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방재청의 소방안전 시설 시행령에 업주들 강력 반발 여전

▲ 서울 잠실동 N고시텔 화재현장.
지난 7월 19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N고시텔에서 발생한 화재는 8명이 죽고 12명이 중상을 입는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도 참사 현장에서 받은 충격으로 이른바 ‘외상 후 스트레스증후군(PTSD)’에 시달리는 등 후유증을 앓고 있다.

N고시텔 참사는 같은 건물의 노래방 주인의 우발적인 방화로 빚어졌지만 화재에 취약한 고시원 구조와 소방안전 시설을 갖추지 않은 점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경기 불황 여파로 고시원, 고시텔, 원룸텔 등 저가형 ‘1인 거주 시설’이 인기를 끌고 노래방, PC방, 100인 이상 학원 등 다중이 이용하는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면서 화재로 인한 대형 참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더욱이 업주들이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소방안전 설비에 소홀하고 정부 또한 화재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 마련에 충분하게 대응하지 못한 측면이 있어 ‘위험성’이 상존하는 상황이다.

2002년 1월 전북 군산시 윤락업소 화재로 15명이 사망한 데 이어 2004년 수원의 M고시원에서 불이 나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정부는 그해 5월 29일,‘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제정하면서 기존의 다중이용 업소도 2006년 5월 30일까지 비상구 등 안전시설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비상구 등 안전시설 설치 의무화

시행령에 따르면 모든 다중이용 업소는 소화기, 유도등 등 소방시설과 방화시설, 방염물품 등을 구비하도록 하고 5층 이상의 층과 지하에는 비상계단을 설치하고, 마감재는 70% 이상을 불연재로 교체해야 한다.

하지만 대다수 업소는 “건축물 구조상 비상구를 설치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가뜩이나 장사가 안 되는데 소방. 방재 시설까지 돈 들여서 고치라는 것은 현실을 도외시한 탁상행정”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결국 소방당국은 영업주와 관련직능단체(고시원협회, 한국직능경제인단체총연합회)의 요구를 수용, 비상구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간이스프링클러 설비 등 안전시설을 설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시행령을 2007년 5월로 1년 더 연장했다.

아울러 소방방재청은 7월 24일부터 8월 11일까지 전국 4,100여 개 고시원에 대해 특별점검을 실시하는 한편 고시원 관련 중앙부처(복지부, 교육부, 건교부 등)들과 종합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소방당국이 소방시설 시행령 시행을 두 달 앞두고 1년 더 연장함에 따라 N고시텔 화재 참사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N고시텔을 감독하고 있는 송파소방서측도 “지난해 11월 소방점검을 나갔을 때 비상계단 미설치, 방염 내장재 미설치, 휴대용 비상등 설치 부족 등의 사항을 적발하고 시정할 것을 고시원 주인에게 권고했다”고 밝혀 그 같은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에 대해 소방방재청 소방제도팀 이윤근 소방령은 “시행령을 연장한 것은 안전시설 설치를 면제하거나 안전기준을 완화한 것은 아니고 비상구를 설치할 수 없는 건물이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며 “내년 5월 30일까지 전 비상구 등 안전시설 설치를 강력하게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근 소방령은 “내년 3월 25일 ‘다중이용업소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되면 소방시설 등 안전관리기준을 위반한 업소들에게 시정명령과 이에 따른 이행강제금을 부과하고 그래도 안 되면 소방방재청 홈페이지 등에 업소의 이름과 위치를 공개할 예정이어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업소 "현실 모르는 획일적 정책" 반발

하지만 다중이용업소들은 정부의 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며 반발한다.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고시원을 운영하는 김모(46) 씨는 “전국에 고시원이 수천개가 넘고 각양각색인데 일거에 불법 딱지를 붙이는 것은 문제”라면서 “설비나 용도에 따라 등급을 나눈 뒤 등급에 맞게 관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구에서 단란주점을 운영하는 최모(51) 씨는 “건물을 임대해 영업하는 영세업자들은 비상구 설치 비용도 부담이지만 건물주가 싫어하고 비상구를 열어둘 경우 도난이나 손님이 계산하지 않고 달아날 염려도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는 9월 5일 ‘대형건물 화재영향평가제’를 입법 예고, 정기국회를 통과하면 2008년 말이나 2009년 초에 시행된다. 이 법은 본래 2007년부터 시행 예정이었지만 관련 업체들의 반발에 따라 시행시기를 2년 정도 늦췄다.

소방방재청은 특별법 및 시행령을 통해 소방 안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갈 예정이다. 반면 업소들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안전 장치 마련을 수용하면서도 ‘현실’을 반영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소방방재 분야 전문가인 (주)타스콤케이 노경봉 대표는 “선진국은 대형 화재나 비상시 인명을 대피시켜야 할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데 반해 국내는 평소엔 비상구를 무용지물로 여기다가 사고가 난 뒤에야 비상문의 역할을 강조하는 풍조가 있다”면서 “오늘날 개인, 기업 나아가 국가의 경쟁력을 위해서도 사회 안전시스템 구축이 더 절실하다”고 말했다.

인터뷰 / 노경봉 ㈜타스콤케이 대표
"시행시기 연기는 위험한 결정"

▲ 노경봉 ㈜타스콤케이 대표

- 재난에 대한 정부의 인식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정부가 주도하는 법령 제ㆍ개정은 입법자가 적용시기를 특정할 수 있지만 재난은 법안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발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행시기를 자꾸 연기하는 것은 아무리 현실을 반영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또한 국회예산정책처의 재난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재해 복구에 60%의 예산을 재해복구에 쓰는 반면 일본은 예방에 재난 예산의 87%를 투자해 대조를 이룬다. 한국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반드시 끊어야 한다."

- 기업이나 자영업자들도 인식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물론이다. 인명피해를 동반한 재난 기업(또는 업소)은 더 이상 영업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소비자들도 재난에 대비하는 기업을 찾도록 의식이 성숙해 가고 있다. 재난방지 업무를 규제로 여겨야 할 이유가 없다."

- 비상구 대신 간이스프링클러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는데.

"정부나 업소는 스프링클러가 진화를 통해 피난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지만 화재발생 시 사망의 주원인은 유독가스다. 스프링클러가 비상구를 대신하기엔 한계가 있다."

- 대부분의 유흥업소들이 소방안전 시설에 취약하지 않나.

"유흥업소는 단기적인 사업성과를 위해 눈에 보이는 인테리어 위주로 시설투자를 하게 마련이다. 특히 비상구는 술값 떼먹고 도망가는 취객들을 방지하기 위해 굳게 잠겨있거나 접근 자체가 어렵게 돼 있는 경우가 많아 항상 인명피해로 연결될 수 있는 구조다. 더욱이 극히 일부지만 설치돼 있는 방화시설도 정전으로 제 기능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 많이 사람이 찾는 쇼핑센터 등 대형건물은 어떠한가.

"소방방재청이 최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소방시설 등 안전관리가 소홀한 대형건물은 할인매장이 25.7%로 가장 높고, 백화점 19.6%, 쇼핑센터 등 18.3% 순이다. 비상구 등 불법관리 대상은 백화점이 11.3%로 가장 높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 백화점이 화재 시 안전대책이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