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감 느끼는 뇌 회로 이상 탓… 대박환상 부추기는 사회도 공범

전남 광주에 사는 김모(남ㆍ45) 씨는 “재미있다”는 거래처 사장의 말 한 마디에 우연히 슬롯머신에 손을 댔다가 인생이 확 꼬였다.

일주일에 2~3시간 정도 심심풀이 수준으로 시작한 것이 한 달이 지나자 급속도로 중독 상태로 빠져들었다. 한 달에 보름을 오락실에서 밤샘을 하는 생활을 10개월쯤 하면서 그동안 사업으로 모은 돈 2억여 원을 모두 날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로부터 버림을 받고 나서야 정신을 되찾았지만 모든 게 엉망이 된 뒤였다.

2년 동안 도박을 끊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가까스로 도박의 덫에서 탈출한 그는 지금은 ‘도박’이란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카지노, 경마, 경륜, 복권에다가 성인오락실ㆍ성인PC방이 주택가까지 파고들면서 이제 집만 나서면 도박의 유혹과 마주해야 하는 세상이 됐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대박을 갈망한다. 그러나 ‘선’을 넘으면 자신은 물론 가정을 파탄시킨다. 도박의 덫에 걸려들어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헤쳐나오지 못하는 상태를 의학용어로 병적도박(Pathological Gambling), 즉 도박중독증이라고 말한다.

정신의학에서는 도박중독을 충동조절장애의 한 가지로 분류한다. 충동조절장애란 자신이나 남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는 경우로, 이미 조절능력을 잃었으니 치료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자꾸 남의 물건에 손을 대거나(절도광), 불을 지르거나(방화광), 자기 몸의 털을 뽑아내려는(발모광) 경우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사람들은 일을 저지르기 전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가 일단 행동으로 옮기고 나면 극도의 쾌감을 맛본다고 한다.

도박중독증의 진단법은 약물중독(물질의존증후군) 여부을 가리는 방법과 비슷하다. 병원의 도박중독 클리닉에서는 미국 정신과학회가 제시한 진단기준(DSM-IV) 10가지 항목 중 5개 이상에 해당하는 행동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면 ‘병적도박’이라는 판정을 내린다.

국내 성인 약 10%가 병적도박 증세

국내외 조사 결과를 보면, 도박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지역일수록 도박중독 환자가 많다. 미국은 전체 인구 중 병적도박으로 진단받은 비율은 3% 안팎. 하지만 도박산업이 성행하는 호주는 6% 선으로 미국의 2배다.

우리나라는 2002년 국정조사 자료에 따르면 성인 중 7.3~9.3%가 병적도박 증상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기준이 달라 미국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만만치 않은 수치다.

도박중독의 폐해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파산, 실직, 이혼은 물론이고 자살률도 20%가 넘는다.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절도죄의 35%, 비폭력 범죄의 40%가 도박 탓이라는 보고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도박중독에 빠질까? 또 어떤 사람은 괜찮은데 어떤 사람은 쉽게 걸려들까?

정신과 전문의들은 그 이유가 쾌감을 느끼는 뇌의 회로가 잘못된 탓이라고 분석한다. 쾌감을 조절하는 뇌 신경회로가 태어날 때부터 온전치 않거나 아니면 어릴 적부터 잘못 형성된 사람들은 중독에 쉽게 걸려든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도박을 하면 쉽게 도박중독자가 되고, 술을 마시면 알코올중독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도박중독증으로 병원을 찾을 경우 주로 쓰는 치료법은 약물과 인지행동 요법이다.

약물요법 중 가장 흔한 것은 항갈망제 복용이다. 뇌에서 쾌감을 느끼도록 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과다 분비를 차단함으로써 도박에 대한 욕망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이다. 이 약을 알코올 중독자들이 복용하면 음주 욕구가 줄어든다는 보고도 있다. 그러나 간이 나쁜 사람들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복용에 신중해야 한다.

인지행동치료는 쉽게 말해 도박에 대한 그릇된 생각과 행동을 바로 잡는 과정이다. 보통 중독자들은 한 번 돈을 딴 것을 갖고 앞으로도 계속 딸 수 있다거나 돈을 잃으면 운이 나쁜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흔한데, 이런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고 재발방지 요령을 일러주는 것이 이 치료의 핵심이다.

도박을 쉽사리 끊지 못하는 것은 금단증상 탓이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이제 그만 둬야지’ 굳게 결심하면서도 돈을 딸 때의 짜릿한 쾌감을 잊지 못해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의사들이 중독을 일컬어 ‘90일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기간에 금단현상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치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들과 도박증독의 덫에서 천신만고 끝에 빠져나온 이들이 누누이 강조하는 치료법은 자조모임(도박을 끊어 싶어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다. 서로 경험을 나누고 의지하다 보면 금단증상 극복에 많은 도움을 준다.

국내에도 ‘단도박모임(www.dandobak.co.krㆍ 02-3473-0879)’이 전국 곳곳에 있어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도움말 : 강북 삼성병원 신영철 교수, 중앙대학교 정신과 이영식 교수

■ 도박중독증 자가진단법

나도 혹시 도박중독증? 아래의 20가지 질문 항목 중 '예' 대답이 4개가 넘으면 도박중독 상태일 가능성이 높고, 7개 이상이면 전문가와의 상담이 꼭 필요하다.

1. 일이나 공부 대신 도박으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2. 도박 때문에 가정이 불행해진 적이 있다
3. 도박이 내 평판에 악영향을 끼친 적이 있다
4. 도박 후 후회하거나 가책을 느낀 적이 있다
5. 빚 등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박한 적이 있다
6. 도박 때문에 능력 감소를 경험한 적이 있다
7. 잃은 돈을 도박으로 되찾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8. 돈을 따고서도 더 따겠다는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9. 판돈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도박을 한다
10. 도박을 위해 돈을 빌린 적이 있다
11. 돈될 만한 것을 팔아 도박한 적이 있다
12. 생활비를 도박 밑천으로 쓰는 게 아깝지 않다
13. 도박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소홀히 한 적이 있다
14. 당초 계획보다 오랜 시간 도박한 적이 있다
15. 불안감이나 걱정거리를 피하려고 도박한 적이 있다
16. 도박 밑천 마련을 위해 나쁜 일을 계획한 적이 있다
17. 도박 때문에 수면 취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 적이 있다
18. 부부싸움, 의견대립 등으로 도박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19. 도박으로 한밑천 잡아보겠다는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20. 도박 때문에 자살이나 자해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단도박모임서 자료 제공)




송강섭 차장 speci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