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2]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1542년(중종37)-1607년(선조40)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 봉호는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서애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했다. 23세 때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했고, 25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스승인 퇴계 선생은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라고 평했는데, 21세 때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다. 퇴계 문하의 양대 학맥이라 할 수 있는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은 서로를 높여, 학봉은 서애를 '나의 사표(師表)'라 했고, 서애는 학봉에 대해 '내가 미치지 못한다'고 인정했다.

안동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영가지(永嘉志, 서애 제자 龍巒 權紀 편찬) 권7 인물조(人物條)에 보면 서애에 대해서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실천하여 연원정맥(淵源正脈)을 이었다'고 했다. 학봉에 대해서는 '퇴계 선생에게 배워 심학(心學)의 요체를 듣고 견고하고 각려(刻勵)하게 노력하여 조예가 정심(精深)했다.'고 평하고 있다. 미묘한 문제이지만 영가지에서는 무게 중심이 서애 쪽에 두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도심 도로명에 퇴계로가 있고 그곳에서 갈라진 작은 도로에 서애로(西厓路)로 명명된 길이 있어 스승과 제자가 수도 서울에서 길로도 만나고 있다.

서애는 30여 년 동안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친 뒤 51세(선조25, 1592) 때 영의정에 이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세가로서의 서애를 생각하는데, 어쩌면 서애는 57세(선조31, 1598) 때 무고(誣告)로 영의정에서 체직된 뒤 삭탈관직까지 당해 58세 2월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9년을 더없이 소중하게 보냈다.

은퇴 정치가보다는 대학자로서의 위상이 빛을 발했다. 임란 때 의병장으로, 그리고 강직한 강관(講官)으로,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 겸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1563-1633), 부제학에 이른 창석 이준(1560-1635) 등으로 대표되는 서애학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이다.

서애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경세가(經世家)며 구국의 영웅이다. 이점을 살피기에 가장 적합한 책이 손수 이면지에다 쓴 임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이다.

안동에 국보가 4점인데, 그중에 하회마을에 두 점이 있다. 징비록과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필자는 이전에 징비록 원본을 금고에서 꺼내 펼쳐본 적이 있다. 그때 느낌은 어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거대한 금고에 들어 있어 안전하지만 습기 문제, 표지의 장첩된 상태, 조잡해 보이는 보관 상자 모두가 불만이었다. 놀라운 점은 이면지에 초서체로 당시로서도 고급지가 아닌 일반 용지에 쓴 책이란 사실이었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집요한 공격을 당했고 결국 파직된 상태로 가난한 옛 고향 집을 돌아와 썼던 이 조그마한 책이 나라의 시련을 극복할 지혜를 담은 책으로 여전히 생명을 지니고 있다.

누구보다 시대를 앞선 지식인이었던 다산 정약용은 1808년(당시 다산 선생 47세)에 아들에게 여가를 보아 서애집과 징비록 그리고 성호사설(성호 이익 작), 문헌통고를 읽으면서 그 요점을 정리하라는 가르침을 내린다. 다산은 누구보다 서애를 존경하고 사상을 본받고자 했던 이다.

징비록은 정책 분석과 대책이 탁월해 적국에 유출되어서는 안 될 목록에 들어 있었다. 청장관 이덕무가 쓴 글을 보면 이미 징비록은 일본으로 유출되어 출판(청천 신유한의 해유록에 보면 징비록이 일본 대판에서 출판되었다고 기록함, 도쿠가와 막부 시절, 1695년 경 교토에서도 간행)까지 된 것을 걱정하는 장면이 있다. 이를 보면 징비록은 이미 조선 시대에 탁월한 회고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은 일본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일종의 '비서(秘書)'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제국시대(1936년)에 그들은 아주 격조 있는 두 책 영인본 300부 한정판으로 간행했다. 아쉽게도 광복 이후 지금까지 당국도 문중도 아직 격을 갖춘 복제품을 간행한 적이 없다.

다행히도 서애선생기념사업회의 주도로 영역본 징비록이 나왔다. 징비라는 시경의 구절을 어떻게 번역했을까? 적지 않게 궁금했다. "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경계하여(징)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비)'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이 심오한 책 제목은 '잘못을 고치는 책(The Book of Corrections)이다"라고 한글로 옮겼다. 탁월한 언어 감각이다.

영역판은 호남대학교 최병헌(영문학) 교수가 6년여 노력을 들여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간행했다. 최 교수는 2003년 4월 4일 출판기념회에서 여러 외국 학자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최고 책임자가 쓴 자기 반성문인 동시에 향후 최고 지침서요, 위기관리 편람이다. 그래서 북한 핵위기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요즘, 우리가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핵실험은 남의 이야기하듯 적당히 넘길 사안이 아니다. 서애는 전쟁 발발의 징조, 전시(戰時) 중의 각종 대비책,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양국과 강화(講和) 문제 등을 조목조목 적고 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바꾸어 보면, 현명한 외교와 정확한 국제 정세와 적의 정보 분석, 유사시의 대책, 그리고 확고한 집단 동맹체제(혈맹 관계)의 구축일 것이다.

400여 년 전 서애의 이러한 분석과 대비책 역시 '냉전적 사고'로만 치부하기엔 탁견이다.

서애는 타고난 경세가다. 조정 관료나 정승 중 행정 능력이 탁월한 이가 흔하지 않다. 그러나 서애는 그러한 능력을 지녔다. 실록 서애 졸기에 보면 선조실록과 수정실록 두 편이 비교적 길게 실려 있는데, 공히 시각을 달리하는 부정적인 평이 있다.

그럼에도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렇게 소개했다. "경연(經筵)에 출입한 지 25년 만에 상신이 되었으며 계사년에 수상으로서 홀로 경외(京外)의 기무(機務)를 담당하였다.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과 계첩(揭帖)이 주야로 폭주하고 여러 도의 보고서들이 이곳저곳으로부터 몰려들었는데도 성룡은 좌우로 수응(酬應)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

서애는 지인지감(知人之感)이 뛰어났다. 이 점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천거와 음해 세력들로부터의 비호를 통해 청사에 빛나는 전공을 세울 수 있게 한 장본인이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이순신에 대해서는 조정 중신은 물론 국왕까지 집요하게 음해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때마다 서애는 간곡하게 그렇지 않다는 점을 설명해 구국의 큰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게 했다.

선조30년 1월 수군 작전 통제권을 두고 국왕과 중신들이 나눈 대화는 오늘날과도 흡사한 점이 있다.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으로 생긴 틈새를 당파 세력들이 비집고 들어섰고 국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가볍게 의심을 하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졌다.

이때 서애는 이순신과는 같은 동리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너무나 잘 알며 그래서 자신 있게 만호(萬戶)로, 그리고 수사(水使)로 직접 천거했다. "글을 잘 하는 사람인가?"라는 선조의 물음에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어느 곳 수령으로 있는 그를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라 했다.

서애가 실각한 직후인 같은 해 11월 19일 충무공은 노량해전에서 유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얼마 뒤인 12월 서애는 삭탈관직 당한다. 문무로 갈린 벼슬길이며 직급과 직위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지만 국난을 몸으로 막고 참소에 너무나 의연했던 두 평생지기의 운명은 부절을 합한 듯 너무나 닮았다.

서애는 또한 청백리였다. 그 면모는 한 장의 고문서에 고스란히 담겨 전한다.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에는 선생의 부음이 도성에 전해졌을 때 조정 관료들이 연명으로 부의를 추렴한 문건 한 장이 전시되어 있다.

서애는 삭탈관직된 뒤 고향을 찾았을 때 마땅한 거처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대신의 품격을 유지시켜줄 녹봉조차 받지 못했고 그 무렵 입은 수해로 거처할 곳이 더욱 마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옮겨 앉은 곳이 강 건너 한적한 서당인 옥연정사였고 징비록 집필을 마친 뒤 죄인을 자처하며 더욱 후미진 학가산 골짜기를 찾아들어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집 두어 칸을 얽었다. 그때는 세상을 버리기 1년 전의 일이었고 그곳에서 선화했다.

66세(1607년 5월 6일)로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3일간 조시(朝市, 조회와 시장)를 정지하고 승지를 보내 조문했으며 역대 여러 국왕들은 수차에 걸쳐 예관을 파견해 사당에 치제했다.

서울 옛집이 있던 묵사동(墨寺洞)에서는 도성 각전(各廛)의 백성들이 몰려와 조곡했는데 1,0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백성들에게 끼쳤던 서애의 공을 짐작하게 한다. 아마도 망한 나라를 구했다는 '산하재조지공(山河再造之功)' 때문이었을 것이다.

묘소는 안동 풍산읍 수동(壽洞)에 있는데(정경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 외 6대손 한산 이씨 대산 이상정이 묘갈명을 씀), 명당으로 이름나 풍수가들의 답사코스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의물(儀物)들은 너무나 조촐하다. 퇴계가 그러하듯 서애 역시 신도비가 없다.

광해군6년(1614) 4월 병산서원에, 광해군12년(1620) 9월 여강서원에, 인조5년(1627) 10월 군위의 남계서원에, 인조9년(1631) 10월 상주의 도남서원에, 인조21년(1643) 10월 예천의 삼강서원에, 숙종15년(1689) 의성의 빙계서원에 각각 위패를 봉안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