BOK 쇼크’다.-

# 2: -2002년 6월, 한ㆍ일 월드컵에 출전한 태극전사들의 승리를 염원하는 길거리 응원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은 응원 인파는 경기를 거듭할수록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진원지는 서울 광화문 네거리였다.

대회 전부터 약간의 조짐은 있었다. 5월 16일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 때 광화문에는 축구를 사랑하는 ‘원조 붉은악마’ 700여명이 모여 응원전을 펼쳤다. 21일 잉글랜드와의 평가전 때는 조금 늘어 1,000여명, 26일 프랑스와의 평가전 때는 3,000명 선을 기록했다.

그러다 월드컵 개막식 때에는 그 숫자가 1만 명으로 증가하더니 6월 4일 한국의 첫 경기인 폴란드전 때는 무려 15만 명으로 폭증했다. 이날 길거리 응원은 전국으로 붉은 물결이 확산되는 발화점이었다.

6월10일 미국전에는 광화문 20만 명, 서울시청 앞 10만 명 등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민국’을 외쳐댔다. 이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터키전 등 국가대표팀이 치르는 경기마다 쏟아져 나온 인파는 월드컵 기간을 통틀어 2,200만 명이 넘었다. 전 국민의 절반이 길거리 응원에 동참한 셈이다.-

‘BOK 쇼크’와 ‘붉은악마 신드롬’은 각각 경제와 사회라는 다른 영역에서 벌어진 대사건들이다.

하지만 사건의 증폭 과정을 살펴보면 아주 작은 계기가 궁극적으로 엄청난 빅뱅을 일으켰다는 데서 매우 유사한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중국 베이징의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 미국 플로리다에 허리케인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이른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에 따른 현상이라는 것이다.

나비효과는 1960년대 미국의 기상학자 로렌츠가 기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정립한 이론이다. 지구상의 어느 지점에서 생긴 조그만 변화가 예측 불가능한 날씨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이론의 요지다. 이 이론은 이후 카오스(혼돈)이론(Chaos Theory)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

카오스 이론은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하고 불규칙하지만 나름의 질서와 규칙을 가진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론이다. 70년대 이후 물리학계를 비롯한 여러 학문 분야에서 새로운 연구의 틀로 각광 받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카오스 이론을 포괄하는 이른바 ‘복잡계(Complex Systems)이론’이 학계에서 더 주목 받고 있다.

서로 다른 현상과 질서 나타나는 시스템

그렇다면 복잡계란 과연 무엇일까. 삼성경제연구소 복잡계센터에 따르면 복잡계는 ‘수많은 구성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 요소 하나하나의 특성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현상과 질서가 나타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복잡계에서 말하는 ‘복잡’의 의미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시스템의 구성 요소는 단순하지만 거기에서 비롯된 현상이 복잡한 경우다. 카오스 현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단순하고 규칙적인데 이를 만들어낸 구성 요소들이 복잡한 경우도 있다.

최근 복잡계 연구자들은 주로 후자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인간 사회처럼 수많은 구성 요소들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상호 작용하면서도 놀라운 질서를 나타내는 현상에 대한 이해가 연구 목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개념적 용어를 동원한다 하더라도 복잡계를 선뜻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복잡계 연구자들조차도 말로 설명하다 보면 꼬이기 일쑤라고 한다.

이에 대해 삼성경제연구소 복잡계센터 윤영수 연구원은 “주변 사람들 앞에서 복잡계를 설명하는 1분 스피치를 한 적이 있는데, 다 듣고 난 사람들이 ‘그런데 그게 뭐야’ 하니까 참 말하기가 복잡해지더라”며 에피소드를 전했다.

때문에 일반인들이 복잡계 이론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증적 사례를 통한 직관에 기대는 것이 오히려 낫다. 그런 점에서 2002년의 붉은악마 신드롬은 훌륭한 ‘복잡계 교재’가 될 수 있다.

▲ 2002년의 붉은 응원 물결은 전형적인 복잡계 현상으로 꼽힌다. / 홍인기 기자
▲ 2002년의 붉은 응원 물결은 전형적인
복잡계 현상으로 꼽힌다. / 홍인기 기자

삼성경제연구소 윤순봉 부사장은 2002년 1학기 성균관대에서 복잡계 강의를 맡아서 진행했다. 하지만 수업이 진행될수록 머리가 복잡해진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어서 적잖이 난감해 하던 차였다. 그때 붉은악마 신드롬을 예로 들어 설명했더니 학생들이 “아하” 하며 쉽게 이해를 했다고 한다.

붉은악마 신드롬을 복잡계 관점에서 쉽게 풀어보면 이렇다.

2002년 6월 이전 한국인들은 구조조정, 정치권 부패 스캔들, 권위주의, 관료주의 등 다양한 사회적 억압 요인에 짓눌려 있는 상태였다. 또한 월드컵 첫 승과 16강에 대한 비원 역시 국내서 대회가 열린 까닭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언제든지 불만 붙이면 억눌린 가슴을 폭발할 수 있는 조건에 놓여 있었던 것.

이런 터에 외부로부터 월드컵이라는 큰 에너지가 유입됐고, 원조 붉은악마의 강렬한 응원 열기는 여기에 불을 붙인 격이 됐다. 한 번 발화한 응원 불꽃은 여기저기서 확대 재생산되면서 마침내는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확산됐다.

여기서 혼돈의 가장자리(edge of chaos), 자기조직화(self-organizing),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 공진화(co-evolution), 창발(emergence) 등 복잡계 이론의 핵심적인 개념들이 이해될 수 있다.(용어 해설은 별도 상자기사 참조)

‘BOK 쇼크’도 복잡계 이론을 동원하면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당시 세계 외환시장은 미국의 쌍둥이 적자, 유로화 위상 강화, 주요 동아시아 국가의 외환보유고 증대 등 요인으로 ‘혼돈의 가장자리’에 들어서 있었다.

이때 한국은행의 투자 대상 통화 다변화 발언이라는 미시적 요동이 외신, 투자은행 등의 ‘양의 되먹임’을 통해 급속히 커졌고 결국 세계 외환시장에 심대한 충격을 가하는 거시적 변화를 불러온 것이다.

현실세계 작동 원리 파악하는 디딤돌

연구자들이 복잡계 이론에 주목하는 이유는 복잡계가 현실 세계와 매우 유사하다는 특징을 가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체에서부터 생태계, 기상현상, 교통망, 인터넷, 주식시장, 기업생태계, 조직, 도시, 국가 등 우리 주변에서는 복잡계의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명확한 원리에 의해 일정한 동작을 반복하는 기계와 같은 단순계(simple systems) 외에는 거의 모든 게 복잡계인 것이다.

▲ 주식시장도 대표적인 복잡계의 하나다. / 이호재 기자
▲ 주식시장도 대표적인 복잡계의 하나다.
/ 이호재 기자

그런 까닭에 복잡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세계의 작동 원리를 보다 깊이 파악하는 디딤돌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오늘날처럼 변화가 갈수록 극심해지는 환경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복잡계 이론의 시각은 매우 유용한 틀이 될 수 있다는 게 연구자들의 지적이다.

실제 복잡계 연구는 지속적으로 외연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추세다. 당초 물리학이나 생물학 등 자연과학에 국한됐던 이론적 타당성이 경제, 사회, 정치, 행정, 조직학 등 사회과학 영역에서도 점차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김창욱 복잡계센터장은 “복잡계 이론은 우리 주변의 수많은 복잡계의 변화를 이해, 예측,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수단으로 점점 더 활용도가 커지고 있다”며 “복잡계의 속성상 완벽한 예측과 통제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더라도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으로도 충분한 의의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복잡계 이론 주요 용어 해설

▲ 혼돈의 가장자리 = 질서와 혼돈의 경계이다. 시스템이 혼돈으로 와해되어 버리지 않을 정도의 안정성을 유지하며 새로운 구조로 적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는 지점이다.

▲ 창발 = 부분들로부터는 유추하기 어려운 특성이 거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단순한 개미들이 모여 놀라운 체계를 보여주는 개미집이 대표적인 예이다.

▲ 되먹임 = 동역학의 비선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어떤 입력으로부터 나온 출력이 다시 입력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양의 되먹임과 음의 되먹임이 있다.

▲ 자기조직화 = 외부의 의도적인 간섭이 없이 시스템이 스스로 구조를 갖추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조직화는 양의 되먹임과 음의 되먹임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면서 발생한다.

▲ 공진화 = 다른 종의 유전적 변화에 맞대응하면서 일어나는 어떤 종의 유전적 변화라 정의될 수 있다. 복잡적응계에서는 상위 시스템(super-system)과 하위 시스템(sub-system)이 같은 방향으로 진화할 때 이를 공진화라고 정의한다.



삼성경제연구소 복잡계센터
60여 회원 사회·경제 등 폭넓은 연구

▲ 삼성경제연구소 복잡계센터 / 임재범 기자

복잡계 이론은 1990년대에 국내에 처음 소개됐지만 그동안 학계의 연구는 지지부진한 편이었다. 이론의 특성상 학제 간 연구가 필요했지만 이를 위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측력을 생명으로 하는 사회과학 방법론으로는 회의적이라는 시각도 적잖이 작용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도 몇몇 연구원들이 90년대 복잡계 이론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지만 이들이 학교로 떠나면서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2000년대 초에는 학술진흥재단에서 복잡계 연구를 지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마저도 무산됐다.

그러는 사이 1984년 세계 최초로 복잡계 연구기관인 산타페 연구소를 설립한 미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등지에서도 최근 복잡계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자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위기의식이 감돌았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1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학제 간 연구의 구심점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고 뜻을 같이 하는 연구자들이 하나 둘씩 합류하면서 복잡계 네트워크라는 연구 모임이 처음 탄생했다. 지난 2월에는 사무국 역할을 할 복잡계센터가 삼성경제연구소 안에 설치됐다.

당초 30여 명으로 출범한 이 모임은 수 차례 워크숍을 거치면서 현재 60여 명으로 불어났다. 회원들은 물리, 경제, 경영, 정치, 사회, 행정 등 6개 분과로 나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 4월까지는 20차례에 걸쳐 특강을 실시, 국내 복잡계 연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특강에는 고위공무원, 경영자, 학자 등이 매회 평균 100명 정도 참석할 만큼 성황을 이뤘다.

복잡계 네트워크는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신진 연구자들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활동에도 나섰다. 이번 여름방학 기간 동안 서울대, 연세대에 석ㆍ박사 과정 대학원생들을 위한 여름강좌를 개설한 것.

눈길을 끄는 것은 수강생 가운데 현직 교수들도 7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또한 수강생들의 전공도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예술 등 다양하게 분포돼 있어 복잡계 이론에 대한 최근 학계의 높아진 관심을 반영했다.

복잡계센터는 우리 사회의 중대 현안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 정책의 약발이 좀체 먹히지 않는 부동산 시장, 양극화가 극심한 기업 생태계, 저출산 문제 등이 대상이다.

김창욱 센터장은 “국내 부동산 시장은 정부와 민간의 상호작용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곧잘 흘러간다는 점에서 분명 복잡계라고 볼 수 있다”며 “그 구조를 면밀히 들여다보며 연구를 진행하면 궁극적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윤영수 연구원도 “국내 기업 생태계는 IMF 이후 기업의 초대형화, 소기업의 다수화 등 규모와 수익의 양극화가 고착했다”며 “이런 문제의 원인을 깊이 따져봄으로써 건전한 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대안을 마련해 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