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3] 청송 심씨 청양군 심의겸 1535년(중종30)-1587년(선조20)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 간암(艮菴), 봉호는 청양군(靑陽君)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58번지에는 조선 중기 동서 분당(分黨)의 서인측 장본인인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묘소와 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 이곳은 종택이라고 하기에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종손이 살지 않고 사당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종택으로 소개하는 것은 이곳이 13대 종손 심인섭(沈寅燮, 1910년 생) 씨가 살았던 집이요, 14대 종손을 계승한 심재구(沈載九, 1936년생) 씨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살았고, 현재 종손의 아우인 심재만(沈載萬, 1941년생) 씨가 종손을 대신해 청양군 묘소는 물론 45기나 되는 많은 선대 묘소, 수십만 평에 달하는 많은 문토(文土)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손은 미국 살고 동생이 종택 지키며 수십기 묘역 관리

14대 씨는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전학해 경기중·고를 졸업한 뒤 성균관대 수학과를 거쳐 미국 시카코대학에 유학했다. 졸업 후 현지 교민과 결혼해 정착했고 귀국하지 않았다. 차종손 준선(俊善) 씨 역시 미국에서 나고 자라 일리노이대를 졸업해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현재 종손의 귀국은 기약할 수 없다.

작고한 종손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때 양정고보를 나와 일본에 유학한 엘리트였으며 서울에서 운수업을 하면서 평생을 종가와 종중을 위해 헌신했다. 선대 종손이 비망록에 조목조목 기록한 문중 관련 자료나 의식절차를 적은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부심했던가를 알 수 있다.

종손 심재구
수십 기에 달하는 묘역을 하나하나 지도에 위치를 표시해 두었다. “선친이 살아 계실 때 제가 모시고 다니기는 했어도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자세히 몰랐습니다. 그런데 1995년에 돌아가신 뒤 제가 직접 묘역을 관리하다 보니 묘소마다 비석 등 석물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더라구요. 정말 완전하게 해두고 가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또 문중 시비도 확실한 서류를 마련해 두셔서 미연에 막았고요.”

사실 요즈음 묘소에 상석과 망주석을 장만하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십기 묘역에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조상을 위하겠다는 향념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자료에서 손수 그린 ‘생양출입도(生養出入圖)’를 보았다. 이 집에도 양자 관계가 있음을 알고 물었다. “선고께서 양자로 와 종손이 되셨어요. 조부인 상자 락자(相洛)께서는 진사를 했고요. 생가의 조부는 상자 각자(相恪, 1888-1954)이신데, 독립운동을 하셨어요. 조부께서는 이시영, 김구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신 애국선열이십니다. 그 공이 인정되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셨어요.”

종손을 대신해 종택과 문토를 지키고 있는 아우 심재만씨.
심상각 선생은 파주 지역을 대표하던 애국선열이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조국 광복에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19년 3월 27일 파주 장날을 이용하여 사전에 조직한 5,000여 군중들을 이끌고 면사무소를 습격한 뒤 남파주 경찰 주재소로 진격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사건 후 감시망을 뚫고 중국 상해로 가 임시정부에 참여, 요원으로 활동했다. 일본 외무성, 육해군성 문서에는 선생을 신익희, 윤보선과 함께 법무장관인 신규식(申圭植) 계열로 분류해 놓았다. 귀국 후에는 고향 광탄에 광탄보통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하여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종택의 옛 기와집은 진작 사라졌고, 재만 씨가 추억하는 기와집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 본부로 사용됐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컸지만 그 역시 미군 폭격으로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 조부 때부터 살고 있는 이 집 역시 와가였으나 지금은 슬라브 양옥으로 조성되어 있다. 집 뒤편에 청양군의 묘소와 를 비롯한 선대 묘역이 여럿 모셔져 있다.

이곳 지명에 ‘심궁’ 또는 ‘심궁길’이 있는 것에 대해 물었다. 재만 씨는 예전에 이곳에 99칸 집이 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청양군 당시 이곳에99칸 집이 있었다고 해요. 심궁이란 심 씨의 큰 집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안골로 들어가면 터가 남아 있어요.” 이곳 심궁터는 청양군이 세상의 온갖 비난을 몸으로 겪은 뒤 물러나 심신의 안정을 꾀하던 유서 깊은 ‘파주(坡州) 촌사(村舍)’였을 것이다.

신도비
심연원과 심강, 그리고 청양군 심의겸으로 이어지는 삼대의 인물 평을 보면, 검소하고 근신했고,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으며, 외척의 화려함이 조금도 없어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은 태도를 지녔다는 것이 주를 이룬다. 물질과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쓰지 않기란 더욱 어려운데, 청양군은 이를 실천하고자 무진 애를 쓴 흔적이 생애 전반에 역력하다. 그래서 이 터전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종손의 친동생 재만 씨는 연세에 비해 겸손하고 그래서 참으로 선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는 모습도 청양군의 가훈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듯했다. 어두움이 깔린 집 대문을 나서는 필자를 따라 나서며 “아무 대접도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모습은 천상 청양군 집 사람이다.

척신이면서 사림 옹호… "당쟁 촉발 주역" 비판 받기도

청송 심씨는 대종회의 정리를 빌린다면, ‘우리나라 256개 성씨 중 총 가구수로 31위요, 우리나라 10대 벌족(閥族)’이다. 정승을 지낸 인물만 13명(영의정만 9명)에 대제학이 2명, 황후가 3명, 부마가 4명, 문과급제자가 196명, 무과급제자가 350명이나 되는 대단한 씨족이다. 영의정을 9명 배출한 것은 전주 이씨 출신이 11명 정도라는 점을 감안할 때 놀랍다.

청양군 심의겸의 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연원(連源), 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綱)이며 홍(泓)에게 입양되었다. 심의겸은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우다. 진사시(21세)를 거쳐 1562년(명종17) 별시문과에 급제(28세)한 뒤 주서, 설서, 정언, 교리, 수찬 등을 역임했다.

문신들의 꿈인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거쳐 전적, 지평, 의정부 사인, 직제학을 역임한 뒤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당시 전권을 휘두르던 윤원형이라는 외척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등용한 이량 역시 전횡을 일삼자 명종의 밀지(密旨)를 받들어 그를 제거해 사림을 옹호했다. 척신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사림을 옹호했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는 이어서 좌부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하면서 전배(前輩) 사림들과 폭넓은 교류를 지속했다.

광평대군 신도비 부분
광평대군 부분
성암 김효원(金孝元:1542-1590)과의 관계로 불거진 동·서인 간의 대립 탓에 외직으로 밀려나 개성유수, 전라감사로 전임되었다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발붙일 곳이 없자 사직한 뒤 경기도 파산으로 내려가 자정했다. 1580년(선조13) 재등용되어 예조참판과 함경감사 등을 지냈다. 이어 정인홍의 탄핵을 받았을 때는 율곡의 변호로 모면했으나 율곡이 죽은 뒤 1584년 동인의 집정으로 파직당한 뒤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전원으로 물러나면서 김효원에게 서로 그리운 정을 노래했고, 심의겸과도 두 번에 걸친 만남이 있었으며 글로도 남겼다. 소재 노수신은 심의겸이 선비 사회에 기여한 바 크다고 평가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퇴계의 제자 명단인 도산급문제현록에 올라 있다.

노수신과 김효원이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그리고 심의겸은 속도산급문제현록(續陶山及門諸賢錄)에 구분되어 올라 있는데, 최근 연구로는 이들은 ‘당대 명사’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있다. 그러나 포괄적으로 볼 때 이들은 모두 전 시대의 훈구파와는 성격이 다른 '사림 세력'이었다. 신구(新舊)로 사림 세력을 구분할 때 심의겸 계열이 상대적으로 선배요, 김효원 계열이 신진에 해당된다. 당쟁은 선후배 간의 선비정신 발현과 선명성(淸議) 경쟁으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필
청양군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이는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이다. 그는 청양군이 세상을 떠나자 사무치는 그리움을 노래했다. “속세의 벼슬살이 진정 뉘가 참인고/ 객지에서 서로 만나 곧장 벗이 되었지/ 오늘 이별 자리 한가락 노래로/ 고향 봄 동산에 가 누울 그댈 전송하네.” 허균의 성소수부고라는 문집에 실린 내용이다. ‘가락의 서글픔이 통곡보다 더하다는 게 바로 이것이 아닌가?’ 허균의 주석을 읽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깊은 교분을 알 수 있는 만시다.

심의겸은 근후(謹厚)한 사람, 학문과 경륜이 있는 대현(大賢)이란 평이 있는 반면 붕당을 만든 소인배, 음험하고 간사한 자질을 가진 자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인물 평가는 간단하지 않다.

우선 남명 조식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동강 김우옹의 평을 보자. 심의겸을 논한 차자에 보면, 심의겸은 ‘나라를 어지럽히고 조정을 잘못 이끈 죄(迷國誤朝之罪)’가 있다고 단정했다. 이는 동강 혼자만의 평이 아니다. 당시 이순인, 백유양, 이원익, 강신, 김륵이 함께 한 견해다. 그리고 ‘그 사람됨이 속내를 감추고 명예를 얻고자 스스로 사림들에게 빌붙었기 때문에 일시의 옳고 그른지 하는 논의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따라서 심의겸의 죄상을 확실하게 밝혀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선비들의 분열 즉 동서로 나뉜 당파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오조지죄’는 추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시한 것이 사림에게 빌붙었다는 것인데, 그 목적은 속내를 감추고 명예를 얻기 위함이었다는 주장이다. 그 역시 모호하다. 전통적 관점으로 보면 거짓 유학자요 선비였다는 것인데, 그것이 집단적으로 단죄해야 할 만큼의 큰 죄는 아니다. 그래서 심의겸을 단죄하는 자신들조차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논의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다.

심의겸은 소재 노수신 등 원로대신들로부터도 집중 견제를 받는다. 그래서 결국 심의겸과 김효원은 함께 외직으로 나가게 되며, 김효원은 15년 동안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도 못한 채 삶을 마친다.

심의겸 역시 김효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이 두 사람이 모두 정치 일선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붕당의 원인 제공자가 모두 없어진 셈이다. 그러나 역사는 당쟁이 그 시점에서 종식되기는커녕 더욱 조직화되고 심화되었으며, 사림의 희생은 물론 나라의 안위마저 걱정해야 하는 폐단으로 전개되었다. 동서 분당의 책임을 그 두 사람에게만 지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현재 심의겸의 문집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그의 삶은 물론 사상을 살필 자료가 없다. 참 애석하다. 근자에 필자가 찾은 바로는 광평대군(이여, 세종대왕 제5자, 1425-1444)의 명(서울시 유형문화재)을 쓴 것이 거의 유일한 정도다. 강남구 수서동 광평대군 묘소 앞에 크고 아름다운 옥돌에 주옥 같은 글씨로 새겨진 명을 쓴 인물이 바로 심의겸이라는 사실은 이례적이다.

당시 그는 종2품직 사헌부 대사헌직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중요한 외교문서나 중요 인물에 대한 글은 삼정승이나 홍문관, 대제학(정2품 직)과 같은 최고 권위자가 쓰기 마련이다. 당시에 대제학은 박순(1523-1589), 이황(1501-1570), 김귀영(1519-1593)과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서로 주고 받은 자리였다.

개인의 문집은 제자나 후손들이 힘을 합해 사후에 편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왕의 명으로 발간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학자나 정치가였으면서도 문집이 남지 않게 된 경우는 남은 글들이 병화(兵火)로 훼손되거나 손이 끊어졌거나 양자를 거듭하면서 자료가 흩어진 경우다. 대개 손자 대에 와서 주로 문집 간행 작업이 시작되거나 완성된다.

심의겸의 장남 륜(淪)은 청평군(靑平君)을 습봉했고, 둘째아들 엄(淹)은 현감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딸은 참판 윤훤(尹暄)에게 출가했다. 청평군의 아들은 익세(翼世)요 영의정의 아들은 문과에 급제해 응교(應敎)를 지낸 광세(光世), 현감 정세(挺世, 배위 金悌男의 딸), 청운군(靑雲君) 명세(命世), 부사(府使) 장세(長世) 등이 있으며, 외손으로는 판서 이단하(李端夏) 등이 있다.

조카로 영의정을 지낸 남파(南坡) 심열(沈悅, 1569-1646)이 있는데, 이 사람은 의령 남씨로 참의를 지낸 학자인 남언경(南彦經)의 외손자기도 하다. 그의 조카인 남파 심열(6권 2책, 목판본)과 손자인 휴옹(休翁) 심광세(沈光世: 1577-1624, 6권 3책, 목판본)의 경우 문집이 있음에도 자신의 조부인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연원(沈連源:1491-1558, 영의정 역임)과 자신의 문집은 남아 있지 않다. 병화로 인한 자료의 일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상촌 신흠의 아들인 낙전당 신익성(1588-1644)은 청양군 묘지명에서 청양군 손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청양군의 손자인 희세(熙世)가 가장(家狀)과 택당 이식이 지은 유사(遺事) 한 통을 들고 나를 찾아와 묘지명(墓誌銘)을 부탁했다. 그는 울면서, ‘돌아가신 우리 조부를 장사지낸 뒤까지 비방하는 말들이 그치지 않았고 거기에 더해 왜란까지 만났습니다.

또한 다시 가화(家禍, 집안의 좋지 못한 일)를 당해 이를 장만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큰아버지께서 편찬해둔 계첩이 상자 속에 있은 지 3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이 또한 없어져버릴까 걱정입니다’고 하였다.” 이 글은 물론 묘갈명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집안의 당시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 주기에 이미 대부분의 문집을 만들 수 있는 자료가 일실(逸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사후 아들과 손자대의 현달과 그들의 문집 간행 사례를 고려한다면 설득력이 약하다. 3년 후배로 그와 역사적인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김효원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의 문집은 남아 있다. 완성된 형태는 아니다. 그의 문집은 아들에 의해 수집, 편차되기는 했으나 교정본 형태로 2권 1책(92板)이라는 아주 적은 분량으로 필사본 형태로 남아 있다. 문집 서문이 책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데, 작자가 허균이다.

허균은 1618년 반역죄로 처단된 인물로 김효원의 사위이기도 하다. 문집은 사위나 외손자가 편찬하기도 하는데, 반역죄로 처단 당한 사위가 서문을 쓴 문집이 온전한 형태로 간행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김효원의 맏며느리는 허균의 질녀인데 허균 또한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김효원의 맏아들은 허균에게는 질서(姪壻)이면서 손위 처남이 되기도 했다. 심의겸과 김효원이 문집이 있고 없는 차이는 있지만 결국 임진왜란과 함께 동서 분당의 두 주역이었기에 완전한 형태의 문집이나 유고집은 남기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심의겸은 선조조(宣祖朝)라는 당쟁의 시발점에서 사의식(士意識)이 남달랐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림을 부호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했던(扶護士類爲己任)’ 이다. 이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의 생각이지만 수정선조실록에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러한 관점에서 논했다. 한원진은 이에 더해 심의겸은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암 박순, 송강 정철과 함께 진퇴를 같이 했고, 동서 분당이 그에게서 시작되었지만 명현들이 그의 처세에 대해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평한다. 남당이 이렇게 강하간엿ぜ?데는 심의겸이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남동생이라는 신분임에도 선비들을 생각해주었다는 점을 고려해서다. 실제로 그는 지나칠 정도의 선비 의식을 지닌 이다.

경기도 파주의 시골집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집안 사람들에게 남긴 말이 인상 깊다. “밥상에 조복(條鰒, 궁궐의 특이한 반찬으로 외척에게 나누어 보냄) 요리를 올리고 입으로는 사론(士論)을 말했으니, 남의 말을 듣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실천을 염두에 둔 자기 반성이다. 선비 의식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실록과 한원진 같은 대학자에게서 ‘선비를 부호했다’는 평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는 달리 있다. 심의겸은 조정의 안위와 착한 선비들을 지키기 위해 정치를 농단하던 이량(1519-1563)의 제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량은 효령대군 후손으로, 명종이 비대해진 자신의 외숙인 윤원형 일당의 전횡을 막기 위해 등용한 사람이다. 그는 심의겸의 외숙, 즉 부친인 심강(沈綱:1514-1567)의 처남이었다.

동서 분당의 빌미를 제공한 비극적 일화도 그런 그의 강직한 태도 때문에 생겼다고 본다. 정사와 야사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율곡이 지은 석담일기(石潭日記)에도 나와 있다. 율곡은 자신의 조모가 심의겸의 조부인 심연원의 종매씨(從妹氏)로 인척간이다. 명종조에 심의겸은 의정부 사인(舍人)직에 있으면서 공적인 일로 영의정 윤원형의 집에 간 일이 있다. 윤원형의 사위는 심의겸과 아는 사이였으므로 서재로 데리고 들어갔다. 심의겸이 침구가 많은 것을 보고 “누구의 침구인가?”하고 차례로 물었는데, 그중 하나는 김효원의 이부자리였다.

이를 본 심의겸은 “어찌 문학하는 선비로서 권세 있는 집의 무식한 자제들과 함께 거처할 수 있단 말인가? 결코 절개 있는 선비가 아니다”고 했다. 이때 김효원은 아직 문과에 급제하지 않았지만 이미 문장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고 얼마 뒤 장원 급제했다. 김효원은 벼슬 길에 나아가 현임으로 있던 동문수학한 덕계(德溪) 오건(吳健, 남명 제자)이 그를 이조정랑 직에 적극 추천했으나 심의겸의 반대로 6, 7년 만에 그 직에 오를 수 있었다.

이조정랑(吏曹正郞)은 정5품으로 판서, 참판, 참의 다음 직이긴 하지만 관리를 임용하는 실무로서 달리는 전랑(銓郞, 관리를 전형해 임용하는 낭관)이라고 부르던 요직이다. 김효원은 이 직에서 청렴한 선비들을 발탁하고 바르게 일처리를 해 후배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김효원은 속으로 심의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항상 “심(沈)은 생각이 미련하고 성질이 거치니 크게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일이 있은 1년 뒤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이 자리에 보임되고자 했을 때 김효원이 극력 반대했다. 석담일기의 내용이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두 사람 사이를 봉합하고자 팔을 걷고 나섰던 율곡의 기록으로 보기에는 믿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김효원의 졸기(卒記)를 보면 심의겸과의 관계가 극단으로만 달렸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의겸은 개성 유수로, 김효원은 영유 현령으로 외직에 있을 때의 일이다. 두 사람은 당파를 야기한 장본인이라는 오명을 쓰고 외직으로 밀려났었다. 하루는 김효원이 지나는 길에 개성을 찾아왔는데, 심의겸은 그를 매우 따뜻하고 융숭하게 대접했다. 하룻밤을 묵으며 오랜 친구처럼 즐겁게 지냈다. 그 후 김효원은 안악군수로 있을 때 심의겸의 부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내 친구를 잃었구나(吾友喪矣)”라 하고 이틀간을 공무를 보지 않고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았다 한다. ‘미운정 고운정이 다 들었다’는 말이 있거니와, 두 사람 사이는 교감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심의겸 행장을 보면, 김효원이 “우리 두 사람이 아무리 혼란을 빚어낸 장본인이지만, 실은 서로 지기(知己)이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또 우암은 김효원의 손자 판서 김세렴 역시 여러 손자들에게 말하기를, “남들은 우리 두 집안에 대해 대대로 내려오는 원수(世讎) 사이라고 하지만, 실은 대대로 사이좋게 잘 지내는 관계(世交)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조정 중신들이 초기에 적극 중재했다면 당쟁의 화를 방지하지 않았을까. 두고두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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