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모델협회에 가입, 분과 발족… 전문 직업군으로 활동 선언레이싱 스포츠계선 "자기 밥그릇 챙기는 이기적 행동" 비난도

“우리를 더 이상 레이싱 걸이라 부르지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레이싱 모델입니다.”

최근 레이싱 걸들이 앞장서 한국모델협회에 가입하면서 레이싱 스포츠계에 ‘잔잔한 태풍’이 일고 있다. 레이싱 걸에서 레이싱 모델로의 변신이 ‘레이싱 스포츠의 발전을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레이싱 스포츠의 부진을 외면한 단체행동 아니냐’는 부정론이 엇갈리고 있다.

‘레이싱 모델’이란 공식 용어가 등장한 것은 지난 8월 31일. 레이싱 걸 50여 명은 이날 서울 압구정동 문화복지회관에 모여 한국모델협회 레이싱 모델 분과에 가입한다고 공식 발표하고 이어 레이싱 모델 홍보단인 ‘가데스(Goddess)’ 창단식도 함께 치렀다.

이들의 레이싱 모델 분과 가입 취지는 레이싱 모델의 전문화와 직업군으로서 법적 제도화를 통해 기존 레이싱 걸의 지위를 새롭게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 한국모델협회 양의식 회장은 “레이싱 모델도 모델의 한 분야로 모터쇼나 레이싱 경기장 혹은 자동차의 전반적인 광고 전략 홍보이미지 모델과 다름없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오미란 한국모델협회 이사가 홍보대사로 있는 소아백혈병 자선단체인 ‘사랑의 손길’ 행사도 함께 진행된 이날 발족식 및 창단식에는 한국모델협회 이사와 운영위원들, 패션 CF 모델, 자동차 레이싱 업계 인사 등 2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레이싱 모델 분과의 출범으로 당장 달라지는 것은 레이싱 걸들의 처우 개선이다. 우선 해외 취업할 경우 모델협회를 통해 취업 비자 발급이 용이해지고 레이싱 걸로서의 근무 경력도 인정을 받게 된다. 대학의 모델 학과에 입학할 경우에도 예전과 달리 앞으로는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또 보험이나 금융 결제를 비롯, 일부 레이싱 걸들과 레이싱걸 매니지먼트사와에 발생했던 임금 체불 문제를 처리하는 데도 훨씬 수월해질 것으로 보인다.

모델협회 윤선혜 레이싱분과장은 “레이싱 걸들이 정식 모델로 불려지기를 그간 간절히 원해왔다”며 “레이싱 걸로서의 활동이 하나의 문화 활동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 같아 모두들 기뻐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스스로 하기에는 힘이 부족했지만 모델협 분과로 편입됨으로써 법적, 제도적 신분 보장과 보호막을 갖추게 됐다는 것. 윤선혜 분과장은 “때문에 평소 같이 모이기도 힘든 50여 명의 레이싱 모델들이 이날 발족식에 자리를 함께 한 것만 봐도 이들의 관심과 열의를 읽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이들은 “레이싱 모델이라는 직업이 최근 단기간에 급부상돼 왔지만 잘못된 인식과 방향으로 보여지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다”고 그간 겪었던 고충을 털어놨다.

즉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으로 레이싱 걸들이 ‘새로운 스타군’으로 떠올랐지만 그에 반해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는 것. 레이싱 걸들의 활동이 기업의 홍보 전략면에서는 효과적으로 사용돼 왔지만 반면 레이싱 모델들의 권리는 확립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가데스 홍보단 엄미선 씨는 “기업의 홍보 전략이 아닌 상업적으로 유해한 사이트 또는 광고에 레이싱 걸들의 사진이나 모습이 자연스럽게 쓰여지고 있어 레이싱 모델들은 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고 말한다.

또 가데스 홍보단 정윤희 씨는 “우리는 당당하게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데 엉뚱한 사이트나 광고에 음란한 댓글과 함께 사진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엄청나게 상처받는 동료들이 많다”고 털어 놓는다. 한마디로 왜곡돼 있는 레이싱 모델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모델협회 가입을 통해 새출발을 한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하지만 레이싱 걸들의 모델협 가입과 모델로의 신분 변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아직은 만만치 않다.

레이싱 스포츠계 일부에서는 “레이싱이 스포츠로서 어려운 시련기를 겪고 있는데 굳이 레이싱걸들이 나서서 자신의 권익 신장만을 챙기는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이들은 특히 “올해만 해도 레이싱 프로대회가 후원 기업을 찾지 못해 스폰서 없이 빈 호주머니를 털어 대회를 벌이고 있는 마당에 레이싱 걸들이 모델로 나선다고 레이싱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반문한다.

일부에서는 레이싱 걸들이 받는 임금이 일당이긴 하지만 적은 금액이 아니라는 점도 지적한다. 그동안 단순 노무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처우 개선까지 요구할 정도로 낮은 수준은 아니라는 것.

특히 이들의 일자리를 소개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레이싱 걸 매니지먼트사나 이벤트 대행사에서는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며 “주요 메이저 레이싱 팀 레이싱 걸들이 협회 행사에 많이 참가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들이 모든 레이싱 걸들을 대변할 대표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레이싱 걸들의 대외활동을 지나치게 풀어놓은(?) 덕에 지나친 관심을 받게 됐고 상대적으로 레이싱 주체인 레이서들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주장을 내놓는 이들도 있다. 실제 국내 레이싱 경기는 올해 대회 스폰서가 끊기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관중은 급감했고 대회도 그나마 프로 경기는 1개, 나머지 4개는 아마추어 대회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레이싱 모델측도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있다. “레이싱 스포츠가 활성화돼야 레이싱 걸들의 입지도 확대된다는 것을 저희도 잘 알고 있어요.”

정윤희 씨는 “레이싱 시장이 축소되고 있는 문제를 레이싱 모델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며 “모델들도 제살깍기식으로 우리들만 잘 되려는 건 절대 아니다”고 강조한다. 레이싱 모델 봉사단체인 사랑회(회장 황시내)를 조직, 불우이웃돕기 행사도 펼치는 등 적극적인 행보에도 나서고 있는 것도 그런 부정적인 시각을 불식하기 위한 행보다.

또 이들은 레이싱 모델 활동에 대한 반발도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외부의 돈 줄을 독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협회에 붙어서 뭔가 별도의 사업을 하려고 한다” 등이 주변에서 듣는 비아냥거리들. 윤선혜 분과장은 “발족식 때부터 부정적인 말을 많이 접해 문제를 잘 알고 있다”며 “결국 오해는 풀릴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레이싱 스포츠팀이나 대회 주최측에서는 아직까지는 차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레이싱 모델의 출범을 놓고 공식적인 언급이나 논의가 이뤄진 것은 없는 양상.

이레인 스피드팀의 이승헌 대표는 “그동안 레이싱 걸들이 불이익을 당해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모델협회 가입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도 없다”며 “레이싱 모델들 입장에서는 어쨌든 전문화된 직업인으로서의 진로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중립적인 견해를 밝혔다.


박원식 차장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