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총풍'사건, 장석중 씨 "당시 고문 당해"… '검찰·조서 재판' 문제점 드러날지 관심

▲ 장석중 씨
최근 ‘공판중심주의’를 둘러싼 법원-검찰-변호사협회 간 험악한 힘겨루기가 지난달 28일 이용훈 대법원장의 우회 사과로 일단락됐지만 불씨는 여전하다.

특히 검찰이 작성한 수사기록에 무소불위의 증거능력을 부여해온 ‘조서 재판’관행이 달라지지 않는 한 법정이 아닌 검사실이 사실상 피고인의 유·무죄를 결정짓는 폐해가 지속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하려는 것도 그러한 현실을 타개하고 실체적 진실 발견을 통해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시도로 풀이된다.

최근 공판중심주의가 표류하는 현실에서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전국에 충격을 몰고온 이른바‘총풍(銃風)’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총풍 사건이란 9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한성기ㆍ오정은ㆍ장석중 3인이 중국에서 북측 인사들을 만나 판문점에서의 총격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당시 여권은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 이회창 총재와 한나라당을 몰아부쳤고, 한나라당은 “고문에 의한 조작된 사건으로 당과 총재를 죽이려는 공작”이라며 강력하게 대응했다.

총풍 사건은 1심에서 ‘총풍’의 실체를 인정해 관계자들에게 실형을 선고, 구속했으나 2심에서는 총격요청을 한성기 씨의 돌출행동으로 보고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더욱이 검찰이 집요하게 주장한 ‘배후’와 ‘총격 요청’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실체가 없는 ‘해프닝’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대법원은 2003년 7월 “이들(3인방)이 사전 모의나 조직적인 무력시위 요청을 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들이 대선과 관련된 북한 동향을 알아보기 위해 북측 인사를 만난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당시 여야 및 재판에서 최대 쟁점의 하나는 대북교역사업가 장석중 씨에 대한 ‘고문’ 여부였다. 고문이 사실이라면 총풍은 여권이 야당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 되고 반대로 고문이 없었다면 야당의 정치공세로 귀결돼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됐다.

장 씨는 98년 9월 5~7일 사이에 국정원(옛 안기부) 수사관이 고문 및 가혹행위를 했다며 그 증거로 고문 상처를 찍은 사진을 제시했고 고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국정원 수사팀장 박모 씨 앞에서 작성한 진술서, 진술조서, 피의자 신문조서 등을 제출해줄 것을 검찰에 요구했다.

장 씨가 3가지 서류를 요구한 것은 고문에 못이겨 조서를 작성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장 씨는 국정원 수사관이 한성기 씨 진술조서(98년 8월 31일~9월 5일 작성)를 불러주는 대로 옮겨 적거나 수사관이 복사 후 가위로 중요 부분만 오려붙여서 그대로 적으라고 해 자신의 진술서와 한성기 씨의 그것과는 토씨 하나, 단어, 배열까지 똑같다는 것이다.

장 씨는 “고문을 입증하기 위해 본 재판부에 9월 5~7일까지 고문 중에 작성한 진술 제반서류를 요청했으나 박모 주임검사는 ‘국정원에서 그러한 서류의 존재 유무를 확인해 주지 않아 제출할 수 없다’고 해 변호인단이 ‘이런 재판은 받을 수 없다’며 재판기피신청까지 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 씨가 요구한 국정원 조사 서류는 예상 밖의 곳에서 나타났다. 장 씨는 국가를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사건을 진행하면서 지난 7월 17일 천정배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총풍 사건 재판기록 및 고문관련 기록에 대한 문서송부촉탁을 요청했다. 이에 법무부는 7월 24일 관련 자료를 장 씨에게 제공했는데 거기서 (장 씨가 주장하는)고문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장 씨를 조사했던 국정원 수사팀장 박모 씨는 99년 1월 5일자 진술조서에서 “장석중을 상대로 진술서, 진술조서, 피의자신문조서를 동시에 받았다”고 밝히면서 “진술조서는 장석중에 대한 구속방침이 정해지면서 기록에 편철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국정원이 장 씨를 상대로 조사한 진술서, 진술조서, 피의자신문조서가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장 씨는 “그런데도 검찰이 내 진술서류를 내놓지 않는 것은 한성기 씨의 것과 똑같아 ‘고문’이 입증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재판정에 한성기ㆍ오정은 씨의 진술서류는 내놓으면서 내 것만 빼는 것은 ‘고문’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 씨는 자신을 조사했던 국정원 박모ㆍ백모ㆍ강모ㆍ이모 수사관이 검찰조사에서 한결같이 “장 씨는 국정원 공작원이었기 때문에 고문할 이유가 없었다”고 진술한 데 대해 “난 국정원 공작원도 아니며 그들 주장대로 공작원이라면 대북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대법원이 총풍 사건 재판에서 그런(대북정보를 수집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위반했다고 판시한 것은 잘못”이라고 반박했다.

장 씨는 “고문 사건을 수사한 황모 검사는 99년 1월 국정원 수사관에 대한 조사에서 나에 대한 진술조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면서 “같은 해 3월 총풍 사건을 수사했던 박모 주임검사가 내 진술조서가 존재하는 지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사실을 은폐한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 장석중씨가 지난 7월 천정배 법무장관에게 보낸 탄원서와 법무부의 회신(왼쪽)과 총풍사건 당시 작석중씨를 조사했던 국정원 수사팀장 박모씨의 1999년 1월 5일 진술조서.
▲ 장석중씨가 지난 7월 천정배 법무장관에게 보낸 탄원서와 법무부의 회신(왼쪽)과 총풍사건 당시 장석중씨를 조사했던 국정원 수사팀장 박모씨의 1999년 1월 5일 진술조서.

장 씨는 9월 5일 국정원의 고문이 있기 전까지 98년 1월 30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방북문제를 타진하기 위해 열흘간 평양에 다녀왔고 5월에는 옥수수박사 김순권 씨와 대북 옥수수씨 지원 문제로 다시 북한을 방문했다. 그리고 7월 10일 강인덕 당시 통일부 장관을 만나 대북 접촉 관계를 논의했고 8월 6~8일 국정원에서 관계자들과 대북사업 전반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8월 말 방북허가가 나와 대한통운 고위관계자와 9월 28일의 방북을 준비하던 중 9월 5일 갑자기 국정원에 끌려갔다고 한다.

장 씨의 행적과 정부 기관과의 관계를 따져볼 때 정부가 98년 10월 총풍 사건을 발표하면서 그해 3월부터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었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장 씨는 검찰 및 재판부가 ‘북측 관계자와 접촉한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논거에 대해 “대북사업을 하면서 매일 국가 정보기관에 사실을 보고했다”면서 “베이징에서 만난 북측 관계자는 현재 남북장관급회담 북한 대표인 권호웅 등으로 고 정주영 명예회장 방북과 국내 기업의 대북투자에 대해 논의했고 한성기 씨가 따로 북측 관계자를 만나 정치 얘기를 해 핀잔을 들었다”고 해 총풍과 무관함을 강조했다.

당시 총풍 사건을 담당했던 박모 부장검사는 몇차례 연락을 취했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접촉을 피했다. 다른 검사는 “이미 끝난 사건을 재론하고 싶지 않다”면서 “검찰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총풍 사건 내내 검찰은 유리한 조서는 적극 활용하면서 불리할 수 있는 조서는 제출을 않거나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나 최근 당사자인 장 씨의 진술조서 등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고문을 둘러싼 진실게임이 재연될 전망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김대중 정부 시절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총풍 사건이 정국에 태풍을 몰고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총풍 사건에서 공판중심주의는 검찰의 독주로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이제 사건이 새 양상을 띄면서 공판중심주의가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를지 주목된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