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 갈증 풀어준느 소중한 공간… 지원·선생님 줄어 운영남 호소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1935)에서 농촌으로 내려간 주인공 채영신은 교회예배당을 빌어 야학을 설립하고 문맹 퇴치를 위해 학생들을 가르친다. 일제 시대의 야학은 민족 계몽운동의 산실이었다.

1970, 80년대 산업화 시대의 야학은 달랐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에 배고팠던 어린 근로자들에게 야학은 주경야독의 배움터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노동3권에 대해 자의식의 눈을 떠가는 학습공간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정보화 시대에 야학의 풍경은 어떨까. 시골서 상경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린 근로자들이 줄어든 데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시행된 결과, 야학의 모습은 예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야학 현장을 찾아가 그 실태를 살펴봤다.

개교 27년째, 못 배운 한 푸는 공부방

지난 7월 21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황학동 중앙시장의 골목을 지나 끝자락에 다다르니 검은 때를 잔뜩 뒤집어 쓴 2층 건물이 보인다. 어두침침한 조명에 의지해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2층에 야학이 있다. 신당야학이다. 변변한 간판조차 없어 왠지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리 이곳은 1979년 7월 17일 개교해 올해로 벌써 27번째 생일을 맞이한, 꽤 긴 전통을 간직한 야학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과 방 2개만 덩그라니 있다. 모두 20평인 신당야학은 원래 가정집이었던 곳을 그대로 학교로 쓰고 있다. 거실이 교무실이요, 방이 교실인 셈이다. 방 2개는 초급반인 ‘늘푸른반’과 중급반인 ‘상록수반’으로 나눠서 쓴다.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와는 그 구조부터 확연히 다르다. 첫눈에 열악한 교육환경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등록한 학강(學講, 학생을 일컫는 말)은 모두 33명. 평균 연령이 50세가 넘어 노인학교를 방불케 한다. 하지만 학강 중 상당수는 집에서 손주를 돌보는 여유있는 노인이 아니라 시장에서 과일행상과 반찬가게, 분식점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동네 아줌마와 할머니들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빠듯하지만, 못 배운 한(恨)을 풀기 위해 고단한 몸을 이끌고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한국전쟁 통에 초등학교 입학 4일 만에 학교를 중퇴했다는 상록수반의 전모(62) 씨는 “떡 장사부터 함박집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다”며 “나이가 들었지만 5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학교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5남매의 장녀라는 같은 반의 지모(61) 씨도 “그동안 글을 몰라 불편했고 남 앞에서 부끄럽기도 했다”며 “그러나 1년 만에 한글을 깨친 것은 물론 이젠 간단한 영어까지 말할 수 있다”고 자랑한다. 진 씨는 또 “리슨틀리(recently) 비로소 엔조이(enjoy)하고 있다”며 대학 나온 며느리도 자신의 일취월장에 놀라더라고 웃는다. 이 모든 것은 야학이 없었다면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오후 8시 10분에 시작하는 수업을 10분 남겨둔 시간, 신당야학의 학생주임 격인 강학(講學, 선생님을 일컫는 말)대표 김선수(29·명지대) 씨가 헐레벌떡 들어온다. 과학과목을 담당하는 김 씨는 “친구 생일파티에 참석했다가 도중에 혼자 몰래 빠져나왔다”며 하루 절반의 사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강학의 어려움을 내비친다. 실제로 그는 캠퍼스의 낭만을 누려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년에 교사임용고사를 치르는 김 씨는 야학을 통해 참교육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자부한다.

“공식 하나를 외우고 너무도 좋아하는 아줌마들의 모습을 볼 때 가르치는 보람을 느낀다”는 김 씨는 그렇지만 야학은 현재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우선 재정난이 갈수록 심각하다고 한다.

야학에서 강의하는 강학은 9명. 모두가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재학생 신분으로 무료 자원봉사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야학에서 식사 등을 안 챙겨줄 수 없다. 그리고 임대비와 전기료 등 관리비도 제법 든다. 그러나 수입은 구청의 도움과 정부에서 주는 청소년 지원기금(연 180만원)이 전부다. 불황 탓에 외부의 후원금도 뚝 끊겼다. 40여 명에 달하는 대식구의 살림을 꾸려나가기에는 턱없이 돈이 모자란다. 그 때문에 김 씨는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있지만 마이너스 통장에 적자가 계속 쌓이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한숨을 내쉰다.

게다가 국가청소년위원회는 지난해 실시한 야학 실태조사 결과를 내세워 그나마 쥐꼬리만하게 주던 ‘청소년 지원기금’을 내년부터 중단한다고 한다. 야학에 등록된 청소년의 비율이 30%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김 씨는 이 같은 결정에 대해 “그것은 허약한 야학의 젖줄을 끊는 처사”라며 “정부 지원 없이 버텨나갈 야학은 전국에 극소수일 뿐”이라고 불만을 토해냈다. 청소년 지원기금 의존도는 서울은 20% 정도에 머물지만 지방의 경우 80%, 많게는 90%에 달한다고 한다.

김 씨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교육인적자원부가 너무 무심하다고 비판했다. 정식 교육단체로 인정받지 못한 데서 오는 푸대접이라는 것.

그는 강학 구인난도 야학을 침체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라고 말한다.

그 점은 신당야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조호성(고려대 4학년) 씨가 곁에서 거들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에는 대학생들이 반짝 관심을 보이지만 실제로 지원자 중에 강의에 참여하는 대학생은 20%를 밑돈다.” 조 씨는 작년에는 강학 3명이 야학을 꾸려나가 일주일 내내 강의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어 “이것은 극심한 취업난의 불똥 탓이다. 취직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대학생더러 어떻게 귀한 시간을 쪼개 무료 강의 봉사를 해주도록 말할 수 있겠냐.”며 안타까워 한다.

인생 배우고 공부 가르치는 교사들

현재 전국에 있는 야학은 대략 180여 곳. 대부분의 야학들은 대학생들이 강의를 맡고 있어 대학생들이 외면하면 야학의 존립 차체가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그들은 내내 걱정했다.

오후 9시. 즐거운 야식시간이다.

“30년 내공으로 담근 장아찌를 한번 맛 보라구.” “아~해봐. 선상님 먹이려고 밤잠 설쳐 준비한 거여.” 거실 한 켠 주방에서는 지지고 볶는 소리가 요란하다. 신당야학 살림꾼 남주희(30) 씨와 두 명의 식사 당번이 대식구 밤참을 준비하는 중이다. 남 씨는 “장사를 마치고 야학으로 곧바로 오는 분들이 많아 끼니를 거르기 일쑤”라며 “학교의 재정사정이 넉넉지 못해 올해부터 직접 음식을 해먹고 있다”고 말했다. 비록 자리가 좁아 서서 먹기도 하는 등 불편했지만 강학과 학강이 한데 어울려 먹는 공동체 식사는 여는 비싼 요리보다도 맛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 맛에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는 밤 10시. 신당야학 주변에도 장사를 끝낸 상가 불빛들이 하나둘 잠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장 2층의 조그만 방안에서 진행되는 야학의 사회과목 강의 교실은 배움의 열기로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선상님,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수가 이순신 아닌가여?”, “뭔 소리를 하는 거여, 고구려의 연개소문이지. 임자는 요즘 텔레비전도 안보는가봐.”

답은 모두 틀려도 뽀글뽀글 머리의 40대 막내 아줌마부터 하얀 머리의 70대 할머니까지 한마음이 된 교실 안에서는 밤이 깊도록 낄낄거리는 만학의 즐거움이 번져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그날따라 밤하늘도 웃고 있었다.

교육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한 ‘비정규’ 배움터인 야학. 재정적 어려움과 강학 구인난 속에서 오늘도 야학은 그 명맥을 어렵게 이어가고 있다. 평생교육의 장이라는 차원에서 이젠 정부도, 우리 사회도 야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인식을 전환해야 할 때다.

선진국의 경우는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다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25%에 달하는 소외계층의 문맹률을 인정하고 1970년부터 막대한 교육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실효성이 적은 야간 중학교를 폐교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해 노인이나 주민들의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곳으로 전환했다. 물론 비용은 정부가 부담한다.

그런 의미에서 야학실태를 조사했던 공주대학교 양병찬(43) 교수가 논문에서 제기한 주장은 교육부가 새겨볼 만하다. “양극화 문제 해결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시점에 사회, 경제적 통합을 위해서는 기초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소외계층의 평생교육 기초이자 핵심인 야학 활성화에 정부는 관심을 두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양 교수는 또 “야학 대학생 교사에게 명예 교사증이나 별도의 혜택을 부여한다면 참여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신동민 객원기자 east081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