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이씨 동고 이준경, 1499년(연산군5)-1572년(선조5)

▲ 묘소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元吉), 호는 동고(東皐), 시호는 충정(忠正).

조선 시대에 순탄한 길을 걸어 영의정에 이르고 두드러진 업적까지 남긴 이는 흔치 않다. 또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영의정에 이른 이도 드물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란 정승이 있었는데,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영의정에 이른 이다. 그런데 그조차 30대에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21년의 인고의 긴 세월을 보낸 뒤 다시 돌아와 영의정이 되었다.

온갖 시련을 겪고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해 이룬 성취란 것을 알 수 있지만, 대부분의 관리들은 자신이 막상 그런 일을 당하면 길은 보이지 않고 이내 울분으로 세월만 보내 끝내 몸을 망치고 가문을 일으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동고 이준경의 가문인 광주 이씨는 서울을 대표하는 문벌로 혁혁한 집안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팔극조정(八克朝廷, 조선 중기에 광주 이씨 중에 克자가 들어간 현달한 여덟 사람이 조정의 중요한 자리에 포진해 있었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라고 그 현달함을 기렸다.

고조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 증조부는 형조판서 광성군(廣城君) 이극감(李克堪), 조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광양군(廣陽君) 이세좌(李世左), 부친은 수찬을 지낸 이수정(李守貞:1477-1498)인데 연산군 대에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조부와 부친이 함께 죽임을 당했다.

당시 형인 숭덕재(崇德齋) 이윤경(李潤慶:1498-1652)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는데, 멸문지화의 비운을 6세의 어린 나이에 겪었다. 그 어린 나이에 참혹한 가화(家禍)를 입은 동고의 장래는 칠흑과 같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러나 어둠 속의 동고를 밝음으로 이끈 이가 있었으니, 역사에는 알려지지 않은 어머니 신씨 부인이다. 흔히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꼽지만 적어도 현모(賢母)로서 동고의 모친인 신씨 부인의 공은 사임당에 뒤지지 않는다. 사임당과 같은 평산 신씨인 모친은 기초교육에 부심했고, 친정 아버지인 신승연(申承演)의 교도(敎導)도 큰 힘으로 작용했다.

16세에 풍산 김씨 김양진의 딸과 결혼한 뒤 청망(淸望)이 높았던 종형(從兄)인 탄수 이연경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 매진했다. 그리고 19세 때는 형과 함께 정암 조광조를 찾았고 24세 때 생원이 되고, 모친의 명으로 33세 때 문과 을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어린 시절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요 관료였던 수부(守夫) 정광필(鄭光弼)과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으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관직 생활 역시 순탄치는 못했다. 김안로 일파와 타협할 수 없었던 그는 파직과 유배로 이어졌고 이기, 임백령 등 바르지 못한 이들에 의해 한직이나 외직으로 밀려 있기도 했다. 45세에 대사성, 50세에 병조판서, 56세에 이조판서, 57세에 우찬성, 60세에 좌찬성에 이어 우의정, 62세에 좌의정, 67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그가 조정 대신으로서 이룬 업적 가운데는 인재 등용과 선현에 대한 예우, 부패한 권력에 대한 응징을 들 수 있다. 윤원형의 죄를 물어 삭탈관직해 ?았고,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죄를 입은 이들을 해배(解配)하고 복권시켜 다시 조정으로 불렀으며, 정암 조광조와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등을 기리는 문제를 풀고, 한훤당 김굉필과 정암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주장했다.

모두가 크게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은 일이었고 하나같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으나 이를 무난하게 관철했다. 이는 오랜 세월동안 쌓았던 포용력과 아울려 그에 대한 국왕의 신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조정에서 동고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569년 3월 사직하고 향리인 안동 도산 토계마을로 돌아갈 때 연소한 나이로 즉위한 선조에게 동고를 적극 추천했던 사실만 보아도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붕당 타파" 임금에 상소

74세 때 7월 한 달여를 병석에 누워 있는 동고는 의원을 물리친 뒤 "내 수명은 다하였다. 어찌 약을 먹어 목숨을 연장할 수 있겠느냐. 오직 우리 임금께 한 말씀 올리고 싶을 뿐이다"라며 네 가지로 요약해 선조에게 상소했다. "첫째, 제왕은 무엇보다 학문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둘째, 아랫사람을 대할 때 위의(威儀)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군자와 소인을 분간해야 합니다. 넷째, 사사로운 붕당을 깨뜨려야 합니다." 일견 평범한 내용 같지만 정곡을 찌른 말이다.

특히 마지막의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말은 동고가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어서 그 논조가 더욱 거침이 없다. "신이 보건대, 오늘날 사람들은 간혹 잘못된 행실이나 법에 어긋난 일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 한마디가 자기 뜻과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으며, 행검에 유의하지 않고 독서에 힘쓰지 않더라도 고담(高談) 대언(大言)으로 붕당을 맺는 자에 대해서는 고상한 풍치로 여겨 마침내 허위 풍조를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군자는 모두 조정에서 집정하게 하여 의심하지 말고 소인은 방치하여 자기들끼리 어울리게 해야 하니, 지금은 곧 전하께서 공정하게 듣고 두루 살펴 힘써 폐단을 없앨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는 이 글로 인해 당시를 대표하던 율곡 이이 등 신진 사류들에게 통렬한 공박을 받았지만 역사적으로는 후일을 내다보고 대비책을 미리 알린 속 깊었던 정승의 처사로 자리매김되었다.

▲ 행장과 한글행장

명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그가 선조의 묘정(廟廷)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와 함께 배향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430여 년 전 74세의 전임 정승이 숨을 몰아쉬며 썼을 '회고와 전망'은 현실에 적용해도 좋을 방책이라고 생각한다. '탁월한 선견지명'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장면이다. 그럼에도 동고가 그처럼 부식(扶植)하고자 했던 사림들로부터 도리어 비정하리만치 독한 지탄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이 읽은 내용이 이 구절이 아니었을까?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 35-1이며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사후에 신도비는 영의정 소재 노수신이 지었고 선조18년(1585)에 건립됐다.

문집은 1586년 청주에서 초간(初刊)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거개가 소실되었고, 1706년 함흥에서 중간되었으며, 1913년 남원에서 세 번째 책이 나왔는데 모두 14권 7책 분량이다. 1986년 수원대학교 동고연구소에서 2책으로 국역 간행한 바 있다.

인조25년에 사림들에 의해 구계서원(龜溪書院, 증평군 증평읍 남차리 산9번지 소재)에 배향되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