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류씨 진일재 류숭조 1452년 (문종2)-1512년 (중종7) 자 종효(宗孝), 호 진일재(眞一齋) 석헌(石軒), 시호는 문목(文穆)

▲ 시호교지
진일재 류숭조는 1452년 전생서령을 지낸 지성(之盛)과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나 1472년(성종3)에 진사, 1489년(성종20)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사유(師儒, 선비들을 지도할 만한 학문과 인격을 갖춘 유학자)에 선임되었다. 장령(掌令)으로 연산군의 실정을 간하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난 뒤 공조참의, 경연참찬관, 대사성,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이중에 특히 성균관 직을 오래 맡았다. 수장인 대사성(大司成, 5년간 재직)을 비롯해 사성, 사예, 직강, 전적, 박사, 학정, 학록, 학유 등 모든 직을 망라했을 정도였다.

그는 성균관의 행정부터 교수 학습에 이르는 모든 직무에 정통했던 관료요 유학자였다. 당시 논자들의 말인 "경학(經學)은 류 대사성(柳大司成, 柳崇祖)에게 묻고 사학(史學)은 김 모재(金慕齋, 金安國)에게 물었다"와 대신들이 국왕에게 건의한 "성리학의 전수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연소한 문신을 뽑아 류숭조에게 나아가 수업하게 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은 그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그가 성균관 직에 있으면서 이룬 역할은 단순히 인재양성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도학의 맥 수수(授受)'의 문제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선 도학의 맥은 진일재 류숭조를 통하지 않게 그려졌다. '도학정치를 주장한 대학자 류숭조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학자'로 조광조를 언급할 뿐 도학 정통성은 한훤당 김굉필로부터 이어진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이러한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균관의 사범(師範)으로서 조광조를 지도했던 역사적 사실과, 도학의 맥을 계승하기 위한 그의 노력까지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실록을 읽다가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했다. 진일재 사후 만5년 뒤인 중종12년 2월의 일이다. 경연에 입시한 조광조가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을 것을 아뢰는 자리였다. 이때 돌연 조광조는 진일재를 평하고 나섰다.

"신이 보건대 류숭조는 학술이 있었다지만 그의 사람됨이 거칠고 경박하여 유자(儒者)의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성균관의 서재를 더 넓히기를 주청하여 비록 (유생을) 많이 불러 모았지만 한갓 국고만 허비했을 뿐이었습니다."

조광조의 평에 중종은 "류숭조가 대사성일 때 과연 유생이 많이 모였다고 했다. 그러나 한갓 모으기만 힘써서 될 일인가? 모름지기 쓸 만한 사람으로 양성시켜야지, 단지 많이 모은 명성만 냄은 불가하다"라 하였다.

이렇게 국왕과 호흡이 잘 맞던 조광조는 참소를 입고 2년 뒤 죽임을 당했다. 이 대화를 음미해 보면, 조광조는 스승인 류숭조가 성균관 직에 있으면서 교육자로서 이룬 탁월한 업적에 대해 혹평한 것은 그가 갈망했던 이상적 왕도정치(王道政治)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조광조가 비판했던 성균관의 '양적 팽창'은 선비의 저변 확대로 후일 사림의 재등장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조광조 같은 불세출의 인물도 류숭조의 성균관에서 비로소 길러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뒤집어 보면 이는 진일재의 기여와 역할이 컸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하지만 조광조의 영향력은 퇴계 이황을 거치면서 유림 사회에서는 절대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음으로 양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1872년 고종이 "칠서언해를 누가 지었나?" 라고 물었을 때 강관(講官) 김세균(金世均, 1806-1884)이 "류숭조가 집해(輯解)하고 문순공(文純公) 이황이 바로 잡은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류숭조에게 별호와 문집이 있는가? 어느 시대 사람인가?"라고 재차 물었다. 그때 김세균은 "사적인 별호로 석헌(石軒)이라 하고 진일재(眞一齋)라 하기도 합니다. 문집은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문순공과 같은 시대 사람인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경연에 입시하는 신하는 당대 대표 학자다. 그럼에도 김세균이 말한 이야기를 보면 잘못된 내용이 있다.

첫째, 진일재의 문집 문제다. 실제로 그것은 진작 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늦었지만 진일재 문집은 1808년(순조8) 경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 1744-1823) 등이 간행했다. 그럼에도 김세호는 본 적이 없다고 한 것. 영남과 중앙 정계와의 학문적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진일재가 중종의 명에 의해 간행한 조선 성리학 연구의 주요 이론서인 대학잠(大學箴)과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조차 소개하지 못한 것이다.

둘째는 진일재의 생애에 무지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퇴계보다 49년 선배이며 그가 가르친 조광조조차 퇴계보다 19년 선배다. 그런데도 김세호는 단순히 '퇴계와 동시대 사람'이라고 얼버무렸다. 진일재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온당하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사서삼경 '토' 달아 언해 물꼬 터

▲ 맹자언해

안동에서 한문을 배울 때 사랑방에서 선생님이 말하던 이야기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삼경(三經) 중의 하나인 서경을 읽을 때였다.

"문목공(文穆公) 진일재께서 경전의 토를 달았네. 서경에 토를 달면서 '혼들레'라고 했는데, 귀신도 탄복했다. 그 말이 아니면 어떤 토로도 뜻이 안돼. 그래서 귀신이 곡할 토라는 건데, 참 그러니 이 어른을 이인(異人,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이라 할 수 있제, 문목공(文穆公)을."

선생님은 평생 한학만 하신 정통 유학자였다. 그후 '이인'을 기리는 말은 안동에서조차 다시 듣지 못했다. 서경에서 그 토가 어디쯤 나오는지 음미해보고자 했으나 다시 찾아본 기억은 없다.

그러다 얼마 뒤 뜻밖에 진일재집(集)의 번역을 맡게 되었다. 문집을 읽으면서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첫째는, 그가 정암 조광조의 스승이며, 둘째는 유림들에 의해 문묘 배향이 추진되었을 정도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면서도 세상에서 잊혀진 인물이라는 것. 전주 원당 출신이라는 설도 있지만, 출생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경북 봉화에 선생을 배향했던 송천서원(松川書院)과 종택이 있고, 경기도 여주 가남면 대신리에 묘소와 이를 관리하기 위해 마련된 양옥이 있다. 이천시 설성면 장천3리에 선생이 사용했다는 '한천(寒泉)'이란 샘이 남아 있고 전주시 이서면에 선생을 배향한 용강서원이 있다.

선생의 호는 현재 문집이나 족보에서 모두 진일재로 쓰고 있지만, 전주 류씨 구보(舊譜) 상에는 '진을재(眞乙齋)'로 표기되어 있다. 일설에 선생은 여주 진을동(眞乙洞)에 산 적이 있었고, 그 지명을 호로 삼았다고 하지만 현재 진을동의 위치는 알 길이 없다.

진일재로 쓴 것에 대해16대 종손은, 행장을 지은 김진동(金鎭東)이 그렇게 표기한 데서 유래됐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진동은 봉화에 있는 진일재 선생의 터전과 이웃한 해저리(海底里, 속칭 바래미) 출신 학자요 정치가이기 때문에 믿을 만한 근거라고 생각한다.

칠서(七書)란 유가 경전의 기본으로 사서삼경을 말한다. 중국에서 만들어져 동양 성리학의 경전이 된 칠서는 진작에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다. 이를 토착화하려는 연구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우리말로 엮는 것이었으나 도입 후 1,000년 이상 우리의 고유문자가 없어 완전한 우리말로 번역되지 못했다.

다행히 훈민정음 창제를 계기로 보다 효율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방안들이 강구되었다. 그 첫발이 칠서의 토(吐)를 다는 과정이었고, 진일재가 작업을 담당했다.

사실 한문에는 띄어쓰기가 없어 토를 달기 위해서는 문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준 높은 학문과 고도의 언어 감각을 겸비해야만 가능한 작업이다.

토만 정확하게 달아도 문장 해석은 절반 이상을 마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만큼 토를 다는 작업은 힘들고 중요하다. 그 일을 진일재가 물꼬를 텄고 이를 바탕으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미암 유희춘, 한강 정구, 송강 정철 등 대표적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왕명으로 경전 등 언해사업의 큰 물줄기를 형성했다.

실록에 보면 진일재 사후인 철종13년에 좌의정 조두순은, "이조판서에 증직된 문목공 신(臣) 류숭조는 중종조의 명신(名臣)입니다. 칠서의 언해는 이 명신의 필생의 정력이 담겨진 것으로써, 그가 사문(儒學界)에 끼친 공로는 큽니다. 청건대 이상(貳相, 贊成)에 추증하고 경서(經書)에 힘쓰도록 격려하는 교서를 내리소서"라 진언했다.

이조판서의 증직은 그의 공로에 비하면 미흡하기 때문에 한 등급 높일 필요가 있다고 아뢴 내용이다. 칠서언해를 '필생정력'을 기울인 작업으로 평가한 뒤 경전을 열심히 읽게 하는 풍조를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진일재 선생을 기려야 한다고 강조한 말이다.



▲ 문집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