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푸스 지훈이 가족면역 체계가 스스로 자신의 몸 침범… 예측불허 증상 "치료약 개발될 때까지 살아남는 게 최상이죠"

“시한폭탄이래요. 의사선생님도 앞일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해요. 언제 터질지 몰라 늘 긴장하며 살죠.”

2000년 5월, 초등학교 2년생이던 지훈(14ㆍ가명)이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가족과 함께 외식으로 냉면을 먹고 들어온 날 밤, 갑자기 설사를 하면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열도 많이 나고, 몸도 퉁퉁 부었다. 다음날 아침 동네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했더니 ‘급성 신부전’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곧바로 종합병원으로 옮겼으나 아이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됐다. 그날 오후 5시 응급실에 들어설 때만 해도 엄마 손을 잡고 걷던 아이가 오후 9시쯤 되자 축 늘어지면서 아예 걷지를 못했다.

다음날 오전 7시, 복막투석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수술 후에도 아이 배에 계속 물은 차올랐고, 병원에서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병명을 모른 채 12일이나 지나 다른 대학병원으로 옮겼을 때는 이미 아이의 목까지 물이 가득 차오른 상태였다.

대학병원에서는 싸이톡산이라는 항암제를 투여했다. “이에 반응하면 살고, 반응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반응을 보였고, 죽음의 그늘에서 빠져 나왔다.

병명은 생전 처음 들어본 희귀난치병 ‘루푸스(Lupus)’였다. 면역 체계가 외부의 침입자(항원)와 자신을 구분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탓에 자기 자신에 대한 항체를 형성한 뒤 스스로를 공격하는 병이라, 몸 어느 부위든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지훈이는 그중에서도 위험하다는 신장에 침범이 일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가까스로 5개월 만에 퇴원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기나긴 투병생활의 시작일 뿐이었다. 병명을 알았을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병명을 듣고 의사선생님에게 자료를 달라고 하니 A4용지에 반도 못 미치는 내용이 적힌 자료를 건네주더라”고 한숨을 쉰다. “그때만 해도 의사들에게조차 생소한 병이었나 봐요. 최근에는 방송인 정미홍 씨가 이 병을 앓는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이 홍보가 돼 진단도 빨리 이뤄져 그나마 다행이지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조마조마

그러나 아직 근본적인 원인이나 치료법은 밝혀지지 않았다. 루푸스 환자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다. 가벼운 장기 침범과 심각한 장기 침범.

탈모나 피부 발진, 관절통 등으로 증상이 나타나는 환자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장기 침범에 속하고 소량의 스테로이드제 등으로 조절이 될 수 있지만, 지훈이는 그렇지 않다. 후자인 심각한 장기 침범에 속한다. 그래서 항상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관리를 해도 도무지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2003년 9월, 지훈이는 싸이톡산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더 큰 위험의 순간을 맞았다. 경기를 하며 쓰러지면서 혼수 상태에 빠져든 것.

전날 밤, 심한 두통과 구토 증세가 나타나 의료진에 호소했지만, 단순 두통으로 치부하고 넘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루푸스는 신체 어느 곳이든 공격할 수 있지만, 동시에 여러 곳을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게 의료진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설명과는 달랐다.

“엄마, 눈이 안 보여요. 그냥 깜깜해.” 응급조치 끝에 죽음의 고비를 겨우 넘기고 깨어난 아이의 첫마디였다. 그 말 또한 어눌해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이 시신경과 언어신경에 영향을 줄 정도로 뇌에 루푸스가 침범한 상태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끝없는 절벽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서서히 말도 하고, 앞도 보게 됐지만 예전처럼 건강하게 회복될 수는 없었다. 1.0이상이던 아이의 시력은 이제 0.1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제때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해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로 악화됐다.

어머니는 “하도 증상이 다양해 ‘천의 얼굴’을 가진 병으로 불리는 질환인데, 국내 의료진은 대충 외국 기준에 대충 꿰맞추는 수준이었던 것”이라며 울분을 토로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병원 문을 나섰을 때는 강한 약물 치료의 부작용으로 골다공증과, 빈혈, 고혈압, 담석이 생겼을 뿐 아니라, 성장까지 멈춰 버렸다. 이제 중 2학년생이 됐지만, 키는 여전히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의 평균 수준에도 못 미친다.

그동안 어른도 견디기 어렵다는 항암제와 투석 등을 기특하게도 잘 버텨주며 언제나 웃는 얼굴로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던 지훈이었지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점점 웃음을 잃어간다.

신경질이 늘고, 말도 없어졌다. “성장이라도 다 끝난 후에 병이 찾아왔다면 그나마 아이가 고통을 감당하기 수월했을 텐데···.” 어머니는 북받치는 안타까움에 말을 잇지 못한다.

여느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원으로 가서 공부하지만, 지훈이는 요즘 학원 대신 한방병원에 가는 것이 하루 일과다.

최근 좋아질지 나빠질지 알 수 없는 신약 치료도 기준치에 비해 턱없이 낮은 면역력으로 무산된 상태. 효과가 입증된 것이 아니라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어머니의 심정은 “좋은 대체요법이 있다”는 소문만 들어도 귀가 솔깃해진다.

루푸스와 싸운 지 만 6년. 이제 남은 희망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치료법’이 나올 때까지 살아서 버티는 것이다.

"건강보험 적용 확대 절실해요"

“몇 해 전만 해도 감기에만 걸려도 사망에 이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잘 치료 받으면 10년, 20년도 살 수 있대요.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잘 관리해서 어떻게 해서든 치료약이 나올 때까지 버텨내야죠.” 이를 위해서 “중증 희귀병 환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고가의 약물에 대해 건강보험 적용을 확대하는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신속한 정보를 얻고 알려주기 위해 사단법인 ‘루푸스를 이기는 사람들 협회’의 상담원으로 나설 만큼 적극적인 어머니는 그러나 질환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인터뷰에 응하면서도 굳이 얼굴과 실명을 밝히는 데는 주저했다.

“병은 알려야 낫는다고 하지만 희귀병은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는 죄인 아닌 죄인으로 남몰래 눈물을 삼키고 산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어떻게 해서 아이가 그런 병에 걸린 거야”. 사회의 편견과 몰이해는 어쩌면 경제적 어려움보다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아파서 병원에 가느라 학교에 늦게 간 아이를 청소 시키는 선생님, 가족 경조사에 참석 못했다고 뒤에서 수근 대는 야속한 친인척까지.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병이 들었다.

화목했던 가정도 점점 깨어져 간다. 어머니가 낮이나 밤이나 지훈이 곁을 한시도 떠나지 못하며 돌보다 보니, 두 살 터울인 지훈의 형은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늘 외로워한다.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지훈이 형은 “언제 엄마가 나한테 신경 썼냐”며 투덜댄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벌어도 벌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치료비 감당에 점점 지쳐가고 있다. 2003년 입원당시 2,000만원에 육박하는 치료비가 청구됐을 때는 엄청난 치료비에 놀라 무리하게 사업을 벌였다가 부도를 맞았다. 집과 사업체가 넘어간 것이다. 짐은 창고에 넣고, 아이와 어머니는 병원으로 아버지는 여관으로 제각각 흩어졌다. 지금은 친정 어머니 집에 얹혀 사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어머니 역시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 괜한 자책감과 현실의 버거움. “자살까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동안 남몰래 겪었던 고통을 그렇게 고백한다.

어머니는 때문에 “중증 환자 가족의 경우 경제적 파탄에, 가정 파괴까지 겪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한 가정에는 해당 희귀병의 치료뿐 아니라 가족을 위한 심리적 치료 프로그램도 함께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 원인 및 증상

피부, 관절, 혈액과 신장 등 신체 각 기관과 조직에 만성적인 염증을 일으키는 자가 면역 질환. 상당수는 소수의 장기만을 침범하는 가벼운 질환이나, 신장 등의 침범은 매우 심각하고 생명을 위협한다. 우리 몸 어느 부위 공격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흔히 천의 얼굴을 가진 병이라 일컬어진다.

원인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환경적 요인과 유전적인 인자가 관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환경적인 요소로는 항생제의 복용(특히 설파제와 페니실린제), 자외선, 과도한 스트레스, 특정 약물의 복용 등이 포함된다. 가족 내에 루푸스가 다수 발생할 수 있지만, 특정한 유전자가 이 질환을 유발하는 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발병할 수 있지만, 성인 남성에 비해 성인 여성의 발병 빈도가 10~15배가 더 높아 '여성의 병'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여성들이 루푸스에 잘 걸리는 이유와 증상의 주기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명확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 진단 및 치료

미국 류마티즘 협회(ACR)는 루푸스의 주요 11가지 증상 기준을 제시하였는데, 11가지 중 4가지 이상이 해당되는 경우 루푸스로 진단한다. 안면홍반, 원판상홍반, 구강궤양, 관절염, 장막염, 신장질환, 신경계질환, 일광과민성 피부증상, 혈액질환, 면역계질환, 항핵항체 검사결과 양성반응 등이다.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직 없지만, 드러난 증상을 완화시키거나 심각한 염증을 억제하는 치료들이 이뤄지고 있다. 가벼운 장기 침범의 경우는 항말라리아제,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제, 소량의 스테로이드제 등으로 조절하나, 신장염, 신근염, 루푸스 폐렴, 뇌혈관염 등의 심각한 장기 침범은 고용량의 스테로이드 및 싸이톡산 같은 강력한 면역억제제로 적극적인 치료를 권하고 있다.

충분한 휴식과 몸의 상태를 좋게 유지하는 운동요법과 신선한 과일, 야채, 고섬유질 음식 등의 식이요법이 병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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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02-714-5522 www.kor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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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