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기행 21]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

▲ 학봉 친필
퇴계 선생이 1569년(선조2) 임금과 조정 중신들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향리인 안동 도산(陶山)으로 돌아가면서 추천한 인재 세 사람이 있다. 동고 이준경, 고봉 기대승, 그리고 학봉 김성일이다.

동고는 2년 연상으로 영의정에 이른 이고, 고봉은 26년 후배로 퇴계의 대표적 제자며, 학봉은 향리의 37년 후배로 수제자다. 함께 추천한 동고와 고봉은 불화로 이듬해 결별했고, 학봉은 22년 뒤인 1591년에 일본 통신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복명한 일로 곤경에 처했다.

퇴계가 서애를 추천하지 않은 일은 이미 승승장구 하고 있어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 비해 학봉은 보다 오랫동안 문하에 있었을 뿐 아니라 도학에 더욱 침잠해 쉽사리 벼슬에 나아가려 하지 않은 기질을 지녔다. 죽음을 앞둔 퇴계가 학봉을 추천한 것은 학봉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동아원색대백과사전을 보면 학봉에 대해서 '당파싸움에 급급한 나머지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했다'라고 쓰여 있다. 학교에서도 그를 편협한 당파성 때문에 국론을 분열시킨 인물로 가르쳤다. 그러나 199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의 주장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고 적고 있다.

다소 미흡하지만, 후자가 역사학계의 정설이지 않나 싶다. 임진왜란 최고의 권위 있는 회고록인 징비록(류성룡 저, 국보 제132호)에 보면 저간의 사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려 깊은 대학자의 고뇌'에서 내린 복명이었다는 해석이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물을 읽어보면 학봉이 일본에 통신부사로 가서 벌인 외교가 얼마나 주체적이고 사려 깊은 것이었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봉이 취한 '위의(威儀)를 갖춘 외교'와 '무력에 굴하지 않는 외교'를 정사와 서장관이 힘을 합해 이루었다면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을 겪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학봉 선생의 일생을 알려면 우복 정경세가 지은 신도비를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의 책 한 권 분량이라 쉽지 않다. 요약한 글로는 동문수학한 한강 정구의 '학봉 묘방석(墓傍石)'에 적은 글이 있다. 묘방석이란 무엇인가? 창석 이준이 지은 글에 답이 있다.

"사순(士純)의 휘는 성일(誠一)이니, 문소(聞韶, 義城의 古號) 김씨이다. 무술년(1538)에 출생하여 계사년(1593)에 졸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년(1592)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정직하고 흔들리지 않음으로 왕의 위엄과 교화를 멀리 전파하였으며,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고는 지성으로 감동하여 한 지역을 막았으니 충성은 사직에 남아 있고 이름은 역사에 실렸다. 일찍이 퇴계 선생의 문하에 올라 심학(心學)의 요체(要諦)를 배웠으며, 덕행과 훈업은 모두 길이 아름답게 빛날 만하다. 만력 기미년(1619)에 한강 정구 씀."

"선생을 장사지낼 때 이상한 돌이 광중(壙中)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큰 북 같고 돌결이 부드러워 조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굴려서 묘 왼편에 두어 선생의 행적 대강을 새겼는데 정(鄭) 한강(寒岡)이 지은 것이다. 돌이 이곳에 묻힌 것이 아득한 옛날일 텐데 선생을 모실 때 비로소 나와 그 사실을 기록하는 데 쓰였으니 조물주의 의도가 필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 기이한 일이로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준(李埈)이 삼가 적다."

학봉의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문자 시호에다 충성 충자를 받았다.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자 몸으로 맞서 싸우다 순국했다. 탁월한 도학자면서 애국 애민을 실천했던 이다. 임란 초기에 초유사의 소임을 맡아 의병(義兵)의 발기와 지원에 크게 기여했고 경상우도 관찰사가 된 뒤로는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하여 1592년 10월 임란의 3대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을 이루었다.

그 이듬해 4월 각 고을을 순시한 뒤 다시 진주성으로 돌아왔는데, 피로와 풍토병이 겹쳐 4월 29일 진주성 공관에서 운명하니 향년 56세였다. 운명할 때에 참모들이 약물을 들이자, "나는 약을 먹고 살 수 없는 몸이다. 제군은 그만 두라"했다.

대소헌 조종도와 죽유 오운이 병문안을 하면서 "명나라 구원병들이 승승장구하여 남하해 이미 서울을 수복했으며, 그래서 모든 왜구들을 도망치게 할 것입니다"라 하자, 선생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죽다니…. 그러나 그것 또한 운명인데 어찌 하겠나. 적들이 물러가면 회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붕당은 누가 혁파할 것인가…."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처사요 심사원려(深思遠慮)한 태도다.

학봉은 타고난 시인이며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다. 그가 남긴 시가 대략 1,500여 편이나 되는데, 다수의 애민시(愛民詩)도 남겼다.

그 대표작이 모별자시(母別子詩)로 60구(句)나 되는 칠언고시(七言古詩) 장편인데 39세(1576, 이조좌랑) 때 썼다. 세상을 버리기 4개월 전인 1592년 12월 24일에 경상우도 감사로서 산청(당시 山陰縣)에서 안동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한글 편지의 사연은 절절하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궁금하네. 나는 산음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되면 도적들이 달려들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직산(稷山)에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지 염려 마오. 장모 모시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잘 있으라 하오. 감사(監司)라고 해도 음식조차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다시 보면 그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기필하지 못하네. 그리워 말고 편안히 계시오. 끝없어 이만. 섣달 스무나흗날. 석이(버섯의 일종) 두근, 석류 20개, 조기 두 마리 보내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안동의 여강서원(廬江書院, 나중에 호계서원으로 바뀌었다 훼철)과 임천서원, 전남 나주의 대곡서원(大谷書院), 경북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경남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 등지에 배향되었다.

문집 10책이 남아 있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완역, 발간되었다. 종택 유물전시관에는 보물 제905호(56종 261점)로 지정된 전적과, 보물 제906호(17종 242점)로 지정된 고문서를 비롯해 서산 김흥락 선생의 목판 등이 전시 보관돼 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