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2] 14대 종손 류영하(柳寧夏)씨英 여왕도 찾아와… 내년 서애 서세 400주년 행사 준비로 분주

경북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세거지(世居地)이면서 서애 류성룡 선생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서애의 종택은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56번지. 종손인 류영하 옹은 14대 종손이나 서애의 6대조가 입향조이기에 큰집(養眞堂) 후예들은 20대 이상을 하회마을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참으로 유구한 세월이다.

서애 선생 종택의 당호(堂號)는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이다. 영남에 충효당은 서애 종택이 유일하지는 않다. 경북 봉화군 창평마을 화산 이씨(충효당 李長發, 1574-1592)와 안동 풍산 우렁골의 예안 이씨, 영덕군 영해 나라골의 재령 이씨 역시 종택을 ‘충효당’이라 이름하고 현판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하회 충효당과 같은 반열에 들어 있지는 않다. ‘경상 감사 할래, 서애 종손 할래 하면 서애 종손 한다 ?어’ 라는 말은 사랑방에서 흔히 들었던 야화다.

예부터 서애 종손은 종손으로서 최고의 위상을 지녔다. 종가와 종손의 그 같은 권위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필자는 이를 종택 당호에서 찾는다. 충과 효는 바로 서애 종택의 휘장(徽章)이라는 것이다. 서애 가문은 종택을 구심점으로 삼아 누누이 충과 효를 강조하여 그 명예를 실추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유럽의 명문가에는 고유한 휘장이 있다. 성(城)이 있고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과 같은 존귀한 이들에게 부여되는 작위(爵位)도 있다. 만약 하회의 서애 종택 충효당에 적용한다면 어느 정도일까.

종손의 경우 일감으로는 공작(公爵)과 동급이다. 그래서 1999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의 충효당 방문이 떠올랐다. 여왕은 한국식으로 마련한 생일상 앞에서 하회탈춤을 감상하면서 흥겨워 발로 박자를 맞추었다.

안채 마루에 오르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작은 보조 마루 위에 앉아 있던 서애 종가의 종부는 경주 최부자집 딸로 가난한 하회 충효당 종택으로 시집왔다. 종부로서 봉제사 접빈객으로 평생을 보냈지만 특유의 환한 미소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기품에 못지 않았다.

50년 전만 해도 제관 300여 명, 소와 돼지 각 1마리, 대두 두말 분량으로 짠 참기름이 사용되었을 정도로 성황이었던 불천위 제사를 준비했고, 지금도 200여 명 이상의 제관이 모이는 그 일을 정성껏 받들고 있다.

종택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미수 허목이 멋스럽게 쓴 충효당 현판과 마주친다. 마루에 오르면 식산 이만부가 쓴 충효당 기문이 청명 임창순의 글씨로 높다랗게 걸려서 길손을 내려다본다.

마루에서 내려와 유물관 쪽으로 돌아들면 방문 위로 ‘학우등사(學優登仕)’라고 적힌 붓글씨 한 줄이 가로로 붙어 있다. 천자문 한 귀절로 소박하지만 ‘충분하게 자기수양을 한 뒤 비로소 벼슬에 나아간다’는 의미는 서애나 후손의 모습과 닮았다.

서애의 14대 종손 류영하(柳寧夏, 1927년 생) 씨는 온화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진다.

20여 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지식인이 지닐 수 있는 ‘품격’을 보았다. 종손은 필자의 부집(父執, 아버지뻘)을 넘어선 분이지만 필자와 함께5박 6일간 공맹(孔孟)의 본향(本鄕)을 여행한 적도 있다. 종손은 한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한복을 애용한다. 성음은 나지막하고 항상 웃음을 머금으며 말에 논리가 있다.

종손은 먼저, 서애보다 43년 선배이면서 명재상으로 이름났던 동고 이준경 종가 이야기로 시작한다. 단번에 “그래, 동고 상공 종가가 어디 있어요?”하고 관심을 표한다. 대답을 듣기 무섭게 신명난 재담으로 동고 상공과 서애 선생 이야기를 이어갔다.

“동고 상공께서 비선조(자신의 선조를 겸사로 부름)를 굉장히 귀여워 했어요. 율곡을 좀 덜 보았죠. 동고께서 정승으로 계실 때 율곡은 빛을 보지 못했어요. 하루는 ‘오늘 아무 때 귀한 손님이 올 것이니 잘 준비하라’ 분부했어요.

준비에 분주했는데, 막상 한 젊은 청년이 들어왔죠. 상공의 부인이 문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니 젊은 사람이 정승 앞에서 안경을 떡 쓰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말이 안돼죠. 그래서 손님이 간 뒤 남편에게 ‘그 젊은이는 도대체 누구 길래 어른 앞에서 안경을 쓰는 무례를 한단 말이요?하니 상공이 말했죠. ‘참 딱하오, 그 사람의 안광이 형형(炯炯, 아주 빛이 나는 모양)해서 그렇게 보였던 게요’라 말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죠.”

그리고는 영남 사랑방에서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상공께서 돌아가실 때 올린 글이 있었어요. 불원간에 당쟁의 화(禍)가 일어날 것이니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한다는 거였죠. 조정에서 야단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비선조께서는 “말이 옳지 않으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뿐이다. 죄를 묻는 것은 대신을 대접하는 예가 아니다”라고 극력 저지했어요. 동고 상공이나 비선조 모두 상황을 정말 옳게 본거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졌다. 동고 상공에 대한 서애 종가와 노종손의 향념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수원대학과 부설 동고연구소 활동을 말했더니, 뜻밖의 사연을 덧붙인다. “수원대학교 동고연구소에서 몇 해 전 내게 행사를 한다고 편지를 보냈어요. 반가운 마음에 답장했죠. 교류를 하고 싶다고. 그후 회답이 없어요. 그래서 저 사람들 향념이 할 수 없구나 생각하고 말았죠, 뭐.” 동고 상공의 문중 인사나 종손이 서애 종손의 친서를 친견(親見)해 조치했다면 아름다운 교류가 성사되지 않았을까.

종손과 대화를 하다보면, 이 어른이 정말 신구를 넘나들며 우리 역사와 문중사, 그리고 시국 현안에 대해 두루 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 종손 류영하 씨(왼쪽)와 종부 최소희 여사.
▲ 전시 중인 유물

종손은 하회에서 태어나 취학하기도 전에 어머니(우복 정경세 종가 종녀)를 여의였다. 8남매를 자녀를 둔 어머니는 생전에 6남매를 잃고 위로 누님과 종손만 남기고 한많은 생을 마쳤다. 그리고 종손이10세 때 부친의 속현(續絃)으로 무안 박씨를 어머니로 만났다.

종손은 마을 안에 있던 심상소학교를 4학년 말까지 다니다 서울로 전학해 덕수소학교를 졸업한 뒤 중앙고보(37회),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로 진학했다. 1년 뒤 광복이 되었고 예과 2학년(22세) 때 조부의 엄명으로 경주 최부자집으로 장가들었다(종부 최소희 여사).

예과 2년 수료 후 종손은 한국전쟁을 맞았고 53년 상경했다. 이듬해 성균관대학교 생물학과(1회 생)에 편입해 학부와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다. 이후 동인천여상 교사로 취직했고 다시 서울 동덕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의학도에서 생물학도가 된 종손. 일왕 히로히토(裕仁, 1901-1989)가 생각난다. 종손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아픈 기억을 남겼을 히로히토 역시 생물학자(어류분류학 권위자)였다. 종손의 선친인 류시영(柳時永, 1901년 생) 씨와는 동갑이다. 20여 년 동안 교직에 몸담고 있던 종손은 1971년 선친이 작고하자 초상을 모셨고 학기를 마친 즉시 모든 일을 정리하고 충효당으로 내려와 지금에 이르렀다.

종가를 수호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이 무엇인가 물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지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토지에서 나오는 소득이란 것은 보잘 것 없어요. 그래도 근자에는 하회마을보존회에서 보조를 받아 좀 나아졌죠.”

그렇다. 외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큰기와집에 범절과 규모를 갖춘 문중행사가 잦고, 유명 인사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일반 손님들로 북적이니 마치 외국의 성주처럼 잘 사는 줄 안다. 그러나 현실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종택을 방문한 귀빈은 영국 여왕을 비롯해 이희호, 이홍구, 이수성, 이한동, 서청원, 미국 브라운대 총장, 주한 영국대사, 주한 프랑스 대사, 조지 부시 전 미 대통령 부부(2005년 11월 13일)이 손꼽힌다.

종가의 앞날을 질문했다. “내 맏아들(昌海, 1956년생)은 집을 지키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손자놈(승환, 경북대 휴학, 군입대)은 장담 못해요.” 그리고는 며느리인 광산 이씨 집안(이발 이길 집안, 송강 정철로부터 고통을 받음)의 역사를 줄줄 꿴다. 둘째 명해(明海)는 군산에서 자동차 부품 검사하는 일을 하고 있고 딸을 하나 두었다.

요즈음 가장 즐거운 일에 대해 물었다. “둘째집 손자가 서울 보성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데 고려대 법대 수시모집에 합격했어요. 20명 뽑는데 1,200명이 왔다나. 그놈은 말도 과묵하고 얼마나 우직한지, 아직도 휴대폰이 없어요. 손자가 저녁만 먹으면 독서실 간다고 하면서 새벽에 오니 부모는 저놈이 정말 공부를 하는지 의심했지만 이번에 수시합격을 하니 공부를 한 모양인가 봐요.”

예전에, 듣기 좋은 소리가 ‘자식들이 글 읽는 소리’라 했다. 손자의 성취에 기분 좋아하는 종손의 모습은 가을 햇살을 받아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종손은 현재 내년 서애 선생 서세(逝世) 400주년 기념행사 준비와, (사)안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2003년 개설, 이사장) 일과, 퇴계 선생 제자 후손 모임인 도운회(陶雲會 회장) 일 등으로 쉴 틈이 없다. 그리고 근자에 모 대학 박물관에 소장 중인 종가에서 대대로 수호해왔던 방대한 선현유묵첩(先賢遺墨帖) 환수 작업에 착수했다. 종손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