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미명 하에 마구잡이 훼손, 동북공정 등 역사왜곡 대비한 보존대책 시급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분노와 논쟁으로 온통 떠들썩한 지금 이 순간에도 남한에 남아 있는 고구려 유적들은 하나둘씩 파괴되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경기도 연천군 일대 고구려 유적 답사여행에서 최근 돌아온 역사연구 동아리 회원 류모(32) 씨의 말이다. 류 씨는 “경기 일대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성곽과 유물들이 각종 개발공사를 위한 굴삭기의 굉음과 주민들의 방관 속에 급속하게 파괴되고 있다”며 “국내 몇 안 되는 고구려 유적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중국측이 오래 전부터 치밀한 계획 아래 추진하는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우리가 어떻게 맞설 수 있는지 우리 스스로 반문해봐야 한다”고 따끔한 충고를 던졌다. 말로만 중국에 맞서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이다. 물증이나 사료가 가장 중요한데 우리는 그것을 등한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북방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인의 기개가 서린 남한 내 유적들이 시나브로 역사 뒤로 스러져가고 있다. 오로지 우리의 무관심과 무지 탓이다. 택지개발이나 관광자원 개발, 등산로 개설, 석재 채취 등 갖가지 구실을 붙여 고구려 유적들을 짓밟는 행태가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남한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적지만 해도 어림잡아 40~70곳이다. 옛 고구려인의 삶의 물증인 유물이 발굴됐느냐 아니냐 등에 따라 유적지 수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조금씩 다르다.

고고학적 발굴이나 지표조사 결과 고구려 유적이 분포한 것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지역은 임진강 유역, 경기 양주, 서울 한강 이북 아차산ㆍ용마산 일대 등이다. 남한 지역 내 고구려 유적지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전방 초소’에 해당하는 성곽 형태로 된 소규모의 ‘보루’가 대부분이다.

정확한 실태 파악조차 안돼

고구려 유적 훼손이 가장 급격하게 진행 중인 곳은 경기 연천군 일대다. 이 지역은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지정문화재 외에도 무등리보루, 우정리성 등 크고 작은 유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유적의 보물창고’.

지정문화재의 경우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성격과 가치가 어느 정도 규명된 상태지만 비지정문화재는 정확한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 개발 바람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경기 연천군 왕징면 무등리 정대봉 꼭대기에 자리잡은 무등리보루. 현재 이곳 인근에서는 대규모 주택단지 조성을 위한 터잡기 공사가 한창이다. 능선의 경사면을 굴삭기로 깎아내고 곳곳을 파헤쳐 놓아 유적지의 상당 부분이 허물어지고 망실되고 있다. 보루 안쪽엔 성벽을 쌓았던 석재인 유구와 토기 파편들이 흙 속과 땅바닥 여기저기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인근 우정리보루도 사정은 마찬가지. 고구려계 토기들이 발견된 이곳에서도 중장비를 동원한 무자비한 암반 절개 공사로 유구들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는 데다가 성벽 붕괴를 막을 보호시설조차 갖추지 않아 언제라도 무너져내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태다. 국가사적 468호로 지정된 당포성의 경우 성벽은 온전한 편이지만 입구에 시멘트 구조물을 만드는 공장이 들어서 있어 주변 경관을 크게 해치고 있다.

▲ 택지조성 공사를 위해 파헤쳐지는 연천 무등리 보루(위)와 헬기장이 들어선 아차산 4보루.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경기 구리시 일대의 아차산, 용마산 등 보루들은 등산로 개설과 군 헬기장 건설에 따라 극심한 파괴와 훼손이 벌써 상당 정도 진행된 상태다.

아차산 4보루, 용마산 4ㆍ5보루, 망우산 1보루에는 헬기장이 들어서 있고 시루봉 보루는 군사용 참호 때문에 성벽 전체가 망가졌다. 그동안 누차 지적받았던 서울 근교 아차산 및 용마산의 1ㆍ2ㆍ3ㆍ4 보루의 경우 유적지에 등산로가 버젓이 나 있어 당국의 유적 보호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지금이라도 등산객들의 우회로 이용이 절실하다.

그나마 해당 구청이나 시청 등에서 유적지 입구의 등산로에 ‘출입금지’ 또는 ‘우회로 이용’ 등의 안내판을 붙여놓고는 있지만 편안한 직선코스를 타려는 등산객들이 이를 외면하고 있어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아차산 정상부에 있는 4보루의 경우는 등산객들이 쉴 수 있는 의자까지 설치돼 있다.

골재나 석재 채취의 후유증으로 붕괴 위험에 처한 것들도 있다. 경기 양주 지역 독바위 보루와 도락산 2보루가 이에 해당한다. 이 지역 천보산 보루가 1996년 이동통신 기지국이 들어서면서 유구들과 유물들이 대거 파괴된 사실은 이미 언론에 널리 알려진 사실.

10여 개의 크고 작은 보루들이 밀집한 양주 지역의 경우 그동안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경기도박물관 등에 의해 수차례 조사가 이뤄졌으나 현황 파악만을 위한 지표조사에 그쳐 유적의 성격에 대한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구려 보루의 훼손 우려와 관련, 고구려 고곽 전문가인 경기문화재단 백종오(38) 학예연구사는 “며칠 전 발표된 군사보호구역 축소 방침에 따라 그나마 군사지역이란 규제의 울타리 안에서 간신히 현상태를 유지하던 일부 유적들조차 앞으로 급속히 파괴될 것은 불보듯 뻔하다”고 우려를 표명하면서 연천 무등리 1ㆍ2보루, 우정리보루, 양주 태봉산과 불곡산 보루 등을 조속히 사적지로 지정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고구려 문헌사 연구 전문가인 외국어대 사학과 여호규 교수는 “고구려 유적에 대한 발굴작업도 중요하지만 더 이상의 훼손을 막는 게 급선무다”며 “정부나 지자체가 나서 사유지 매입 등의 보존대책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로만 고구려가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다고 하여 중국이 동북공정을 멈출 것 같지 않다. 모든 것은 구체적인 역사 연구 결과와 물증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남한 내 고구려 유적 발굴과 보호는 중요하며 국민들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송강섭 차장 speci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