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114대 종손 김시인(金時寅) 씨 - 후손들 종가 중심으로 화합… 차종손은 지금도 門外拜 실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종가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만 크게 ▲선생의 삶과 학문 ▲400년을 이어온 종가 사람들의 구국활동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를 근자에 어떤 작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라는 시각으로 종가를 소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필자는 여러 번 종택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사랑채 정면에 걸린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현판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규모가 크지도 않을 뿐더러 글씨 또한 아담하다. ‘박약진전(博約眞詮, 박약의 참된 깨달음)’. 자세히 풀이하면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요약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음’ 정도의 의미다.

‘박약’은 일반인에게 생소한 말이다. 특히 한글로 표기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인 박약(薄弱)과 헷갈린다. 그래서 1987년에 출범한 사단법인 박약회는 아직까지 정체성에 대해 오해를 받기도 한다.

‘박약’이란 한마디로 유학의 핵심이다. 이를 송나라 주자(朱子, 1130-1200)가 이어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퇴계 이황(1501-1570)이 계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동쪽 공부방(東齋) 이름도 박약재(博約齋)이고, 유학의 본질을 배우고 이를 실천하자는 취지로 결성한 모임도 박약회였다.

만약 사회에서 이 단어가 공자로부터 내려오는 학문의 정통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단법인 박약회에서 그렇게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박약재라는 방 이름도 정암 조광조를 모신 전남 화순의 죽수서원(竹樹書院)에서만 쓰고 있다.

퇴계는 도학 적전(嫡傳)을 이은 분으로서 정암을 존경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학봉 종택에 걸린 ‘박약진전’이란 현판은 학문의 적전을 계승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이 현판을 주목한 이유다.

‘박약진전’에 대한 계승 문제에 직접적인 이견을 표시한 글이 있기에 흥미롭게 읽었다. 우복 정경세의 문집 별집에 실린 우산서원(愚山書院,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었던 서원) 봉안문(奉安文)에서 ‘박약진전’을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을 쓴 이는 서애 류성룡의 후손 학서 류이좌(柳台佐, 하회 북촌 주인으로 서애 6대손. 대사간에 이름)다.

학서는 ‘주자의 심학(心學, 性理學)과 박약진전을 퇴계 선생이 창명(倡明, 창도해서 밝힘)했고 서애 할아버지(厓老)가 이를 전해 도가 실추되지 않게 했으며 이를 선생이 계승했다’고 추앙했다. 여기서 ‘선생’은 서원에 새롭게 배향하는 우복을 말한다. 우복은 서애의 수제자였다. 학서의 견해로 보면, 박약진전은 서애가 이었고 이를 우복이 계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봉 종가에는 이를 반박하는 아주 든든한 ‘물증(物證)’이 남아 있다. 이는 퇴계병명(退溪屛銘, 題金士純屛銘)이다. 학봉의 도학 연원(淵源)을 계승한 대산 이상정은 이 병명을 “퇴도 노선생(이황)의 병명(屛銘)을 첨부하여 연원을 전해 부탁한 실제를 드러내었으니, 후대 사람들이 이를 잘 읽어 보면 무언가 얻는 바가 있을 것으로, 반드시 마음속에 융합되는 바가 있어 옷자락을 잡고 문하에 나아가서 친히 말씀을 듣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의미를 부여했다.

병명은 모두 80자가4자 대구(對句)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정은 마지막 구절인 ‘박약양지(博約兩至) 연원정맥(淵源正脈)’. 이 구절로 인해 후일 학봉 종가는 물론 유림사회에서 도학의 적전을 유념한 스승 퇴계의 징표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견도 있었고, 이는 학문적 토론과 논쟁으로 길게 이어졌다.

현재 이 글은 퇴계집 권44와 학봉집 부록 권3에 함께 실려 있다. 당시 퇴계 나이 66세, 학봉은 29세였다. 완숙한 학자와 문과 급제를 앞둔(학봉은 31세에 급제) 신진 학자 간의 의미있는 만남이었다.

공경과 정일로서 덕 이룬 인 요순(堯舜)이요 / 堯欽舜一
두려움과 공경으로 덕 닦은 인 우탕(禹湯)이네 / 禹祗湯慄
공손하고 삼감은 마음 지킨 문왕(文王)이요 / 翼翼文心
호호탕탕 드넓음은 법도 지킨 무왕(武王)이네 / 蕩蕩武極
노력하고 조심하라 말한 인 주공(周公)이요 / 周稱乾惕
발분망식 즐겁다 말한 이는 공자(孔子)였네 / 孔云憤樂
자신을 반성하며 조심한 인 증자(曾子)이요 / 曾省戰兢
사욕 잊고 예(禮)를 회복한 인 안자(顔子)였네 / 顔事克復
경계하며 조심하고 혼자 있을 때 삼가서 / 戒懼愼獨
명성으로 지극한 도 이룬 인 자사(子思)요 / 明誠凝道
마음을 보존하여 하늘을 섬기면서 / 操存事天
바른 의로 호연지기 기른 인 맹자(孟子)였네 / 直義養浩
고요함을 주로 하며 욕심 없이 지내면서 / 主靜無欲
맑은 날 바람 비 갠 뒤 달인 염계(濂溪)요 / 光風霽月
풍월을 읊조리며 돌아오는 모습에다 / 吟弄歸來
온화하고 우뚝한 기상 지닌 명도(明道)였네 / 揚休山立
정제된 몸가짐에 엄숙한 품격으로 / 整齊嚴肅
전일을 주로 하여 변동 없은 이 이천(伊川)이요 / 主一無適
박문에다 약례까지 양쪽 모두 지극히 하여 / 博約兩至
연원 정통 이어받은 그 분은 주자(朱子)셨다네 / 淵源正脈

이 병명은 모두 5장의 목판에 앞뒤로 새겨 종택 운장각(雲章閣)에 보관하고 있다. 아쉽게도 퇴계가 손수 쓴 글씨 원본은 단 두 폭 16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영남에서는 이를 탁본해 병풍으로 만들어 제병(祭屛)으로 사용하는 집이 많았다. 그런 유습을 이어받아 종손의 맏며느리(李點淑 여사, 퇴계 宗女)는 3년간 동양자수로 글씨를 새겨 10폭 병풍으로 만들었고, 현재 학봉 선생 불천위 제사 때 사용하고 있다.

'천년불패' 땅에 90여칸 짜리

학봉의 종택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속칭 ‘검제’에 2,000여 평의 대지에 90여 칸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현재 종택에는 14대 종손 김시인(金時寅, 1917년생) 옹이 살고 있다. 종손은 학봉 직손(直孫)이 아니다. 그래서 살던 곳도 검제가 아닌 임동면 지례였다.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946)은 독립운동을 은밀히 도운 사실이 알려져 1995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실상을 모르는 이들은 ‘파락호’라고 손가락질했다. 무남독녀 외딸만 두어 후사를 잇지 못하자 촌수가 가까운 이를 두고 100리나 떨어진 곳에 사는 현 종손을 맞았다.

1946년 29세였던 종손은 이미 결혼을 했고, 슬하에 아들 둘을 둔 상태였다. 본가에서 양자를 허락하지 않자 윤번을 정해 7개월여를 빌었다는 이야기는 눈물겨운 미담으로 전해진다.

학봉 종가가 있는 검제를 풍수가들은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라고 부른다. 1,000년 동안 길이 번성할 터전이라는 것. 달리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 즉 ‘전쟁, 기근, 전염병이 들지 않는 복된 땅’이라고도 말한다.

그런 좋은 터임에도 불구하고 수차례의 양자가 있었고, 13대 종손은 또 자신의 대에 이르러 나라가 망했으며, 남몰래 독립운동 자금을 대느라 살림이 기울었고, 종택까지 처분해야만 했다. 더구나 종손의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인 대를 잇는 일도 이루지 못했다.

10세 때 조부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학봉 11대 종손. 1827-1899) 선생이 왜경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목도하고 ‘복수를 가르치겠다’는 다짐을 했던 그는 문충고택(文忠古宅)이요 박약진전(博約眞詮)인 학봉 종택을 길이 계승할 적임자를 찾기 위해 부심했을 것이다.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는 지인지감(知人之感, 사람을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

▲ 종손 김시인씨
▲ 박약진전 현판

현 14대 종손 김시인 옹은 영남 종손의 표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를 만나면 선비의 ‘기품’이 느껴진다. 늘 온화한 모습에 언소(言笑)가 적다. 생활도 검소하다. 섬돌에 가지런히 놓인 검정고무신이 압권이다.

평소 별로 말씀이 없으신 종손께서 하루는 필자의 외조부(權五德, 1912-1972)에 대해 말했다. “그 어른은 점잖았고, 선비셨어.” 기억으로는 외조부는 송암 권호문 선생의 후손인 관계로 배향한 서원인 청성서원(靑城書院)의 문사를 살폈고, 처가인 창원 황씨(영주 대룡산, 황귀암 집) 집에서 글을 읽어 초년에 이미 선비의 반열에 올랐다. 불행히 일찍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년간 자리에 누워있다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외조부의 삶을 기억해 필자를 더 가깝게 대한 것이다.

학봉 종가는 종가와 지손들 간의 틈새가 없다. 이미 종손의 증조부 대에서 재산을 정리한 터고 또 남은 토지라 해도 경북 북부 오지인 탓에 안동 도심과는 멀어 재산 때문에 다툴 일이 없었다.

학봉 후손들은 종가를 위하는 마음이 한결같다. 김흥락 선생 장례 때 모인 조문객이 4,000명이었는데, 각기 기정을 위해 가져온 대구포가 고방에 가득했을 정도였다 한다. 그리고 87년 유물전시관 개관식 때, 95년 김흥락 선생과 조부 김용환 옹의 독립훈장 추서 사당 고유 때, 99년 김흥락 선생 100주년 추모와 2000년 11월 기념 강연 때 각각 1,000여명이 전국에서 모였다.

학봉 선생 불천위 제사 때는 100여 명이 참제(參祭)한다. 이때 일정 기준 이상의 성취가 있는 후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제사에 앞서 사당에 고유하는데, 그러한 의식이 의미도 있으려니와 보기에도 흐뭇하다. 불천위 제사는 더욱 엄숙하게 거행된다. 제상 뒤로 내걸리는 백세청풍(百世淸風)과 중류지주(中流砥柱) 대자 탁본 족자는 선생의 정신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고물(古物)이다.

제사 땐 전국서 100여명 참석

70년대 이전까지 학봉 종가의 사랑방은 과객들로 넘쳐났다. 이는 학봉 종가가 영남 유림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무관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종손과 종부의 역할이 컸다.

93년에 작고한 종부 한양 조씨(趙畢男 여사, 경북 영양 사도실 출신)의 베푸는 안살림은 유림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는 삶이었다. 특이하게도 종손 부부는 생년월일이 같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차종손 김종길(金鍾吉, 1941년생) 씨는 안동사범, 고려대를 졸업했고 학군1기로 군복무를 마친 뒤 두루넷 사장, TG삼보컴퓨터 부회장을 역임했다. 차종손은 타고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종인들은 물론 유림에서도 명성이 높다. 근자에는 한문과 서도에 진력하여 시 수백 수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나오는 명문 수십 편을 암송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암송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보다 필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한번은 차종손을 따라 종가를 방문했는데, 차종손은 ‘문외배(門外拜)’를 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예법에 부모에게는 문 밖에서 절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는 설날 부실한 시골집 문 밖에서 절을 한 후 방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영남에서는 아직도 일부에서나마 문외배를 행하고 있다. 그런데 차종손의 문외배는 생활 그 자체였다. 그러한 정신이 일선에서 은퇴한 뒤 그 어렵다는 한문을 외우게 하고 다시 붓을 잡아 법필(法筆)을 익히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초점은 분명 ‘박약진전’에 맞춰진 느낌이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