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415대 종손 김규한(金奎翰)씨 - 종손 교육 제대로 안받아… "그래도 조상 위해 뭔가 할 것"

성암 김효원 1542년중종37)-1590년(선조23)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菴)
동인의 영수… 유가 규범 철저히 실천 '청렴강직 사림'

성암은 선산인(善山人, 金宣弓 갈래)이다. 선산 김씨의 저명한 역사인물로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 있다. 그는 성암과 같은 김선궁계다. 성암은 오래 동안 서울 남부 건천동(乾川洞)에서 살았으며 원주에 별업이 있었다. 건천동은 퇴계를 비롯해 서애 류성룡, 충무공 이순신 같은 이들이 살았던 곳. 오늘날 퇴계로 주변이다. 성암은 함께 공부한 서애와 나란히 초시에 합격했다. 조정에서 분당이 생기자 늘 낙향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어머님 때문에 결행하지 못하고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일약 장원으로 급제했고 청의(淸議)를 주장해 사림으로부터 선명성을 인정받아 일약 동인의 영수(領袖)로 받들어졌던 그는 정작 환로(宦路, 벼슬길)에서는 집중적인 견제를 받아 지방을 떠돌다 3품직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묘갈명을 보면, ‘통정대부 행 영흥부사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성암 김공 묘갈명’으로 되어 있다. 가선대부 이조참판은 종2품직인데, 그의 손자의 현달(顯達)로 인한 추증(追贈)이다.

그의 아우인 소암(素菴) 김이원(金履元, 초명 信元, 1553-1614)은 문과를 거쳐 익사공신과 숭양부원군(嵩陽府院君)에 봉해지고 병조판서와 판중추부사에 이르러 삼대 추은(推恩)을 이루었다. 그러나 북인 정권에서 영달은 인종반정으로 무너져 훈작이 모두 삭탈되는 아픔을 겪었다.

15대 종손 김규한
성암의 가계를 보면, 맏며느리로 하곡 허봉의 딸을 맞았고, 동시에 맏사위로 교산 허균을 들인다. 허균의 입장으로 보면 본가에서는 질녀가 처가로 와서는 손위 처남댁(중부지방에서는 아주머니라 칭함)이 된 것이다. 또 허봉의 딸 입장에서 보면 친정에서는 숙부가 시댁에 와서는 시누이의 남편이 되었다. 이를 시매부(媤妹夫)라 한다. 일반적으로 ‘아지뱀’, ‘고모부(자신이 낳은 아이의 입장에서)’라고도 부른다.

성암은 철저히 유가의 규범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문을 닫고 책을 봄에 신발 한 켤레로 십여 년 신었다 한다. 선비들과 강론을 할 때면 가난한 살림에도 음식을 나누었고, 더러는 해가 저물 때까지 식사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는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여 임지에서 인재를 가려 강론을 통해 선비로 키웠다. 그가 34세 때 타의에 의해 나간 삼척부사나 42세 때의 안악군수, 48세 때의 영흥부사는 모두 궁촌(窮村僻鄕)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문교 진흥 정책에 힘썼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10년간 목민관으로 외직에 있었다. 이때 한 번도 도성을 밟지 않았다. 이는 그가 얼마나 자신의 소임에 충실했던가를 말해 준다. 당파성에 치우친 인물 이미지와는 다르다.

성암은 신진 사류의 대표적 인물로 항상 나라를 걱정했다. 성암이 심의겸과 대립하게 된 사건은 심의겸이 외척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심의겸은 자신의 아우 심충겸을 위해 관리 임용 실무를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인 이조전랑(吏曹銓郞, 正郞)을 추천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사적인 관계로 보면 심충겸은 초시(명종19년 시행한 생원시, 김효원은 진사시였음)의 동기생이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의견을 타인에게 말했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비화되었다. ‘외척을 끌어들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이것

묘비와 묘표
이 성암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그에 대해 후대에 영남 남인의 종장이 된 갈암 이현일은, “조정(臺閣)에 계실 때 정색(正色)과 직언(直言)으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일시의 권간(權奸)들이 모두 다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고 적고 있다. 갈암은 김효온을 청의를 주장하는 인물로, 그리고 심의겸을 ‘외척세력으로 국정을 맡아 일에 간여했다(當國用事)’고 상반되게 평가했다.

갈암은 왜 성암의 묘갈명을 썼을까? 이는 아주 간단하다. 성암은 동인의 영수였고, 갈암이 그 맥을 이어 남인의 영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성암은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도산급문제현록에 올라 있다.

그의 문집에서 퇴계와의 관계를 말해줄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남명 조식과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 사이를 짐작할 만한 자료가 남아 있다. 성암은 남명이 세상을 떠나자 만시를 썼다. “방향 모르는 날 가르쳐주셨고(誘掖回迷走)/ 날 채워서 옳은 사람 되게 했다네(充盈見實歸)/ 인문이 이제는 끝나고 말았구나(人文今已矣)/ 이제 우리 도를 누구에게 의지할꼬(五道竟何依)?” 남명의 죽음 앞에 그간의 학은(學恩)과 함께 참담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비해 퇴계와 관련된 만시는 남아 있지 않다. 물론 그의 문집은 체계적으로 간행되지 못했다. 퇴계와 관련된 많은 글을 남겼을 것이지만, 전혀 수습되지 못했다. 퇴계집에 보면 성암에게 남긴 두 수의 시는 두 사람과의 관계를 아는데 소중한 자료다.

‘휴퇴를 빌어 고향으로 돌아오자 정언 김인백이 시 두수를 부쳐 보내므로 차운하여 봉정하다(乞退還田里 金仁伯正言 追寄詩二首 次韻奉呈).’ 격을 갖춘 시 제목이다. 여기서 김인백이란 김효원의 자이다. 김효원이 정언이 되었을 때는 선조1년(1568)으로 27세였고 퇴계가 시를 지은 것은 그 이듬해였으니 당시 69세의 노학자였다.

41세나 아래인 사람에게 ‘봉정’이란 단어까지 쓴 것은 퇴계 자신의 경(敬) 공부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성암의 위상도 작용되었다고 본다. 첫째 수 마지막 구절에 ‘보내온 경구를 읊조려 보니(爲吟來警句)/ 술 갓 깬 그 마음과 꼭 같네 그려(心似酒初醒)’라 했다. 이는 성암의 격조 있는 시 구절을 칭찬한 내용이다. 둘째 수의 시 내용은 ‘부단히 도를 닦아 진리를 얻게 되면 천리나 서로 떨어져 있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分襟千里可無愁)’고 하는 것이다. 서울에서 안동으로 낙향한 자신을 아쉬워했을 제자에게 애절한 당부와 격려를 보내고 있다.

성암의 교유는 당대 최고였다. 대표적인 인사를 들면 덕계 오건, 약포 정탁, 학봉 김성일, 파곡 이성중, 동강 김우옹, 서애 류성룡, 하곡 허봉 등이다. 성암과 명종19년(1564) 진사시에 함께 합격한 인사를 보면, 송암 이로(1520년 생, 3등 31), 율곡 이이(1536년 생, 3등 42), 학봉 김성일(1538년 생, 2등 24), 서애 류성룡(1542년 생) 등 쟁쟁한 인물이다. 성암이 3등 65인이며 서애가 그 바로 뒤인 3등 66인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백사 이항복은 율곡 이이의 신도비명에서 동서 분당 초기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이때 조신들이 형적(形迹)을 서로 표방하여 동서의 당이 생기기까지 하므로 조정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공이 조정이 편안하지 못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노수신 정승에게 말하여 심의겸, 김효원 두 사람을 외군(外郡)으로 내보내서 조정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청했다.”

율곡은 당파 인사가 아니다. 그는 두 사람의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중재했다. 그러나 당파 세력은 누구도 손을 쓰지 못한 채 마주 달리는 열차였다. 조선왕조실록 김효원 졸기를 보면 “야박스러운 습속이 떠들어대며 서로 선동한 데서 나온 것이지 이 두 사람이 각자 당파를 만들어 불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도를 지키고 나라를 걱정한다는 지향점은 같았지만 서로 사소한 오해가 예기치 않게 커져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한 두 사람이다.

▲ 성암과 삼척

성암은 34세부터 4년여에 걸쳐 삼척도호부사를 지냈다. 그는 미신 타파는 물론 인재 양성, 농사, 양잠을 권장하였으며 노인을 공경하고 선행을 포장하여 1년여 만에 고을의 면모를 일신했다. 은혜에 감복한 지역 주민들은 성암이 세상을 떠난 뒤 사당을 세워 기렸고, 후에 태수로 온 창석 이준(서애 문하의 대표적 문인)이 글을 지어 이를 역사에 남겼다.

인조9년(1631)에 삼척시 부정산 아래 세운 사당은 현종2년에 이건했고 순조24년에 중수와 함께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현종3년 강원도관찰사 한익상이 강당을 창건했다. 이후 고종5년에 훼철되어 학전(學田)과 서책을 삼척향교로 이관해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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