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의병장 허위 선생 두 손자 등 한국 국적 취득 60년 설움 씻어

“소수민족으로 차별을 받을 때마다 맘 속의 고국이 몹시 그리웠는데 60년 만에 그 품에 안기게 됐습니다.”

이역만리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고려인’ 허 게오르기(62)ㆍ허 블라디슬라브(55) 형제는 18일 천정배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주어지는 ‘특별귀화증’을 받아들고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한국인이 아닌 고려인으로서 이국 땅에서 겪은 설움과 고난의 긴 세월이 고국의 품에 안기는 순간 깊은 회한으로 복받쳐 올랐기 때문이었다.

두 형제의 조부는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맹활약했던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1854∼1908)이다.

허위는 성균관에서 박사를 제수받은 뒤 중추원 의관(議官), 정삼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등 관직을 거쳤으나 1907년 일제에 의해 한국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대를 조직,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항일 무력투쟁을 이끌었던 독립투사.

1908년 4월 정미의병 당시‘서울진공 작전’을 주도했던 그는 다음달 일본군에 체포되어 그해 9월 51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었다.

허위의 가족은 1915년 일제의 핍박에 못 이겨 만주로 떠났고 이들 중 4남인 허국 (1971년 사망) 씨는 만주에서 다시 연해주로 터전을 옮겨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구 소련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1937년) 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옮겨가야 했고 그 이주경로였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게오르기와 블라디슬라브 형제를 낳았다.

온갖 시련 속에서도 허 게오르기는 모스크바 국립대학 석사과정을 수료한 뒤 모스크바전기회사 최고의 기술자로, 동생 허 블라디슬라브씨는 우크라니아 오뎃사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전기공학과 지질학을 전공하고 지질학교수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91년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페레스토이카로 키르기스스탄이 분리 독립된 후 극심한 소수민족 차별로 인하여 직장을 잃은 두 형제는 10여 년간 화물차 운전, 소작 농사 등 생계를 위해 힘든 일이라도 가리지 않고 했으나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2003년 두 형제는 키르키스스탄을 방문한 윤덕호(60) 윤프로덕션 사장과 만나면서 마음 속에 담아둔 고국에 돌아올 길을 찾게 됐다. 허 게오르기는 “키르키스스탄은 2005년 4월혁명으로 경제가 더 나빠졌고 농사로 인한 빚까지 있어 당시에는 한국행이 유일한 희망이었다”고 말했다.

이듬해부터 윤덕호 사장 등이 나서 정부 각 기관에 허위 후손들의 딱한 사정을 전하고 도움을 청했지만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허 블라디슬라브는 “그동안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자부심과 명예를 간직하면서 조국을 생각했는데 고국이 너무 무심한 것 같아 그때는 참으로 서운했다”고 술회했다.

마침내 허 게오르기는 한국 정부로부터 취업비자를 받아 올해 1월 아들 허 알랙산드라(27)와 함께 입국해 작년에 먼저 와있던 동생과 만났다. 그리고 두 형제는 국내 모 의료기기 제조업체에 취직해 함께 다니던 중 이번에 특별귀화 조치를 통해 한국 국민 자격을 얻게 되었다.

허 게오르기는 귀화증서를 받은 뒤 “고국을 잊지 말라고 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새삼 생각난다”며 “나보다는 함께 온 자녀들이 한국인으로 조국의 문화를 배우며 커갈 수 있게 돼 참 만족스럽다”고 기뻐했다. 동생 허 블라디슬라브는 “뒤늦게라도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살게 해 준 한국 정부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두 형제는 또 “소수민족으로 차별을 받으며 타국에서 오랫동안 서러운 시절을 겪었지만 대한민국은 언제나 자랑스러운 조국이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허위 선생의 친형 허겸 선생의 후손도 특별귀화증서를 받았다. 을사오적 처단 계획을 세우다 일본경찰에 체포된 뒤 만주로 망명해 구국운동을 한 허겸의 친손녀 허금숙(59) 씨가 주인공. 그러니 허 게오르기ㆍ블라디슬라브 형제와 허금숙 씨는 6촌 친척이 되는 셈이다.

허금숙 씨는 1995년 입국했다가 불법체류자로 전락해 가정부, 공사현장 등을 전전했기 때문에 특별귀화에 대한 감회가 남달랐다. “그간 한국에서 겪은 고생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다”고 소감을 말한 그녀는“너무 좋다”며 연신 고마워했다.

현재 골다공증 증세로 친척집에 머물고 있는 허 씨는 또“중국에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 한국에서 함께 모여 사는 게 꿈”이라며 “할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했던 고국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고 소박한 바람을 토로했다.

만시지탄이지만 독립투사 허위와 허겸 선생이 이제는 지하에서 편히 잠들지 않을까.

독립유공자 11명 후손 33명 특별귀화

▲ 독립유공자 김규식의 외손자 안길호씨(40) 부부.

법무부가 조상의 독립유공을 인정, 한국에서 살 수 있도록 '특별귀화'를 허가한 후손은 모두 33명. 앞서 허위의 손자 외에 김규식, 강기운, 이정, 허겸, 손병헌, 김도치, 남인상, 최관, 한용발, 이면직 등 독립유공자 11명의 후손들이다.

김규식 선생은 구한말 육군 장교 출신으로 1907년 대한제국이 해체되자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 1912년 3월 만주로 망명해 서일, 김좌진 장군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해 사단장으로 활약했다.

1923년 이범석 장군과 고려혁명군을 조직해 총사령에 선출돼 항일 무장운동을 계속했으며 1931년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최악에게 피살됐다. 중국(산둥성 위해시)에서 살아왔던 그의 외손자 안길호(40)씨 부부에 대한 특별귀화가 허가됐다.

안 씨는 "작년에 한국에 들어왔지만 국적 문제로 막노동 등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안심이 된다"며 정부 조처를 환영했다. 특히 현재 근무하고 있는 광고회사 대표가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이유로 채용, 좋은 대우를 해줘 자부심과 함께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다.

안 씨는 또 "중국에 있는 부모님을 모셔오려고 해도 지하방에 사는 처지라 곤란하다"면서 "탈북자에게 집을 마련해주는데 독립유공자 가족들에게도 그만한 대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기운 선생은 1920년 일제 밀정을 처단하고 두만강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으며 이정 선생은 1919년 북로군정서에서 비서로 활동하며 이듬해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다. 모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중국에 살고 있는 강기운의 손녀 강정자(48) 씨와 이정의 외손자인 이송무(44) 씨 부부에게도 특별귀화가 허가됐다.

이송무씨 가족은 중국 헤이룽강(黑龍江)성에서 살아오다 이 씨의 부친(이성원ㆍ72)이 98년에 입국해 국적을 취득하고 이 씨의 다른 두 형제도 국내 기업에 취직해 있어 한가족이 모두 한국에 정착한 특이한 케이스다.

손병헌 선생은 1920년대 중국에서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된 기관에서 활동했으며 간도 용정에서 학교 교사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고 중국에 살던 외손자 우근하(55)씨 부부도 특별귀화가 이뤄졌다.

김도치 선생은 1919년 3ㆍ1 운동 당시 일본 경찰서를 습격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으며 손자 김봉수(43) 씨 부부와 세 손녀가 특별귀화를 허가받았다.

이밖에 만주에서 대종교 활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최관 선생, 민족학교인 창동학교 교장으로 '조선독립선언서 포고문'을 발표한 남인상 선생, 3ㆍ1운동 당시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한용발 선생, 강원도 원주에서 3ㆍ1운동 시위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른 이면직 선생의 후손들도 한국 국적을 되찾았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